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0화 새로운 용사 후보 (9)
내 쪽에서 황제를 입에 담자 카샤스 대공의 표정이 바로 구겨졌다.
에센시아 제국 내에서 황제라는 존재는 카샤스 대공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에 한 명이니까.
아무리 타란 제국에서 입지가 확고한 인물이라고 해도.
상대가 다른 제국의 황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애초에 카샤스 대공이 내게 백지수표를 들이민 것도 황제를 만나기 전에 원하는 걸 가져가려고 했던 점이 컸다.
하지만 지금은 네이던 후작이 눈을 버럭 켜고 지켜보는 중이었다.
뭐 나 역시 그렇게 날로 먹으려고 하는 건 마음에 들진 않았고.
물론 카샤스 대공이 쥐어주는 보상이 크긴 할 테지만.
정작 내 쪽에선 그걸 팔 생각이 없다는 게 문제다.
<불멸> 귀찮은 건 황제에게 떠넘길 생각이냐?
<주호> 네, 괜히 제가 거부해서 녀석과 척 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요.
대공쯤 되면 그 자존심이 상상을 초월할 터.
거기다가 지금은 눈앞에 아크 드래곤의 잔해라는 물건이 있었다.
눈이 돌아가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지.
그런데 대놓고 내가 거절을 해버리면 녀석이 정말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지금이야 네이던 후작을 비롯한 황실 근위대가 버티고 있으니 얌전히 있는 편이지.
만약 우리만 덩그러니 있었다면.
아마 카샤스 대공의 태도도 지금과는 꽤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결국 녀석에게 황제라는 방패막이를 내세운 셈이었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카샤스 대공의 목소리가 저기압으로 내려갔다.
그와 함께 주변의 공기 역시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내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거냐?”
“딱히 거절이라고 하진 않았는데?”
녀석이 타란 제국의 대공이라고 무조건 쫄 이유는 없었다.
지금 이곳은 에센시아 제국의 한복판이기도 하고.
그리고 일단은 나 역시 로가슈 왕국의 왕자 신분이다.
굳이 먼저 숙이고 들어갈 필요가 없지.
거기다 가장 중요한 아크 드래곤의 소유권은 내게 있었다.
이건 오히려 내가 더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입장이지.
간단한 한 마디로 지금 녀석의 입장을 알려주었다.
“싫으면 말고. 난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이 없어서 말이야.”
“……흠.”
그냥 날로 먹을 생각이라면 지금쯤 접으라는 말이었다.
녀석이 백지수표을 줬다고 하지만 녀석에게도 분명 한도라는 건 존재할 터.
아니면 물건만 받고 배 째는 경우도 무시할 순 없었다.
타란 왕국으로 튀어버리면 답도 없지.
어쨌거나 지금은 에센시아 제국을 등에 지고 있어야 한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녀석이 내게서 시선을 돌려 네이던 후작과 황실 근위대, 주변을 포위한 수도 없이 많은 병사들, 타국의 귀족들을 쭉 둘러보더니 이내 기운을 걷어 들이기 시작했다.
“안내해라.”
카샤스 대공 입장에서도 여기서 깽판 치는 건 역시 부담이었던 모양이었다.
긴장된 눈빛으로 카샤스 대공을 쳐다보던 네이던 후작도 한시름 놓았는지 크게 한숨을 쉬어 보였다.
슬쩍 그런 네이던 후작에게 카샤스 대공은 듣지 못하게 조용히 물었다.
“저 녀석이 그렇게 강해?”
내 물음에 네이던 후작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대답해 주었다.
“카샤스 대공이 마음만 먹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의 모두가 죽었을 겁니다.”
생각보다 더 강한 모양이었네.
우리야 역사를 어느 정도 미리 보고 왔으니까 글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주치자 그 격차가 확실히 실감났다.
이건 영웅 후보의 끝자락에 걸치는 네이던 후작과 황실 근위대를 모두 합쳐도 저 카샤스 대공을 어찌하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그럼 깽판 칠 수도 있었잖아?”
그러자 네이던 후작이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보다는 왕자님 때문에 덤비지 못했을 겁니다.”
“나?”
“직접 저 아크 드래곤을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렇지.”
확실히 카샤스 대공은 우리가 어떻게 아크 드래곤을 잡았는지 모를 것이다.
뒤늦게 에센시아 제국에 도착한 모양이니까.
나중에야 알 순 있겠지만.
지금 당장에 녀석이 보기에는 우리가 아크 드래곤을 누를 만큼 강하게 여겨질 것이다.
자신도 하기 힘든 걸 해냈으니 카샤스 대공 입장에서도 우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셈이었다.
<주호> 그래서 처음에 오자마자 나와 형부터 살폈나 봐요.
<불멸> 우리 전력을 알고 싶었을 테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의외로 약해 보여서 녀석이 당황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마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으려나?
오히려 약해 보이는 모습이 녀석의 경계를 더 샀을 수도 있었다.
뭐 덕분에 서로 불편한 눈치를 보는 중이랄까.
슬쩍 전사 형을 보면서 물었다.
<주호> 전사 형, 아크 드래곤 잔해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방패전사> 일단 부위 파괴가 되는 부분은 전부 뽑아내는 중이다. 나머지는 모르겠네. 사라질지 그대로 남을지.
<주호> 흠. 카샤스 대공의 반응을 보면 남아 있을 확률이 높아 보여요.
카샤스 대공은 남는다는 걸 확신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으니까.
네이던 후작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고.
<주호> 돌아올 때까지 지킬 수 있을까요?
<방패전사> 저 녀석만 데리고 가주면 문제없을 것 같은데?
그러면서 전사 형이 카샤스 대공을 눈짓을 가리켰다.
<주호> 네,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어요.
녀석을 여기 두고 가는 건 아무래도 문제가 많으니까.
안 그래도 아크 드래곤의 잔해에 눈이 뒤집혀져 있는데 말이지.
<방패전사> 부위 파괴 끝나고 남은 부분이 처리가 안 되면 팔아 버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주호> 그건 일단 생각해 볼게요.
어차피 우리가 드랍템 형식으로 가질 수 없는 물건이라면.
그게 NPC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물건일 때는 충분히 생각해볼만했다.
다만 지금은 아크 드래곤 제작에 필요한지 아닌지가 문제다.
카샤스 대공이 하려는 방식과 우리가 하려는 방식은 큰 차이가 있기도 하고.
곧 네이던 후작에게 물었다.
“나와 불멸 공작이 자리를 비우면 이곳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내 물음에 네이던 후작이 준비 된 듯 빠르게 대답했다.
“제국의 근위대와 병사들이 철저하게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거려나?”
“네?”
“아냐. 어차피 그런 식으로 끝나면 저 녀석이 가만히 있진 않을 거니까.”
그러면서 카샤스 대공을 가리키자 네이던 후작의 표정이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눈 빨갛게 지켜보고 있는데 아크 드래곤을 빼돌리기라도 하면 나 이전에 저 녀석이 먼저 뒤집어버릴 지도 모르겠다.
“설마 몰래 빼돌리려고 한 거야?”
“아닙니다. 제국은 그런 치졸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 놈들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도망은 갔지.
그 말은 굳이 하진 않고 입 안에 남겨두었다.
“우리 쪽 사람들 남겨놓고 갈 테니까 쓸데없는 시도는 하지 않았으면 해. 도둑질 당할 바엔 아예 없애 버리는 것도 방법이고.”
여차하면 아크 드래곤의 잔해를 날려 버리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네이던 후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이름을 걸고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좋아.”
우리라고 안전장치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슬쩍 챠밍을 보자 챠밍이 알았다는 듯 눈빛을 보였다.
<주호> 여차하면 알지? 부탁할게.
<챠밍> 잠시라면 충분해요. 안심하고 갔다 와요.
그러더니 챠밍이 뭔가를 가지고 내게 다가왔다.
<챠밍> 아, 그리고 이건 오빠가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주호> 이건?
<챠밍> 아크 드래곤의 심장이에요.
『 불완전한 키메라 아크 드래곤 하트 』
- 정체를 알 수 없는 정령의 기운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정령의 기운?
그걸 보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아크 드래곤의 하트에 정령의 기운이 있다는 걸까.
그것도 하나가 아닌 복수를 뜻하는 부가설명이었다.
<주호> 우리 꽤 이상한 일에 끼어든 것 같은데?
<챠밍> 역시 그렇죠?
그리고는 챠밍이 다시 아크 드래곤으로 돌아갔다.
드랍 템 목록에 없어서 왜 없나 했더니.
부위 파괴로 얻을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는 키메라 아크 드래곤을 마왕군 쪽에서 제작했을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는데.
이걸 보자마자 생각이 완전히 틀어졌다.
아니지.
마왕군 쪽에서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조금 다른 가능성이 생겼달까.
이건 조만간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재중이 형에게도 보여 줬더니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불멸> 판이 처음부터 잘못된 거였나?
<주호> 아마도요?
그사이 네이던 후작은 준비가 끝났는지 나와 재중이 형을 호위하듯 병사들을 붙여주었다.
비에른 자작이 과하다는 듯 막으려고 했지만 딱히 먹히진 않았다.
“꼭 끌려가는 것 같잖아?”
“아닙니다. 왕자님의 안전을 위해서…….”
“뭐 좋아. 가 보자고.”
뒤를 보니 카샤스 대공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지못해 따라 왔고 그 뒤로는 타국의 귀족들 역시 각자 우리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길에서 황폐해진 제국의 모습이 눈에 그대로 들어왔다.
복구하려면 시간 꽤나 걸리겠는데?
아크 드래곤이 뒤집고 간 흔적은 쉽사리 복구가 힘들어 보였다.
저런 녀석 하나가 나왔을 뿐인데 이 모양이라니.
내가 알기로.
이 과거 세계에는 아크 드래곤 같은 녀석이 다수 존재했다.
그게 마왕군이든.
천계의 존재든.
양쪽 다 괴물 같은 녀석들이 있다는 거지.
겨우 하나 튀어나왔다고 이런 상태라면 앞으로는 굳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힘들게 지켜낸 제국성 주변으로 꽤 많은 비공정들이 착륙해서 대기 중이었다.
“도망갔던 녀석들이 이제 다 돌아왔나 봐?”
내 말에 네이던 후작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아니라고 해도 부끄러운 건 아는가보네.
“들어가지.”
전에는 밖에서 구경만 했던 제국성에 발을 들여놓자 도처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다들 눈치만 보면서 다가오지 못하는 딱 그런 느낌이랄까.
이것 참.
어디 동물원에 구경나온 느낌이네.
그런데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일어났다.
“우와아!! 영웅이 오셨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새 영웅을 위하여!”
“주호 왕자님 만세!”
어느 한 명이 시작한 외침은 곧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의 입을 타고 넘어가면서 제국성이 떠나갈 듯 환호를 보내왔다.
“하하…….”
설마 이런 식으로 환영할지는 몰랐는데.
놀랍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자 비에른 자작이 말해 주었다.
“제국성에 남아서 끝까지 항쟁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요?”
“네, 그리고 그들 모두의 목숨을 주호 왕자님께서 구해주신 겁니다.”
왠지 뿌듯한 듯 목소리 높여 말하는 비에른 자작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쁘지 않네요.”
제국성의 복도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으며 계속 걸어가자 곧 그들의 소리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곳부터는 일반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기에.
멀어지는 환호를 즐기며 곧 내성으로 진압하자 네이던 후작이 앞장섰다.
중간에 지키고 있던 가드들을 전부 물리면서.
그 덕분에 아무런 제지 없이 편히 제국성의 중심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대전의 거대한 문 앞에서 가드들에게 알리자 안쪽으로 크게 호명했다.
“로가슈 왕국 주호 왕자님 드십니다!”
“타란 제국 카샤스 대공님 드십니다!”
<불멸> 호오. 대공보다 먼저 부른다고?
<주호> 무슨 문제라도.
<불멸> 보통은 위치가 높은 쪽을 먼저 부르거든. 가드들이 실수한 게 아니라면.
슬쩍 가드들을 보자 딱히 실수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당한 듯 우리를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지.
<주호> 재밌네요.
과연 저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대전으로 들어서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많은 귀족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고개가 돌아갔다.
그들 모두 궁금함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딱히 그들에게 눈길을 주진 않았다.
뭐 저것들은 딱히 관심 없고.
귀족 1번, 2번 같은 녀석들에게 관심 줄 시간 따윈 없었다.
그보다는 시선을 돌려 가장 궁금했던 사람부터 찾았다.
내가 계속 두리번거리자 네이던 후작이 옆에 붙어서 물어보았다.
“누구 찾으시는 분이라도…….”
“어, 황제 대리 있잖아. 너네가 버리고 간 황녀.”
“아…… 그것이…… 지금 여기에는 없습니다만.”
순간 당황하는 네이던 후작을 보고는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없어?”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재중이 형과 눈을 마주치자 재중이 형 역시 인상을 썼다.
<불멸> 꼬였네.
<주호> 그러게요.
반드시 여기 있어야 하는 사람이 없다라…….
대충 돌아가는 상황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설마하니 이 정도로 개판일 줄은 몰랐는데.
곧 목소리를 굳게 내리 깔면서 네이던 후작에게 명령했다.
“이 시덥잖은 환영 연회 따윈 됐고. 안내해라. 황녀가 있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