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3화 새로운 용사 후보 (12)
집무실의 커다란 의자에 기대 나른한 듯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황제의 모습.
그 무료한 표정 아래 잠시나마 흥미를 느끼는 눈빛이 보였다는 정도이려나.
혹시 뭔가를 알고 있는 건가?
약간 불안한 마음에 재중이 형에게 물었다.
<주호> 형, 혹시 에센시아 황제가 로가슈 왕국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건 아니겠죠?
<불멸> 흐음, 글쎄다. 지금 말투만 보면…… 아주 모르는 것 같지는 않은데?
원 역사에서는 분명 에센시아 제국이 속한 이 크루아 대륙과 이전 로가슈 왕국이 있는 대륙과 교류가 거의 없다고 들었었다.
특별히 그 정보에 이상이 없는 이상에야 에센시아 제국의 황제가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만.
지금 저 눈빛은 마치…….
황제가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그런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불멸> 떠보는 것일 수도 있어. 동요하지 말고.
<주호> 네. 그런 실수는 안 하죠.
그동안 NPC를 속여 온 짬밥이 얼만데.
이 정도 압박에 실수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라는 사항을 물어온 것만 보면.
딱히 크게 의심을 하는 모양은 아니었고.
당장 에센시아 제국의 황제가 넌 왕자가 아니다라면서 한 마디만 해도 그동안의 노력은 완전히 날아가게 된다.
보상은커녕 여기서 빠져나갈 궁리부터 해야 할 테니까.
후.
여기선 최대한 뻔뻔하게 간다.
어차피 더 이상 물러난 곳도 없다.
“에센시아 제국을 구한 보상을 받고자 합니다.”
“보상이라…….”
그 순간 내게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돌발 퀘스트 : 에센시아 제국성 방어전(특급). 》
- 에센시아 제국성 수호.
- 고대종 아크 드래곤 퇴치.
- 황제 혹은 대리자가 사망하면 실패.
- 에센시아 제국의 NPC들의 숫자가 30% 이상 생존.
- 에센시아 제국의 건물 20% 이상 보존.
《 유저 주호 님이 얻은 에센시아 제국성 방어전 퀘스트 기여도 습득 포인트는 458,943,753 P입니다. 》
《 에센시아 제국성 방어전 퀘스트 기여도 순위 1위 - 신화 길드 / 주호 》
압도적인 기여도 1위.
아크 드래곤을 퇴치하면서 저 에센시아 제국의 황제, 그리고 남아있던 황녀까지 살려냈고.
NPC들도 30% 이상 생존한데다가 제국의 한쪽만 날아갔으니 건물 역시 꽤 보존되어 있었다.
다른 유저들이 참가하지 못했다는 걸 고려해 보면.
여기 책정되어 있던 모든 보상을 내가 몰아서 받을 확률이 높았다.
“보상이란 말이지…….”
잠시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보고해라.”
그런데 그 순간.
에센시아 제국 황제의 양옆으로 흐릿한 그림자가 생겨나더니 그 사이로 검은색을 띤 뭔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여기는 에센시아 제국 황제의 집무실이다.
황제의 안전을 위해서 공간이동을 허용하지 않을 텐데?
그때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카샤스 대공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저 녀석이 진짜 근위대의 대장이다.”
“뭐?”
“밖에 있는 녀석은 모르지.”
네이던 후작이 근위대장이 아니라는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모두가 그를 근위대장으로 알고 있던데?
심지어 그 비에른 자작 역시도 네이던 후작을 근위대장으로 여겼다.
그사이 카샤스 대공의 눈빛이 활활 불타올랐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녀석에게 흥미가 가득한 듯.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호승심이라고 해야 하려나?
네이던 후작을 상대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눈빛이 진심이 감도는 느낌이었다.
혹시나 하던 느낌에 카샤스 대공에게 물었다.
“저 녀석 강한가?”
“약하진 않지.”
“대공과 비교하면?”
“나보다는 당연히 약하지.”
카샤스 대공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하면서도 눈가를 찡그리는 걸 보면…….
이 녀석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저 그림자가 강하다는 데 내 손가락을 걸 수 있었다.
네이던 후작은 그냥 한 수 아래로 보고 봐주는 느낌이 강했다면.
지금은 그게 아니니까.
<주호> 형, 원 역사에서 이런 내용이 있었어요?
<불멸> 아니. 나도 처음 봐.
타란의 대공이 여기 와 있는 것도 예상 외인데.
저 그림자 녀석은 아예 정보조차 없었다.
형체가 없는 듯 일렁이는 그림자가 공간을 격해 나타난 후 에센시아 제국 황제에게 보고했다.
기괴한 듯한 갈라지는 목소리로.
“보고 드립니다.”
그리고는 품에서 뭔가의 서류를 꺼내 에센시아 제국 황제에게 넘겨주었다.
그런 서류를 받은 황제는 차근차근 음미하듯 보고서의 서류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다지 시큰둥한 표정이었던 황제가 서류를 하나씩 넘길 때마다 점차 흥미롭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아크 드래곤에게 비공정을 폭파시켰다라? 그것도 성유와 정령석을 실어서?”
무표정과 나른함으로 일관하던 제국 황제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입가가 기괴하게 올라갔다.
아주 살짝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정말 엄청나게 가져다 썼군.”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보고서에 적힌 수치를 다시 한 번 빤히 바라보는 모습.
하긴.
나 같아도 저건 놀랄 수밖에 없을 거다.
제국 내 있던 성유하고 정령석을 싹 다 쓸어모아 들이부었으니.
비에른 자작이 거짓 보고를 한 게 아니라면.
정말 제국이 휘청거릴 만큼 가져다 쓴 거다.
거기다 비공정은 말할 것도 없다.
터져 나간 비공정 수를 합쳐 보면…….
그걸 지금 제국 황제가 보고 받는 중이고.
살짝 어이없다는 듯 에센시아 제국 황제가 날 바라봤다.
그런데 의외로 기분 나쁘다는 표정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흥미 가득한 표정이랄까?
곧 황제가 입가를 살짝 올리면서 보고서를 한 장 더 넘겼다.
방금의 보고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배포가 큰 녀석이군.”
그걸로 끝.
그 이후로는 비공정과 성유, 정령석을 쓴 데 아무런 말도 없었다.
<주호> 설마 이걸 그냥 넘어가는 건가요?
<불멸> 흐음. 나도 황제가 걸고 넘어 질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아무리 황제라지만.
재정에 엄청난 피해를 봤을 텐데……?
이걸 넘어간다고?
그런데 그다음 장을 넘긴 순간.
오히려 황제의 눈이 가늘게 변하며 묘한 눈빛으로 내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다시 일렁이는 그림자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타이탄……?”
“네, 그렇습니다.”
“이것 참…… 재밌군.”
으음.
저 그림자는 타이탄까지 다 알고 있는 건가?
분명히 중간에서 통제를 했을 텐데.
거기다 에센시아 제국 황제의 병력은 전부 황실 비공정을 타고 이곳 제국을 떠났었다.
진짜 근위대장이라고 하는 저 녀석도 황제를 따라 떠났을 텐데.
지금 보고하는 걸 봐서는 우리가 어떻게 아크 드래곤을 잡았는지 너무 명확히 알고 있었다.
슬쩍 재중이 형을 보자 재중이 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불멸> 아예 손 놓고 가지는 않았다는 거려나?
<주호> 네, 그런 모양이네요.
아니면 비에른 자작을 통해 보고를 받았던가.
하지만 비에른 자작이 쉽게 입을 열진 않았을 텐데.
그렇다는 건 역시 중간 과정에서 정보가 새었다는 뜻이 된다.
애초에 불특정 병사들을 대상으로 작전을 했으니.
그중 몇몇이 말했다면 아예 모르진 않았을 테고.
그보다는 이렇게 빨리 자초지종을 알아온 것을 보면 역시 제국은 제국인 듯했다.
타이탄이 나온 보고서를 보고는 황제가 내 쪽을 보면서 물었다.
“정말 그대가 타이탄을 소유한 건가?”
“그렇긴 합니다만.”
“그렇단 말이지.”
이번 역시도 묘한 표정을 짓고는 황제가 표정을 숨겨 버렸다.
그림자에게 한 마디 말을 남기며.
“그동안 헛돈을 썼군.”
“…….”
응?
저게 무슨 말이지?
그림자는 황제의 말에 딱히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그도 알고 있는지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주호> 형, 아무래도 황제가 타이탄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불멸> 어, 그런 모양이다. 어쩌면 타이탄이 왜 거기 있었는지 설명이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이상은 황제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괜히 숨기니까 더 이상하네.
그렇다고 지금 황제에게 타이탄에 대해 캐묻기는 상황이 묘했다.
재중이 형도 그 사실을 내게 알려주었다.
<불멸> 여기서는 입을 다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황제는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 있어.
타이탄 또한 원래 역사에서는 마왕군에서 등장한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우리가 이용했단 말이지.
그 사이에서의 뭔가 어긋난 게 있을 텐데.
당장 궁금하지만 굳이 물어서 문제를 만드느니 황제의 반응을 기다리는 게 나을 수도.
이후 황제가 나머지 보고를 넘기며 살펴보고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치면서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집무실 안을 머무는 침묵.
이제부터는 황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에 따라 내 보상이 결정된다.
<주호> 르아 카르테나 다른 아이템들은 모르는 것 같죠?
<불멸> 어, 마검이나 대천사의 검 같은 건 딱히 모르는 듯하다.
만약 알았더라면 그쪽부터 캐물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알면서도 입을 닫은 경우도 있으려나?
황제가 아무 말도 안 하니 오히려 이쪽에서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보고서만 보던 황제가 곧 내게 말을 꺼냈다.
그것도 전혀 뜻밖의 말을.
“황녀와는 원래 아는 사이인가?”
응?
왜 지금 시점에 황녀에 대해서 물어보는 거지?
뭐 우리도 황녀가 유폐되었는지 궁금하기는 했기는 한데.
황제의 물음에 일단은 대답은 해주었다.
저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주면 우리야 이야기하기 편하겠지.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이입니다.”
“그런데도 황녀를 도와주었군.”
아니다.
딱히 굳이 황녀가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황녀가 정말 대놓고 제국을 털어 지원을 해준 덕분에 우리도 덕을 보긴 했었다.
만약 그녀가 아니라 다른 녀석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못했을 테지.
하아.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려나?
여기서 황녀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아크 드래곤을 잡은 공로는 오로지 내게 몰리겠지만.
그건 내가 바라는 일은 아니었다.
보상이 좀 줄어들더라도.
그 황녀는 일단 끼고 간다.
내 편으로.
“오히려 황녀가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물심양면으로. 만약 황녀가 없었다면 제국을 구하지 못했을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국의 재산으로.
그러자 황제가 튕기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지금의 발언으로 내가 황녀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걸 알았을 테니.
제국을 구한 것에 황녀가 지대한 영향이 있었다는 걸 내 입으로 증언한 셈이다.
그때 황제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아까 나간 혈통만 차지하고 있는 머저리 같은 녀석들과 달린 영특한 아이긴 하지.”
응?
생각보다 반응이 후한데?
그것도 생각 이상으로 평가가 후했다.
무엇보다.
방금 전까지 자리에 있던 그 황자와 황녀들 무더기들보다.
지금의 황녀를 훨씬 높게 쳐주는 발언을 황제가 했다.
<주호> 그 황녀 버려진 것 아니었어요?
<불멸> 그러게? 나도 이건 의외인 걸?
능력이 없어 대놓고 버리고 갔다고 보기에는.
황제가 오히려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때 재중이 형이 뭔가를 눈치챈 듯 내게 말했다.
<불멸> 이거…… 어쩌면. 황제가 제국을 버린 게 아닐 수도 있겠는데.
<주호> 네?
<불멸> 만약 버린 게 아니라…… 어떤 시험이었다면?
<주호> 설마 제국을 걸고 시험까지 했을까요?
<불멸> 모르지. 하지만 지금의 황제의 태도를 보면…… 확률이 높아. 그리고 만약 제국에 숨겨진 저력이 더 있다면 어떨까. 지금 저 그림자처럼.
<주호> 도망갔던 게 아니라. 도망가는 척을 했다는 건가요?
<불멸> 더 들어보면 알겠지.
재중이 형은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그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져 있는 듯했다.
그때 황제가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한 마디 말을 꺼냈다.
어쩌면 재중이 형이 옳았을 거라 생각되는.
“제국이 위험에 처하면 가장 먼저 떠나는 녀석들이 있지. 반대로 마지막을 함께하는 이들이 있고.”
의미심장한.
딱 선을 자르는 듯한 황제의 발언에 소름이 돋았다.
역시 재중이 형이 맞았나?
그러더니 황제가 회상하듯이 말을 이었다.
“황녀는 꽤 영특하지.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려는 것 같다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고 이후로 이어지는 말은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주호 왕자. 그대가 5황녀의 후견인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데.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