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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130화 (1,118/1,404)

#1129화 헤르게니아 (6)

헤르마늄이 담긴 장비를 상대하려면 그에 준하는 물질을 사용한 아이템으로 싸우거나 혹은 아예 헤르마늄으로 된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헤르마늄으로 만들어진 저 합성된 타락 천사를 상대하기 위해 같은 헤르마늄으로 된 장비를 쓰는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에센시아 기사단들의 전열이 헤르마늄을 소량이라도 섞은 아이템을 가진 기사들로 변경되면서 압도적으로 밀려 나가던 풍경은 그나마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사단의 숫자에 비해 합성된 타락 천사들의 숫자는 많은 편이었다.

거기다 적들이 헤르마늄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걸 몰랐던 초반의 격돌로 인해 기사단 중 상당수가 죽거나 죽음에 상응하는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앞으로 지하 사원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꽤 큰 피해이기도 했고.

차아앙!!

캬가각!!

전열을 바꾼 기사들과 합성된 타락 천사들의 무기들이 쉴 새 없이 부딪히면서 사방에서 병장기가 갈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양쪽 다 팽팽하게 유지되는 이 전투에서 균형이 조금이라도 깨지게 된다면.

바로 한쪽이 휩쓸리다시피 밀려 버릴지도 모르겠다.

이미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고 있는 재중이 형이 여유로운 말투로 연락해왔다.

<불멸> 호오. 양쪽 다 꽤 잘 싸우는데? 아주 피 터지게 싸우고 있잖아.

마치 어느 한쪽도 응원할 생각이 없다는 듯.

그리고 이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호> 그림이 딱 좋네요.

만약 어느 한쪽이 너무 우세하면 이런 식으로 구경만 하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누가 이기더라도 크게 상관없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각 기사단! 전열을 밀리지 마라!”

“부상자를 뒤로 빼! 녀석들에게 먹히면 안 돼!”

먹히면 안 된다라…….

확실히 이건 우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긴 했다.

설마 상대를 먹어치워서 힘을 불리는 녀석들이라니.

그래서인지 기사단 역시도 부상자를 최대한 뒤로 빼내는데 주력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런 급한 상황 속에서도 기사단마다 각자의 기사들만 챙기기 바빴다.

바로 옆에 다른 기사단의 녀석들이 쓰러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사단 사이에서 골이 깊다고 하던데…….

그 정도가 예상보다 훨씬 심한 듯했다.

뭐 우리에겐 나쁘지 않은 소식이기도 하고.

“회복부터 시켜!”

“부상자들을 지켜라!”

뒤쪽으로 빠진 부상자들은 각 기사단이 보유한 회복술사들에게 물약과 힘을 잔뜩 받고는 이내 조금씩 체력을 회복해갔다.

기사단마다 상당히 상위의 회복술사들을 보유한 듯 금세 부상자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있었다.

흐음.

저건 문제가 되겠는데.

확실히 시간이 지나면서 합성된 타락 천사들의 숫자는 하나둘씩 줄어들고 있었다.

일단 녀석들은 한 번 부서지고 나면 회복은 되지 않는 편이라.

처음의 당황은 잠시뿐.

이제는 천사 석상들에게 적응이 되었는지 기사단의 피해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모든 장비에 헤르마늄을 둘러싼 녀석들이 앞으로 나서고 나서는 더 그랬고.

총 네 명의 녀석들이 앞으로 나섰는데.

압도적인 실력과 장비를 이용해 합성된 타락 천사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오러 역시도 눈에 띌 만큼이나 화려하게 타올라 연신 천사 석상들을 압박해갔다.

분명 숫자는 타락 천사들이 많지만.

저들에게는 그게 문제가 되진 않는 듯했다.

지켜보고 있던 재중이 형에게서 연락이 들어왔다.

<불멸> 맥크라이가 그러는데 저 녀석들이 기사단의 단장들이다.

<주호> 역시 그런가요.

<불멸> 아아. 그리고 저 녀석들 장비에 헤르마늄이 상당히 많이 섞여 있어. 순도도 높은 편이고. 맥크라이가 직접 만들어 줬으니 성능도 무시할 수 없겠지.

헤르마늄이란 헤르마늄을 몽땅 들어다 부어 만든 장비라…….

역시 맥크라이가 만들어 준 거였나.

물론 내 대천사의 검이나 이쁜소녀의 진(眞) 토르만큼 통짜로 만든 물건은 아니지만.

분명 꽤 순도가 높은 물건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 합성된 타락 천사들의 신체가 저렇게 부서지진 않을 테니까.

실력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저 기사단장들의 레벨 역시도 상당히 높은지 타락 천사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고.

오히려 압도하는 듯한 느낌까지도 받는 중이다.

마치 지금까지는 녀석들의 전력을 살폈다는 느낌이 더 강하달까.

신체가 변형되어 무기를 계속 바꾸는 존재를 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그리고 그런 점까지 미리 염두에 두고 싸우는지 천사 석상들이 연신 무기를 바꾸어도 당황하지 않고 적절히 대처해 나갔다.

<불멸> 저 단장들 실력이 생각 이상으로 좋아. 아마 무기가 좀 밀리더라도 어렵지 않게 정리했을 것 같다.

재중이 형의 평가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사단 중에서 유독 저 기사단장들의 실력이 압도적으로 좋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주호> 안 봐도 뻔하겠네요. 저 녀석들, 영웅이죠?

<불멸> 어, 성마대전에서 아주 유명해지는 녀석들은 아니지만. 초입 수준은 넘어가는 녀석들이겠지.

영웅.

그들은 하나같이 이 성마대전 시대의 괴수 같은 존재들이다.

물론 영웅이라고 다 같은 등급은 아니니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리고 이곳에서 정말 영웅이라고 부를 만큼 강한 녀석은 따로 있었다.

저기 뒤쪽에서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는 바로 저 녀석.

절망의 기사.

라첼 공작.

다른 기사단이 하나같이 나서서 싸우고 있는 와중에도 저 녀석은 차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 있었다.

누가 보면 겁쟁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주변의 기사들이 라첼을 보면서 혀를 차는 모습을 보면 우리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듯했다.

저럴 거면 왜 데리고 온 건지 의문이 들긴 하는데…….

만약 저 녀석이 정말 그 절망의 기사가 맞는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저 기사단장들이 동시에 덤비더라도 한 칼에 눌러 버릴지도 모른다.

무려 그 마왕들과도 단신으로 맞짱 뜨는 녀석인데 말이지.

일단 전투는 전투고.

당분간 전투가 끝나진 않을 듯해 하이딩한 상태로 몰래 뒤로 돌아 들어갔다.

다행히 모든 기사단이 타락 천사들과 격한 전투를 벌이고 있어서 그런지 내 움직임에 낌새를 차리거나 하진 못 한 듯했다.

그럴 정신도 없을 테니.

일단 우리 팀 근처로 움직이자 재중이 형은 바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 잘 갔다 왔냐?”

“네. 생각보다 쉽네요. 핵이 있으니까 타락 천사들이 반응도 안 해요.”

“그건 좋네.”

재중이 형도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 지었다.

그때 전사 형도 고개를 돌려 하이딩 되어 있는 내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냐?”

“아, 뭐 그렇긴 해요. 죽으러 들어갔던 녀석이 멀쩡히 돌아다니면 이상하긴 할 테니까요.”

전사 형 말이 틀리지 않았다.

분명 저 합성된 타락 천사 석상 사이로 걸어 들어갔던 내가 멀쩡히 돌아다닌다면?

저 상위 기사단들도 타락 천사들에게 바로 찢겨나가는 상황인데 그보다 낮은 넘버의 기사단 멤버인 내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돌아오는 것 자체가 이젠 문제가 될 것이다.

“그래서 하이딩 상태로 있는 거지?”

“그렇죠. 상황을 봐서 합류하든지 할게요.”

“음. 여차하면 어디 비밀 공간이라도 있어서 숨었다고 해.”

“네,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속아 줄진 모르겠지만요. 아무래도 저 기사단장들이 보통이 아닌 것 같거든요.”

그러자 전사 형도 기사단장들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그런데 다시 돌아온 건 왜?”

“아. 지금 접촉해 볼까 해서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전사 형이 알겠다는 듯 되물었다.

“라첼 공작?”

“지금은 그 공작은 아닌 듯하지만요.”

“흠. 나쁘진 않네. 다들 시선이 전투에 쏠렸으니까.”

“네. 그럼 다녀올게요.”

다른 기사단들이 멀쩡할 때 대놓고 우리가 라첼 공작에게 접근하면 그것도 굉장히 이상한 그림이 될 터다.

반대로 지금은 기회에 가까웠다.

녀석들이 신경 쓰지 못할 테니.

하이딩 상태에서 바로 3기사단의 뒤를 돌아가자 라첼 공작이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피를 줄줄 흘리는 부상자들에게 압박 붕대를 감고 있었다.

거의 숨이 넘어갈 것처럼 몰아쉬면서.

“하악…… 하악…….”

저건 마치 피를 무서워하는 것 같은 모습이랄까.

아니.

그렇다고 보기엔 좀 이상하긴 한데.

뭔가 굉장히 묘한 이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당장 그걸 생각하기에는 상황이 그다지 좋진 못했다.

옆에 있던 회복술사가 짜증 난다는 듯 외쳤다.

“똑바로 안 해? 아니! 기사라는 놈이 붕대 하나 똑바로 못 감아?!”

“허억…… 허억…….”

하지만 라첼은 그런 회복술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온 정신이 완전히 다른 곳에 팔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흠.

이상하네.

딱히 피를 무서워하는 것 같진 않은데.

만약 그렇다면 피를 보자마자 기겁하면서 떨어졌어야 할 테지만…….

지금 모습은 그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뭐라고 딱 짚어서 말하긴 뭐하지만.

내가 저런 표정을 어디서 봤더라…….

바로 전사 형에게 연락했다.

<주호> 전사 형, 이 녀석 좀 이상한데요?

<방패전사> 응? 왜?

<주호> 흐음…… 묘하게 이상해요. 피를 무서워하는 것 같진 않은데 피를 피하는 느낌이라서요. 피를 안 보려는 느낌 같은 느낌이랄까.

<방패전사> 그건 또 무슨 말이 안 되는 소리야?

<주호> 역시 좀 그렇죠?

내가 말해 놓고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때 재중이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불멸> 피를 보고 놀라는 중이야?

<주호> 음…… 아뇨. 놀라기보다는…… 뭐랄까 그냥 고개를 돌려서 안 보려는 느낌이 더 강해요.

<불멸> 다른 이상한 점은 없고?

그 말에 라첼을 더욱 가까이서 바라봤다.

어차피 하이딩 중이라 들킬 염려도 없기도 하고.

그러자 전에 보지 못 했던 뭔가를 발견했다.

어……?

입술을 떨어?

거기다 묘하게 볼에 홍조가 있는데다가 시선은 한 번씩 피를 흘깃흘깃 바라보는 중이었다.

거참.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그래서 도움을 청하기 위해 다시 설명해 주자 얼마 뒤 재중이 형에게 연락이 왔다.

<불멸> 아무래도 우리가 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주호> 네?

<불멸> 그 녀석…… 피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피를 원할 수도 있겠어.

<주호> 그게 무슨…….

<불멸> 뭐 지금 여기서는 답이 없고. 적당히 구슬려보고 빠져나와. 상황이 꽤 복잡해질 것 같으니까.

상황이 복잡해진다고?

그 말에 전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전장의 분위기가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우리가 전에 봤던 딱 그 광경이 지금 다시 펼쳐지는 중이었다.

상당수의 합성된 천사 석상들이 박살 나면서 사방에 석상 파편들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뒤쪽에 있던 타락 천사 중에 하나의 몸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고.

<주호> 저거…… 빨리 저지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불멸> 그래. 나 같으면 벌써 처리했겠지.

저 현상은 바로.

합성된 타락 천사들이 서로 합쳐지는 전조였다.

그렇게 합쳐진 이후의 녀석은 우리도 한 번도 보지 못한 녀석일 테고.

얼마나 미친 녀석이 나올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주호> 설마하니 저걸 그냥 둘 줄은…….

당연히 빨리 처리할 줄 알았는데.

<불멸> 몰라. 기사단장 녀석들. 저걸 처리할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

<주호> 미쳤네요.

하아.

적이 합체하길 멍하니 기다려 주는 멍청이들이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이쪽은 아직 시도도 못 해봤는데 말이지.

몇 가지 생각을 떠올리다가 시간이 없어서 모든 선택지들을 지우고 바로 라첼의 옆으로 다가갔다.

회복술사들의 시선이 완전히 다른 곳으로 팔린 사이.

라첼의 귓가로 한마디 말을 속삭였다.

이 말을 하는 나도 정말 이상하지만.

내 직감이 말해 준다.

이거.

왠지 통할 것 같다고.

“너 혹시…… 피 좋아하냐?”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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