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2화 새로운 용사 후보 (11)
에센시아 제국의 황제.
그 황제라는 이름값은 결코 작지 않다.
성마대전에서 인간 세력의 큰 축을 이루는 제국의 왕이니까.
그리고 꼭 성마대전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제국이라는 규모에서 모은 부와 세력은 압도적이었다.
거기다 수많은 영웅들과 영웅 후보들의 지지를 받는 자리이기도 했다.
평소 같으면 그런 황제의 면전에서.
감히 일국의 왕자 따위가.
빳빳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는 일은 엄청나게 무례한 짓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일단 황제에게 꿀릴 것도 없고.
무엇보다 지금 난 에센시아 제국을 구한 영웅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다.
굳이 황제라고 쫄아 처음부터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필요는 전혀 없었다.
거기다 예전을 생각해보면 나 역시 교황 정도는 해먹은 적도 있으니까.
기분상이라도 황제 녀석에게 밀릴 이유는 하나도 없다.
“어머? 세상에…….”
“저, 저…… 무례한!”
“여기가 어디라고 지금!”
“당장 무릎 꿇지 못할까!”
황제 주변에 앉아 있던 황자와 황녀들이 벌떡 일어나 나에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황제는 가만히 지켜보는데 말이야.
의외의 반응에 황제의 표정을 스윽 바라봤는데 이번엔 내 쪽에서 놀라움을 표했다.
흐음.
표정이 아예 없어?
분명 뭔가 반응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달리.
그냥 무덤덤하게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그 표정에서 약간 소름이 돋았다.
<불멸> 호오. 의외잖아?
<주호> 그러게요. 생각과는 전혀 다르네요.
재중이 형도 내가 집무실을 박차고 들어가 보상부터 꺼내든 걸 보고는 도발과 함께 기선 제압에 의도가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런데 그런 의도와는 전혀 달리 황제가 아무런 반응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반대로 주변에 있는 황자와 황녀들이 더 난리법석이었지.
그러더니 분이 풀리지 않는지 황자 중 한 녀석이 벌떡 일어나 내게 씩씩 거리면서 걸어 나왔다.
“감히 대 에센시아 제국의 황제 앞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다니. 황제 폐하, 당장 저 무례한 녀석을 앞에 무릎 꿇리겠습니다.”
으음.
1황자인가?
아님 3황자?
그것도 아니면 4황자?
얼핏 보기에 이 녀석은 역사에서 봤던 그들의 인상착의하고는 많이 다른 느낌이 들었다.
분명 황제하고 많이 닮은 것 같기는 한데…….
흘깃 황제를 보자 황금색 갈기를 연상케 하는 풍성한 머리와 황금빛 금안이 눈에 띄였다.
군데군데 나이의 흔적이 보이긴 해도 아직은 강성한 느낌을 주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외형이랄까.
아마 1황자라는 녀석이 황금의 사자라고 불리는 것을 봐서는 이 황제와 가장 닮은 녀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씩씩거리며 걸어 나오는 녀석은 그와는 상당히 느낌이 달랐다.
뭔가가 가벼운 딱 그런 느낌?
지금 집무실 안에서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감을 보이는 황제와 비교하자면.
마치 푸석푸석하고 비루한 사자 새끼를 보는 것 같았다.
준수하게 생기기는 해서 유전은 잘 타고 났다는 생각은 들긴 해도.
위압적인 분위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라 왠지 모르게 김이 빠졌다.
<주호> 얘가 1황자는 아니겠죠?
<불멸> 설마.
재중이 형도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3황자는 절대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3황자와는 외모부터가 확연히 차이가 났다.
무엇보다 3황자는 철혈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이렇게 가벼울 리가 있나.
온몸에서 가벼움을 풀풀 날리는 이 녀석이 무려 세 개의 왕국을 동시에 복속시킨 전투광이라는 게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다.
3황자는 일단 절대 아니고.
남은 건 4황자 정도인데…….
그 녀석은 더욱 말이 안 된다.
우리가 알기로 4황자는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십 대에 재상 자리를 차지한 인재 중에 인재라고 들었다.
머리가 미친 듯이 좋은.
그런 녀석이 고작 도발 조금 했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삿대질을 한다고?
어림도 없지.
일단 이 녀석은 무시하며 고개를 돌려 황제의 좌우로 앉아있는 황자와 황녀들을 한 번 쓱 눈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주호> 형, 아무래도 이곳에는 주요 인물들이 없는 듯 해요.
<불멸> 아아, 확실히. 어중이떠중이들만 남았네.
과거 에센시아 제국의 족보는…….
굉장하다고 할 정도로.
아주 개판이었다.
오죽하면 그 전사 형도 에센시아 제국의 족보를 외우다가 때려치웠을까.
진짜 개족보라고.
전사 형이 이 족보를 만든 녀석들을 욕하게 만든.
꼬일 대로 꼬인 족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욕이 나오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황자와 황녀 숫자가 일단 백 단위다.
그것도 정확하게 집계가 된 녀석들로.
숨겨진 녀석들까지 치면 아마 더 하지 않을까.
전사 형에게 듣기로 원래부터 이렇게 족보가 엉망은 아니었다고 하는데...
에센시아 제국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던가?
타 왕국을 흡수하거나 복속하는 과정에서.
볼모로 잡은 수많은 왕자와 공주들.
그리고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 혹은 정식으로 혼인 동맹을 한 왕국과의 사이에서 나온 자식들.
이들이 황가와 오랜 시간 섞이고 섞이다보니 지금은 족보가 어떻게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해졌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100번 황자 같은 것도 있고.
이름을 굳이 외울 필요도 없는 녀석도 허다한데.
문제는 이들이 하나하나 타국의 왕가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 눈앞에서 내게 일갈을 지르는 저 녀석도.
분명 어딘가의 왕족과 섞이면서 나온 결과물일 것이다.
아마 당장 전사 형을 이 자리에 데려와도 구분하긴 힘들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녀석을 향해 한마디 했다.
“넌 몇 번째 황자냐?”
이름을 모르는 건 당연하고.
저 녀석의 머리 위에도 황자라고만 뜨니 알 수가 있나.
그러자 녀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모르니까 물어보는 거 아냐. 나라 버리고 도망간 자식들 중에 하나를 굳이 기억해 주고 싶진 않고.”
그 순간 녀석의 인상이 확 굳어졌다.
동시에 좌우로 널려 있던 황자와 황녀들 모두 표정이 싹 사라졌다.
싸늘한 정적이 흐른달까.
순식간에 집무실에는 냉기만 흐르기 시작했다.
<주호> 으음. 초반부터 너무 긁었나요?
<불멸> 없는 말 한 것도 아니고. 그보다는 황제를 봐.
그 말에 황제에게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나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황자와 황녀가 날뛰든 말든 크게 상관이 없다는 듯.
음.
아무리 봐도 평범함과는 다른 느낌인데.
흡사 예전에 봤던 마왕들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건 왜일까.
왠지 내가 생각한 어쩔 줄 몰라 하는 황제의 예상도와는 너무 달라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데…….
그간의 수많은 경험들이 지금 상황은 굉장히 이질적이라는 걸 알려주는 듯 했다.
그때 그동안 가만히 지켜만 보던 황제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앉아라.”
아주 작게 말했지만 무뚝뚝하면서도 강렬한 힘이 실려 있는 목소리가 집무실에 퍼져 나가자 순간 등에 소름이 돋았다.
피부 바깥에서부터 찌릿찌릿하게 느껴지는 압력이랄까.
잔잔하면서도 무거운 압력이 집무실 전체를 내리 누르자 떠들썩했던 황자와 황녀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가는 게 보였다.
“컥!”
“흐읍!”
“허억!”
황자와 황녀들이 차마 숨을 못 쉬겠다는 듯 각자 목을 잡고 비틀 거리는 게 지금의 상황을 잘 알려주었다.
심지어 우리에게도 그 압력이 그대로 전달되어 나와 재중이 형을 동시에 누르기 시작했다.
<주호> 형, 이건……?
<불멸> 그래. 결계다.
마왕들이 쓰던 압박용 결계.
종류는 좀 다르긴 한데.
방금의 저 목소리로 황제가 집무실 내에 피어를 내뿜은 듯 했다.
그렇게 내게 압력이 걸려오자마자 바로 품속에 있던 르아 카르테가 반응했다.
그리고 마신의 파편인 테르타로스와 대천사의 검인 라페르나까지.
동시에 마검까지도 각자의 파장을 내어 내게 걸린 속박을 풀어내었다.
하나하나가 최강이라 불릴 수 있는 검들이 모두 힘을 내자 황제의 압박 결계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
재중이 형 역시 같은 방법으로 결계를 해소한 듯 했고.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의 등급 역시 굉장히 높으니까.
거기다 뒤에서 카샤스 대공이 약간 인상을 쓰면서 손을 휘졌자 곧 황제의 결계가 바람에 찢기며 그 힘을 잃어갔다.
단순히 손 한번 휘저었다고 사라지다니.
이 녀석도 괴물은 괴물이네.
아마 에센시아 황제와 동급이거나 혹은 그 격차가 조금 존재하는 수준일 거다.
그런 우리 모습을 지켜본 황제의 입에서는 흥미롭다는 듯 다시 한 마디 말이 나왔다.
“재밌군.”
그와 반대로 지금도 황자와 황녀들은 황제의 압박 결계를 이겨내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중이었다.
몇몇은 기절한 녀석들고 있고.
개중에 품에 가진 아이템의 힘으로 그 결계를 이겨내는 녀석들도 간혹 존재했다.
아마 각국의 왕가에서 전달한 그런 아이템이거나 혹은 황가의 아이템일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딱히 탐이 나는 수준은 아니었고.
겨우 버티는 수준의 아이템이라면 굳이 필요하진 않았다.
곧 황제가 압박 결계를 모두 흩어내자 황자와 황녀들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허억!”
“컥컥!”
“흐읍!”
그리고 그런 황자와 황녀들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에는 왠지 모르게 한심하다는 눈빛이 가득해 보였다.
마치 혀를 차는 것 같기도 하고.
손님들인 우리 앞에서 자식들이 눈에 안 찬다는 걸 대놓고 보여주는 걸 보면.
황제도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황제가 에센시아 제국을 버린 거였나...?
뭔가 중간에 하나가 쏙 빠진 듯한 기분이 든다.
정신을 못 차리고 헉헉대는 녀석들을 지켜보던 황제가 곧 한심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손님들 앉을 자리가 없구나. 나가거라.”
명백한 축객령이랄까.
대놓고 우리가 앉을 자리가 없다고 나가라고 하는 말에 황자와 황녀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부끄러운 듯한 표정의 녀석들도 있고.
억울하다는 모습을 보이는 녀석도 있었다.
“황제 폐하! 왜 우리가 저들 때문에 자리를 비워줘야 할…….”
아까 아이템빨로 겨우 버텨냈던 녀석이었던가?
아무튼 그 녀석이 소심한 반항을 하자 황제의 눈빛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 황자 녀석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그러자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부들부들 떨던 황자 녀석이 힘이 빠진 듯 그대로 기어서 바깥으로 나갔다.
동시에 다른 황자와 황녀들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후다닥 그를 따라 나갔고.
정작 명령을 한 황제는 그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나와 재중이 형, 카샤스 대공을 바라보았다.
“손님들을 너무 오래 세워두었군. 앉게나.”
황자와 황녀들은 이 자리에 애초에 없었다는 듯.
전혀 개의치 않아하는 모습이랄까.
그 모습을 본 카샤스 대공이 먼저 쇼파에 가서 풀썩 앉았다.
그것도 꽤 익숙한 몸짓으로.
“오랜만입니다. 황제 폐하.”
“카샤스 대공. 타란의 황제는 건강하신가.”
“정정합니다.”
“아쉽군.”
아쉽다라…….
남의 황제가 정정하다는 게 아쉽다로 연결되는 건가?
마치 문제가 생겼을 때 여차하면 침략이라도 하겠다는 제스처라 둘 사이에 묘한 공기가 흐르는 듯했다.
“황제 폐하께서도 정정하시군요. 후손들이 아쉽겠습니다.”
카샤스 대공도 결코 지지 않았다.
“흠. 저것들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올까.”
방금 나간 황자와 황녀가 저것들로 격하되는 순간이다.
카샤스 대공과 대화를 끝낸 뒤 곧 내게 시선을 돌린 황제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로가슈 왕국이라…… 내가 아는 왕국와는 꽤 다른 것 같다만.”
의미심장한 말.
순간 숨이 멈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에센시아 제국을 지킨 로가슈 왕국의 왕자여. 내게 뭘 바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