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7화 헤르게니아 (4)
성마대전 당시 활약했던 영웅들의 명단은 이미 어느 정도 확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건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유저들도 꽤 알아놨을 테고.
그 정보로 미래의 영웅의 될 NPC들과 접촉해 이득을 얻기 위함이다.
그런 영웅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도 한 이유이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영웅이 얻을 만한 특수 아이템이나 스킬 등을 먼저 획득해 버리는 것이다.
만약 그 영웅이 처음부터 강하거나 아이템 등을 소지하고 있다면 이 방법은 쓰지 못하겠지만.
어찌 됐든 과거의 영웅들이 활약하기 전에 미리 그들을 확보하는 건 유저들에게 꽤 중요한 일이었다.
다른 유저들이 접근하기 전에 말이지.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는 또 다른 영웅이 될 싹이 한 명 보였다.
그것도 그냥 영웅이 아니라.
성마대전의 중반 이후로도 꽤 많은 전투에서 활약하는.
챠밍이 가리킨 NPC를 보고는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주호> 확실히 가능하겠네.
챠밍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전에도 꽤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전사 형도 나와 챠밍이 보는 방향을 바라보고는 놀란 듯 눈을 비볐다.
<방패전사> 어? 저 기사는…….
<주호> 전사 형도 알겠죠?
<방패전사> 그럼. 절망의 기사 아냐?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쟤가 지금 왜 여기 있어?
전사 형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지금 이 시점에 저 기사는 이 장소에 있으면 안 되는 NPC였다.
<주호> 그러니까요.
챠밍이 바로 찾아낸 것도 신기할 정도지.
솔직히 나도 챠밍이 말해주지 않았으면 한참 뒤에서나 발견했을 것이다.
<방패전사> 쟤 원래 지금쯤 성마대전 뛰고 있을 애 아냐?
<주호> 아마도 그럴걸요.
각 영웅들의 세세한 일정을 시기별로 모두 기억한다는 건 일일이 찾아보지 않는 이상에야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중에서 특수한 몇몇 NPC들은 기억이 나기도 한다.
아주 특이한 일이 있을 때 그곳에 존재하던 NPC 같은 경우에는.
<방패전사> 으음. 그럼 아직 영웅이 되기 전이려나? 쟤. 성마대전에서 폭주하면서 각성하잖아.
어떤 계기를 통해 갑자기 급성장을 하는.
정말 특이한 케이스 중에 하나.
그게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절망의 기사다.
그리고 저 기사에게 거의 마계의 마왕들에게나 붙을 만한 수식언이 붙는 이유는…….
우리 시선을 따라 바라보던 재중이 형 역시도 흥미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불멸> 호오. 절망의 기사가 왜 여기 있냐?
재중이 형 역시도 같은 생각이었다.
있지 않아야 할 장소에 있는 NPC의 존재는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주호> 그러게요.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있네요.
절망의 기사.
라첼 공작.
이 수식언은 정확하게는 인간들이 붙여준 수식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천사들이 붙여준 것도 아니고.
사실 이건 마왕군이 그를 부르는 명칭이었다.
일어나는 전투 모든 곳에서 마왕군에게 절망을 주는.
그야말로 마왕에게나 붙을 수식.
어떻게 보면 통곡의 벽인 미래의 비에른 공작과 그 의미가 일맥상통하는 계보라고 해야 하나?
방어에 특화되어 있는 영웅 NPC가 비에른 공작이라면.
이 라첼이라는 NPC는 그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절망이랄까.
보이는 모든 마왕군에게 절망을 주는.
참전한 모든 전투에서 미친듯한 활약과 더불어 오히려 마왕군들이 피해 다녀야 하는 1순위의 NPC.
오죽하면 마왕군 사이에서 이 라첼이 참전하는 전투는 피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마왕들이 상대하기 제일 꺼려 하는.
그야말로 전장의 투신이다.
아마 지금껏 우리가 만난 모든 NPC들을 통틀어서 공격력 하나만큼은 최강이 아닐까.
굳이 인간군 중에서 공격력만 비교하자면…….
이 라첼 공작이 전장의 왕인 3황자와 더불어 최강의 순위를 다툴 것이다.
3황자가 1황자에게 대놓고 싸움을 걸지 못하는 이유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미래의 라첼 공작은 이런 곳에 투입될 만한 NPC가 아닐뿐더러.
저렇게 3기사단의 구석에 숨다시피 구겨져 있을 녀석도 아니니.
특이하게 다른 체격이 큰 기사단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몇 빰 길이만큼 작아 보이는 한 기사.
다른 기세등등한 기사들 사이에서 유독 기세가 밀리는 듯 구석에 얌전히 있는 라첼의 모습은 꽤 이질적이었다.
그 모습을 본 전사 형이 저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방패전사> 아마 각성하기 전까지는 그냥 평기사였을 거야. 전투 재능은 있어 3기사단에 들어가기는 했는데. 워낙 소심해서 거의 뒷전에 머물렀다고 하던데. 사실이네.
<주호> 그러니까 지금은 그 절망의 기사는 아니라는 거네요.
<방패전사> 그렇긴 하겠지. 어쩌면 본 모습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왜소한 체격에 비해 커 보이는 투구 사이로 관리를 못 한 듯 멋대로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거칠게 엉켜있는 모습과 함께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기다란 대검을 양손으로 질질 끌고 다니는 모양새라…….
정말 저 녀석이 그 라첼 공작이 맞나 싶은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렇다고 저 라첼이 들고 있는 대검이 특수한 아이템인가 하면.
딱히 그렇게 보이지도 않았다.
만약 특수한 무기였다면 벌써 르아 카르테가 반응을 보였을 테니까.
오히려 르아 카르테가 반응을 보인 것은 2기사단의 단장이라는 녀석이 잠시 나섰을 때였다.
아마도 그 녀석이 가진 어떤 무기에 반응을 했을 터.
한 기사단의 단장이 르아 카르테가 반응할 만한 특수한 무기를 가졌다는 건.
거의 영웅급이라고 봐야 하려나?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재중이 형에게 물었다.
<주호> 한번 접촉해 볼까요?
<불멸> 흐음. 지금은 아니고.
재중이 형이 슬쩍 맥크라이와 2기사단의 녀석을 쳐다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주호> 이쪽부터 처리해야겠네요.
내 말에 재중이 형이 앞으로 나섰다.
“맥크라이 장로님. 시간이…….”
“음. 그래.”
이건 신호다.
슬슬 움직이자는.
그러자 2기사단의 그 녀석이 전에 자신의 검을 막은 재중이 형을 노려봤다. 재중이 형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 시선을 흘려버렸다.
2기사단의 녀석도 잠시 재중이 형을 보다가 흥미가 식었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럼 장로님. 제국 황제께서는 인내심이 별로 없으십니다.”
“흠. 알고 있네. 그대들을 계속 여기 있게 할 순 없으니 움직이게나.”
먼저 맥크라이가 앞장서자 자신의 말을 들어서 흡족한 듯 2기사단의 녀석이 웃음 지었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웃을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그렇게 맥크라이와 우리가 지하 사원의 안쪽으로 움직였고 2기사단과 3, 4, 5, 7기사단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거리를 유지하면서 우리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뭐 처음에야 저 기사단들에게 시선이 갔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오직 라첼 공작.
저 한 명에게만 시선이 갔다.
<주호> 혹시 여기서 각성하게 되면 어떻게 하죠?
<불멸> 글쎄. 그리고 그게 좋을지 나쁠지도 모르겠는데.
재중이 형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불멸> 좀 어수선해질 때 접촉해 봐.
<주호> 네. 조만간.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다시 맥크라이에게 붙었다.
“잘해 주셨어요.”
“흠. 연기는 영 힘들구만.”
맥크라이가 기사단들 몰래 웃음을 보이자 나 역시 웃었다.
“곧 난리가 날 겁니다.”
* * * * *
맥크라이가 순순히 기사단의 말을 들어준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입구를 통해 지하 사원의 안쪽으로 점점 들어가자 곳곳에서 헤르마늄의 흔적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헤르마늄의 파편들은 기사단의 이목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헤르마늄이 이렇게나 많이…….”
“바깥에 있는 건 정말 먼지나 마찬가지였잖아?”
“이걸로 무기를 만들면 정말 굉장하겠는걸?”
“우리 기사단 먼저 보급되지 않겠어?”
꽤 많은 양의 헤르마늄 광석들을 보고는 서로 장밋빛 미래를 펼쳐 보이는 중이었는데.
사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헤르마늄 광산의 매장량 자체가 다른 헤르마늄 광산과는 꽤 차이가 날 정도로 많은데.
이곳 지하 사원은 그 헤르마늄 광산에서 나는 헤르마늄을 따로 모아놓은 듯한 느낌까지 주었다.
저들의 눈을 사로잡을 정도로.
그리고 그런 그들과 함께 계속 움직이다가 곧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춰 섰다.
이전에 봤던 익숙한 녀석들을 발견했으니까.
<주호> 도착했어요.
<불멸> 그럼 시작해 볼까?
우리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전에 상대했던 바로 그 합성된 천사 석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것도 이전에 봤던 녀석들의 수를 훨씬 상회하는.
먼저 발견한 맥크라이가 슬쩍 운을 띄웠다.
“흠. 이쪽에서부터는 우리도 가보지 못한 구역이다.”
그러자 2기사단의 녀석이 나서서 대답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나서 달라는 겁니까?”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말하는 2기사단의 녀석에게 우리도 코웃음 쳤다.
이 녀석 봐라.
아주 대놓고 자신들이 먼저 나서지 않겠다는 걸 티 내는 중이었다.
그리고는 맥크라이 뒤쪽에 있는 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뻔뻔하게 말했다.
“저 녀석들은 폼으로 데리고 온 것이 아닐 텐데요.”
이젠 아예 대놓고 우리에게 나서라고 하고 있는 2기사단의 녀석을 보면서 맥크라이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흠. 이들은 절 지키기 위해 황제 폐하께서 붙여주신…….”
“그런 일이라면 우리 쪽 애들이 훨씬 잘할 겁니다.”
거절의 의사를 확연하게 내비친 2기사단의 녀석을 보더니 맥크라이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보란 듯이.
그리고는 다른 기사단들에게 시선을 돌리자 다들 하나같이 이 상황과 상관없다는 듯 대답을 거절했다.
“때 되면 나설 테니 저들을 먼저 보내십시오.”
다른 기사단을 앞두고 전력 누수를 신경 쓰는 건지.
나서지 않겠다는 걸 확실히 못 박은 녀석들을 보고는 맥크라이가 결국 내게 다가와 저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말했다.
“역시 자네 말대로 이렇게 되는군.”
“그런 녀석들이니까요.”
그리고는 맥크라이의 어깨를 살짝 치면서 대답했다.
“잘하셨어요. 그럼 이 뒤는 맡겨 주시죠? 아주 녀석들에게 지옥을 보여줄 테니.”
“흠. 너무 무리하지 말게나.”
“아마 어렵지 않을 거예요.”
고개를 돌려 나르샤 누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안쪽까지 몇 마리 있다고 했죠?”
그러자 나르샤 누나가 제3의 눈을 발동한 뒤 내게 말해 주었다.
“대략 삼백 정도?”
아예 움직이지 않는 이 석상 같은 경우에는 내 감각에는 그냥 돌과 같은 존재라 이럴 경우는 오히려 나르샤 누나가 시야가 더 도움이 되었다.
“생각보단 괜찮네요. 그럼 다녀올게요.”
“으음. 내가 할까?”
“아뇨. 너무 위험해요. 그리고 전 이게 있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슬쩍 하나의 아이템을 보여 주면서 말했다.
“챠밍하고 막내별을 보호하면서 최대한 뒤로 빠져요. 혼란이 오면 그쪽까지 커버하기 힘들 거예요.”
“응. 알았어.”
그리고는 나르샤 누나가 바로 챠밍과 막내별 옆으로 움직였다.
지금의 재중이 형과 전사 형, 이쁜소녀는 아마 괜찮을 듯하고.
곧장 내가 앞으로 나서면서 기사단 녀석들에게 대놓고 밑밥을 깔았다.
“여긴 우리도 가보지 못한 길이라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진 아무도 모릅니다.”
한 마디로 무슨 일이 생겨도 내 책임은 아니라는 뜻을 내보인 셈이었다.
그러자 각 기사단에서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2기사단의 단장이 나서서 대표로 말했다.
“미지의 구역을 탐사하는 거라면. 네게 앞으로의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하지.”
네 몸으로 탐사를 하되 네가 죽든 말든 우린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을 굳이 돌려서 한 말이었다.
뻔뻔한 건 다 똑같네.
그들을 뒤로한 채 바로 합성된 천사 석상들 사이로 쭉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이전과 달리 녀석들은 전혀 깨어나지 않고 내가 지나가는 걸 그대로 기다리기만 했다.
그런 내 품에서는 하나의 아이템이 불길한 기운을 계속 내뿜고 있었고.
그렇게 한참을 걸어 들어간 뒤.
녀석들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쯤 되어서야 웃음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핵을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모두 깨어나라.”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