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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083화 (1,071/1,404)
  • #1082화 1082화 5황녀 (6)

    이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레오나 에센시아가 황위에 관심이 없는 상황인데 주변에서 부추기고 있는 경우.

    그게 만약 황제의 변덕에 의한 관심이라면?

    여기서 괜히 휘말렸다가 나중에 곤란해지는 이상한 그림이 나올 수도 있었다.

    다른 황자와 황녀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중간에 치이는 굉장히 불편한 상황까지 함께.

    내 날카로운 질문에 잠시 침묵을 하던 레오나 에센시아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군요.”

    “그러죠.”

    그녀는 아마도 주변을 의식하는 듯 다소 말을 아끼는 모양새였다.

    혹시나 싶어 감각을 퍼트려 사방을 살폈으나 딱히 내 감각에 걸리는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특수 아이템 같은 걸로 위장한 경우에는 또 모르겠지만…….

    일단 조심하는 게 좋겠지.

    시작해 보기도 전에 패가 다 까이는 건 사양이라.

    그때 레오나 에센시아가 카샤스 대공을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카샤스 대공에게 전혀 꿇리지 않는 눈빛으로.

    황녀 신분과 대공 사이에는 분명 격차가 존재하지만 레오나 에센시아는 부담스럽게 느끼진 않는 듯했다.

    “계속 따라오실 건가요?”

    “축객령인가?”

    “그저 손님으로 오셨다면요.”

    의미심장한 뒷말이 이어지자 카샤스 대공이 흥미로운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일단 그쪽 나라 손님은 아니고. 이쪽이 메인이라.”

    그러면서 카샤스 대공이 날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마치 맡겨둔 물건을 찾으러 온 사람처럼 뻔뻔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대가 하기에 따라서 그쪽 손님이 되어줄 수도 있겠군.”

    역시 따라오면서 들었나.

    저 정도 되는 스펙의 영웅이라면 어지간한 거리에서 말하는 내용도 어렵지 않게 엿들을 수 있을 것이다.

    <불멸> 저 녀석도 아주 관심이 없진 않은 듯한데?

    <주호> 네, 그랬으면 벌써 거절했겠죠.

    은연중에 레오나 에센시아는 제안을 한 거고.

    카샤스 대공은 적당하게 받아들인 셈이었다.

    물론 빠져나갈 구실은 충분히 만들어두면서.

    저 녀석.

    능구렁이 같은 면도 있네.

    하긴 대공이라는 자리가 그냥 혈통으로만 유지됐다면 저런 영웅의 위치까지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불멸> 타란 제국이 아무리 외부와 단절되었다고 해도 에센시아 제국에 한 다리 걸쳐놓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니까.

    <주호> 5황녀는 좋은 구실이겠네요.

    그렇다고 카샤스 대공이 완전히 레오나 에센시아를 돕겠다고 나서는 건 또 아니었다.

    만약 그런 식으로 지원하게 되면 엄연한 정치 간섭이 되는 셈이라.

    후에 타란 제국이라는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여서 황제가 되면.

    그 과정에서 타란 제국의 입김이 강하게 적용되면.

    결국 그 부담은 레오나 에센시아가 전부 짊어지게 된다.

    잘못하다가 외부의 통치를 받는 반쪽짜리 제국으로 변질되어 버릴 수도 있는 노릇이고.

    그만큼 카샤스 대공이란 패는 유용하면서도 위험한 패였다.

    이걸 레오나 에센시아가 모르진 않을 텐데…….

    그럼에도 그녀 주변에는 좋은 패가 너무 없는 것도 문제다.

    저런 위험한 패를 잡아야 할 만큼이나.

    카샤스 대공의 답을 들은 레오나 에센시아가 미묘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듣기에 따라선 매력적이긴 하네요.”

    저 답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레오나 에센시아도 위험부담이 있다는 걸 분명 인식하는 중이라고.

    “하지만 오늘은 저쪽 손님으로 오셨으면 좋겠어요.”

    분명히 여지를 줄 수 있는 멘트였다.

    딱히 거절은 하지 않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그러자 카샤스 대공이 묘한 웃음을 보이면서 받아쳤다.

    “나쁘지 않군.”

    일단은 이 정도 포지션에서 만족하다는 뜻이려나?

    그리고 황녀 역시 살짝 숨을 내쉬는 걸 봐서는 긴장을 하긴 한 모양이었다.

    카샤스 대공의 대답 여하에 따라 판도가 달라질 수 있는 노릇이라.

    “그럼 손님 대접 좀 받아볼까?”

    * * * * *

    레오나 에센시아를 따라 간 곳은 본성에서도 꽤 후미진 외곽에 가까운 황녀궁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녀궁이라기보다는…….

    제국에서 기본적으로 나오는 궁을 겨우 보수공사 정도만 마쳐 놓은 딱 그런 느낌.

    황녀가 머문다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작은 규모의 저택이었다.

    이 수준이라면 그냥 어느 한미한 귀족의 저택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인데.

    확실히 지지 세력이 없는 게 크긴 하네.

    아마 다른 황자나 황녀들은 으리으리한 궁을 지어놓고 지냈을 것이다.

    자신들의 처가인 각 왕국이나 공국, 혹은 대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그나마도 저 낡아 보이는 궁이 이번 아크 드래곤의 침략으로 인해 저택의 흔적이 반쯤 날아가 정말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 광경을 본 레오나 에센시아가 입을 꾹 다물고는 빤히 황녀궁을 바라보았다.

    제국 성은 지켜낸 이가.

    정작 자신의 집은 지켜내지 못한 딱 그런 모습이랄까.

    뒷모습이 꽤 씁쓸해 보였지만.

    레오나 에센시아가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 무표정한 말투로 말했다.

    “앉을 곳은 있을 거예요.”

    그러면서 무너져 버린 폐허 사이로 발길을 옮기자 나와 재중이 형, 카샤스 대공이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딱히 무너진 건물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리고 원래 손님 접대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들어갔지만 폭풍이라도 맞은 듯 제대로 된 집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먼저 레오나 에센시아가 흙먼지 위의 탁자에 대충 걸쳐 앉고는 우리에게 말했다.

    “편하신 곳에 앉아요.”

    일반적인 황녀에게서는 볼 수 없는 털털함이랄까.

    아마 다른 황녀들이라면 질색했을 텐데.

    레오나 에센시아에게서는 그런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군인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인가?

    이전부터 느꼈지만.

    그녀가 자란 환경이 다른 황녀들과는 꽤 차이가 있는 듯했다.

    “여기라면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겠죠.”

    “아까 따라 붙은 녀석들 때문인가요?”

    내 말에 레오나 에센시아가 살짝 놀라는 눈치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카샤스 대공 역시도 마찬가지.

    “흐음. 제국의 그림자들은 쉽게 찾지 못할 텐데…… 영웅 후보 수준으로는.”

    “그래서 그 그림자들이 아크 드래곤은 잡을 수 있고?”

    “아니다. 내가 헛말을 했군.”

    아마도 카샤스 대공은 계속 알고 있었던 듯했다.

    우리를 따라 붙는 그림자들에 대해서.

    황녀는 당연히 알고 있을 테고.

    감각으로 주위를 다시 한 번 훑어보고는 레오나 에센시아에게 말했다.

    “지금은 없네요.”

    “네, 본성 밖으로는 나오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대답하는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그들이 진짜 근위대입니까?”

    아무리 봐도 이전에 네이던 후작이 끌고 다니던 근위대는 아닌 듯했다.

    그때의 녀석들과는 풍겨오는 느낌 자체가 완전히 다르달까.

    녀석들이 정말 잘 갈무리된 정제 된 움직임을 어둠 속에서 흔들림 없이 보여 주고 있던 반면에.

    네이던 후작의 황실 근위대는 그냥 좀 강한 군인의 느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 말에 레오나 에센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직속 친위대에요. 황실 근위대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죠.”

    “수장이 아마도 전에 그 녀석이겠네요.”

    황제 옆에 딱 붙어 있던 그림자 녀석.

    카샤스 대공이 진짜 근위대장이라고 말한 그놈일 것이다.

    “네. 그 정체는 아무도 모르지만요.”

    “황녀도 모른다는 겁니까?”

    “대부분의 황자나 황녀들은 그의 존재조차 모를 거예요. 굳이 말하자면 1황자와 3황자, 2황녀 정도만 알고 있어요. 아. 4황자를 포함해서요.”

    정말 나머지는 쭉정이였네.

    그런데 5황녀가 그들처럼 알고 있다는 게 의아했다.

    만약 황녀 말대로라면 5황녀도 모르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내가 빤히 바라보자 레오나 에센시아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전 그들을 느낄 수 있거든요.”

    “그런가요.”

    누군가 말해 주지 않는데도 알고 있다면.

    본인이 직접 느끼는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레오나 에센시아는 다른 황자나 황녀보다 확실히 앞에 서 있는 게 확실했다.

    이게 바로 5황녀의 능력이겠지.

    황제가 그녀를 밀어주려는 이유이기도 할 테고.

    그림자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반푼이 황자, 황녀 녀석들과는 아예 경쟁 자체가 불가하다.

    말할 순서를 고르는 지 잠시 입을 다물었던 레오나 에센시아가 나를 보면서 말을 꺼냈다.

    “사실 황제께서는 아크 드래곤이 침공했을 때…….”

    “‘제국성을 떠나지 않았었다’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그러자 레오나 에센시아가 조금은 놀란 듯 눈을 깜빡이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걸…….”

    “아, 뭐…… 황제를 직접 만나 보니까 바로 알겠던데요.”

    만약 황제가 내 생각만큼이나 강하다면.

    그것도 상위 마왕과 견줄 정도로 강한 수준이라면.

    절대 제국성을 비워두고 떠나진 않을 것이다.

    본인이 직접 상대가 가능한 상대를 두고 본진인 제국성을 버린다고?

    그건 말도 안 되지.

    아예 상대가 안 되면 또 모를까.

    거기다 조금만 시간을 끌다 보면 성마대전에 나갔던 녀석들도 돌아올 테니 굳이 제국성을 버릴 필요도 없었을 테다.

    “거기다 카샤스 대공이 그 증거이기도 하고요.”

    “나?”

    카샤스 대공이 자기를 가리키자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여기 카샤스 대공조차 아크 드래곤을 혼자 잡을 거라고 신나게 날아오셨는데 말이죠.”

    뭐 솔직히 카샤스 대공이 단독으로 아크 드래곤을 잡을 확률은 매우 낮은 편이었다.

    만약 카샤스 대공이 드래곤에 대한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지긴 하겠지만.

    가령 예를 들면 용족에 한해서 피해 감소나 대미지 증가 같은…….

    그렇게 용족을 상대하기 위한 최적의 아이템들이나 특성을 보유했을 때는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카샤스 대공이 코웃음 치면서 말했다.

    “내가 잡을 수 있다면 황제도 가능할 거란 말이냐?”

    “아, 딱히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닌데? 다만 대공이 상대하는 걸 겁내지 않는 녀석을 피해 황제가 제국 재산을 싹 챙겨서 도망갈 정도는 아니라는 거지.”

    상식적으로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라.

    그리고 카샤스 대공이 대놓고 말도 해주었다.

    영웅 특성 중에 에센시아 제국 황제가 최상위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그렇다는 건 역시 카샤스 대공보다 에센시아 제국 황제가 강할 거라는 소리였다.

    거기다 카샤스 대공이 경계할 정도로 진짜 친위대장인 그림자 녀석도 강하다.

    그 아래의 친위대 역시 생각 이상으로 강할 테고.

    한마디로 쉽게 무너질 제국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렇다는 건 역시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거지.

    “이번 방어전은 황녀에 대한 시험이었죠?”

    내 말에 다소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가 곧 레오나 에센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정확하게는 저뿐만 아니라 다른 황자, 황녀들을 동시에 시험하신 거죠.”

    “그런데 다른 황자, 황녀들은 다 도망갔고 말이죠. 제국성을 떠나는 황제의 전용 비공정을 줄줄이 따라서.”

    이번에는 맞다는 듯 레오나 에센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시험인지 몰랐을 거예요.”

    “네, 멍청한 거죠.”

    그 시험 한 번에 반쪽짜리 황자, 황녀들이 죄다 탈락한 셈이었다.

    거기에 그들을 따르던 귀족들까지도 함께.

    옆에서 재중이 형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불멸> 어쩌면 아직도 시험이었다는 걸 모를 수도 있겠는데? 아까 황제 앞에서 자리 깔고 앉아 있던 놈들 말이야.

    <주호> 아, 확실히 그렇겠네요.

    <불멸> 자기들 목 날아갈 자리인 줄도 모르고 떠들고나 있었으니.

    그 자리도 황제가 만든 게 아니라 아마 그들이 자청해서 찾아간 자리일 확률이 높았다.

    도망자 무리들을 대표해서.

    어쩌면 정말 황제가 그들의 목을 날려 버렸을지도 모르겠는데?

    일단은 친자식들이니 살려는 둔 모양이지만…….

    황제의 성향을 봤을 때는.

    그게 아닐 수도 있으려나?

    “뭐 어쨌든. 이번 시험에는 통과하신 셈이죠.”

    “덕분에요. 왕자님이 아니었으면 절대 이런 성과를 낼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관심이 있다는 뜻이죠?”

    “황위 말인가요.”

    “네. 만약 생각이 없다면…….”

    내 말에 레오나 에센시아가 굳은 표정을 짓더니 카샤스 대공을 한 번 바라봤다가 다시 시선을 돌려 날 보고는 이내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아뇨. 전 바라고 있어요.”

    좋아.

    확실한 각오는 알겠고.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건 알고 있죠?”

    “네. 각오하고 있어요.”

    각오만으로 될 수 있다면 누구나 황제가 될 테니까.

    진짜 중요한 건.

    황제가 되기 위한 발판을 쌓는 것이다.

    첫 번째 발판은 이미 쌓았고.

    그 두 번째 발판은…….

    “그럼 이번 비밀 던전 탐사. 무조건 성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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