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5화 새로운 용사 후보 (4)
에센시아 제국을 침범했던 아크 드래곤이 죽으면.
당연하겠지만 에센시아 제국을 등지고 떠났던 녀석들이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멸망 직전의 나라는 돌아올 이유가 없어도.
이미 구해낸 나라는 이야기가 다르니까.
그 나라를 구해낸 게 자신들이 아닐 뿐.
뭐 어쨌거나 이 에센시아 제국의 주인은 그들이다.
에센시아 황제를 포함한 황자와 황녀들.
나라가 망하든 살아나든.
결국 주인은 정해져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런 그들이 에센시아 제국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뭘까.
국정의 재정비?
나라를 잃을 뻔했던 국민들을 살피는 것?
아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할 만한 일은…….
바로 죽은 아크 드래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다른 생각이 있어서겠지만.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비에른 자작이 저런 부끄러운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를 향해 마치 과시라도 하듯 진영을 갖추고 접근해 오는 저 수많은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는 비에른 자작이 바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 선에서 막아보려고 했습니다만…….”
“아니야. 어차피 막고 싶어도 못 막잖아.”
뼈가 있는 한마디.
우리와 함께 에센시아 제국을 살려내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고 같이 사선을 넘었다고 한들.
어쨌거나 비에른 자작은 에센시아 제국의 귀족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저 군대는 바로 에센시아 황실의 군대.
비에른 자작은 저들을 상대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황제가 직접 움직이는 병사를 막아서는 순간.
비에른 자작은 바로 반역으로 몰리게 된다.
우리야 당장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비에른 자작에게 반역을 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미 이전에 비에른 자작에게 당부해 두었다.
누가 오더라도 굳이 막지는 말라고.
아크 드래곤을 잡을 당시에는 비에른 자작이 모든 전시 작전권을 들고 있었으니까 막으려면 막을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로 접근하려는 타국의 귀족들의 목을 날려버린 전례도 있었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종료된 후다.
전후처리를 위해서라고 변명 정도는 될지 몰라도.
이제부터는 전처럼 바리게이트를 치고 다가오는 모든 이들을 막는 건 무리였다.
그 결과가 지금 저것이다.
에센시아 황실의 군대.
그리고 그들을 뒤따라 피난 갔던 타국의 귀족들의 행차.
비에른 자작을 보면서 물었다.
“타 왕국의 귀족들의 시체는?”
바로 내 말귀를 알아들은 비에른 자작이 아주 당당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이번 폭발로 전부 날아갔습니다. 흔적도 없이.”
“좋아.”
당장 타이탄의 자폭 반경을 피하기 위해 도망가기도 바쁜 판국에 굳이 자기 손으로 죽여 버린 타국의 귀족들의 시체를 챙긴다?
쓸데없는 일이기도 한데.
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일이기도 했다.
당연히 비에른 자작은 그들의 시체를 전부 방치해 버렸고.
타이탄의 자폭으로 인해 시체 조각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젠 누군가 그들의 죽음을 따지려고 해도.
따질 건수조차 없다는 거지.
어떻게 보면.
힘들게 뒤처리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비에른 자작에게는 더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폭발과 함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이제 비에른 자작만 입을 다물면.
그들의 존재는 아예 없던 것이 된다.
혹여 누군가 그들을 찾아 나선다고 해도.
우리가 죽였든.
폭발에 휩쓸려 죽었든 알게 뭔가.
전과 후가 상황이 많이 다르긴 해도.
어쨌든 흔적만 없으면 되는 일이라.
“앞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일은?”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아크 드래곤을 잡는 과정에서 나올 만한 잡음이 더 있으냐는 것이었다.
우리가 아크 드래곤을 잡기 위해 한 일들이.
결코 평범하진 않았으니까.
따지려고 들면 얼마든지 파고들 여지가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비에른 자작인 전혀 문제없다는 듯 또렷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꽤 많은 자원을 가져다 썼는데도? 우리 쪽이나 다른 귀족들이 반발하지 않겠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만. 굳이 문제 삼고자 하면…… 어떤 식으로든 발을 걸고넘어질 겁니다.”
“과정과 결과가 어찌되었든 따지려면 한도 끝도 없이 따지겠다는 걸로 들리네.”
“원래 그런 놈들입니다.”
“무시해도 괜찮겠어?”
“네. 귀족들은 입만 나불댈 뿐.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할 겁니다. 다만…….”
“그럼 황족이 문제다?”
그 한마디에 비에른 자작의 입이 다시 다물어졌다.
역시 황족은 어찌할 수 없나 보네.
“뭐 그쪽은 우리 황녀님이 잘 막아 주시겠지.”
황녀가 죽으면 안 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같은 황족들을 막아서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비에른 자작만으로는 그 한계가 명확하니까.
그런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점점 황실의 군대가 우리에게 접근해오더니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전열을 멈추어 세웠다.
마치 우리를 포위라도 하듯 넓게 진영을 퍼트리며.
“쟤들은 네 부하들 아니지?”
잠시이긴 했지만 비에른 자작은 에센시아 제국의 모든 군사를 운용할 수 있는 권한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저들은 아닌 듯했다.
“아쉽게도 그렇습니다.”
“황제랑 같이 비공정을 타고 에센시아 제국에서 튀었던 녀석들이겠네.”
어떻게 보면 방주에 올라탄 선택받은 자원이라는 뜻일 테고.
남아서 죽음을 기다리던 다른 병사들과 달리.
그만큼 황제가 고르고 고른 정예병이라는 소리다.
시간이 없어 부위 파괴를 도와주던 나르샤 누나가 상황이 이상해지자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한마디 했다.
“뻔뻔하기도 하지. 완전 얼굴에 철판 깐 녀석들이잖아.”
“네, 원래 그런 놈들이라네요.”
“그래서 지금 저렇게 대놓고 포위하고 시위하는 건…….”
뒤쪽을 보면서 나르샤 누나가 말을 이었다.
“역시 이것 때문이겠지?”
아크 드래곤의 잔해.
그리고 타이탄까지.
죽지 전이었다면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 했을 것들이 지금은 눈앞에 있는 보물들에 눈이 돌아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이렇게 멀쩡한 아크 드래곤의 시체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 테니까요. 그보다는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부위 파괴 끝내려면요.”
“으음. 죽어 있어서 쉽게 떼어 내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좀 걸리겠지? 숫자라도 많으면 모르겠지만.”
당장 작업이 가능한 건 우리 팀 정도가 전부였다.
근력이 약한 챠밍과 막내별까지 달려들어서 도울 정도면 뭐…….
나르샤 누나가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
“비에른 자작의 병사들은? 못 도와준데?”
“음. 아무래도 어렵겠죠.”
슬쩍 비에른 자작을 보자 역시 힘들다는 듯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럼 시간이 한참 필요할 거야. 최소 한 시간은…….”
“죽음의 빛으로 시체가 사라지지 않을까요?”
“그건 모르겠어. 이상하게 사라지진 않네. 부위 파괴 템이 남아서 그런가? 나중에라면 몰라도 당장 사라질 것 같진 않아.”
“여긴 시스템이 다를 수도 있겠죠. 과거에서만 쓰는 시스템이거나. 아니면 저 아크 드래곤이 특별할 수도 있겠고요.”
그리고 그것에 대해 짐작 가는 것이 하나 있긴 했다.
아크 드래곤을 잡고 나온 드랍템 중 하나.
키메라 드래곤의 제작서가 괜히 나온 게 아닐 터다.
아직 자세히 열람을 해보지 않아서 확신할 순 없지만.
저 부위 파괴들이 사라지지 않는 걸 보면.
아마 어떻게든 쓰이게 될 터.
결국 아크 드래곤의 잔해는.
우리가 어떻게든 다 회수해야 한다.
“그럼 난 다시 도와주러 갈게. 당장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라.”
“네, 수고해 주세요. 전 아무래도 저 녀석들을 상대해야 할 것 같아요.”
“응, 왕자님. 그럼 고생해.”
그런 말을 남기고는 바로 아크 드래곤의 잔해로 돌아갔다.
일단은 겉으로 봐선 내가 왕족이니까.
그들을 상대하려면 내 쪽이 격이 있었다.
완전히 포위망을 형성한 황실의 군대에서 한 인영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비에른 자작, 저 녀석은……?”
“음, 황실 근위대장입니다. 모든 황실의 군대를 총괄해서 지휘하고 있습니다. 직위는 후작입니다.”
그 모습에 옆에서 지켜보던 재중이 형이 피식 웃어 버렸다.
“이거 참. 그래도 꼴에 황족이라고 쪽팔리는 건 아나 보네.”
아니나 다를까.
재중이 형 말대로 주변을 둘러봐도 황족이라고 할 만한 녀석들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의 인상착의 정도는 이미 역사를 통해 알고 있었으니까.
이 자리에 한 녀석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이어지는 재중이 형의 말에 나 역시 웃어버렸다.
“직접 삥 뜯기에는 얼굴이 팔린다 이거지.”
“하, 정말 그런가 봐요.”
솔직히 황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아래의 황자나 황녀 정도는 올 줄 알았는데.
그들조차 이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비에른 자작은 이 상황이 부끄러운지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곧 황실 근위대장이라는 녀석이 우리에게 다가와 나와 재중이 형, 그리고 비에른 자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것도 엄청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거기다 이 대치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불만이 가득한 표정 역시 섞여 있었다.
한참을 우리를 살펴보던 중.
비에른 자작과는 그나마 안면이 있는지 전혀 모르는 나와 재중이 형을 제쳐두고 비에른 자작에게 하명하듯이 말했다.
“비에른 자작. 외성 방어 대장이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건가. 외성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면 목숨으로…….”
보자마자 대놓고 질책하듯이 비에른 자작을 쏘아붙이자 비에른 자작 역시 기분이 상하는지 얼굴을 확 찌푸렸다.
이해가 안 될 수가 없는 게.
한쪽은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녀석이고.
반대로 한쪽은 끝까지 남아서 나라는 지킨 영웅이다.
그런데 지금은.
지위가 높다는 이유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핍박하는 중이라…….
“개판이네요.”
“그러게. 개판이네.”
나라를 버리고 도망갈 때도 느꼈지만.
이놈의 에센시아 제국은.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준다.
“어이, 잠깐. 거기 너.”
내가 부르자 황실 근위대장이 비에른 자작을 상대하던 것을 멈추고 짜증난다는 듯 내 쪽을 바라보더니 위아래로 날 훑고는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넌 뭐냐? 옷을 보니 어디 왕국의 귀족 나부랭이 같은데. 어디서 감히 대 에센시아 제국 후작의 말을 막아서는…….”
“아, 됐고. 그래. 네가 제국의 후작이라면서?”
내가 바로 반말을 해버리자 녀석도 상황이 이상한지 잠시 멈칫했다.
분명 에센시아 제국의 후작이라는 걸 밝혔는데도 내 쪽에서 전혀 굽힐 생각이 없었으니까.
아무리 머리가 돌로 되어 있다고 해도.
이쯤 되면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던가.
혹은 자신보다 직위가 높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황실 근위대장이 잠시 인상을 쓰고는 비에른 자작에게 물었다.
“이쪽은?”
그제야 비에른 자작이 화를 억지로 누르면서 대답해주었다.
“후작님. 이분은 로가슈 왕국의 왕자님이십니다.”
“왕자라고? 로가슈 왕국? 그건 어디 붙어 있는…….”
아마 후작쯤 됐으면 어지간한 왕국과 왕족들은 다 머릿속에 구겨놓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녀석도 로가슈 왕국은 생소한지 저런 태도를 보여왔다.
제국의 근위대장인 자신이 모를 정도면.
존재하지 않거나.
아주 한미한 왕국일 테니.
그런 근위대장에게 비에른 자작이 경멸의 눈빛을 잠시 보였다가 다시 애써 표정을 감추며 말했다.
“그 태도를 바꾸셔야 할 겁니다.”
“뭐? 감히 누가 내게 그딴 소리를 할 수…….”
그러자 비에른 자작이 엄중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이분은 타이탄의 주인이십니다.”
“자네…… 방금 타이탄이라고 했나?”
타이탄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는 황실 근위대장의 모습.
아마 로가슈 왕국은 몰라도 타이탄은 잘 아는 듯했다.
뭐 타이탄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해 보이기는 하지.
그게 고대 정령 병기라는 것까지 아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리고 후작님이 버린. 이 제국을…….”
제국을 버렸다는 말을 들을 때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황실 근위대장도 이어지는 말에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지켜내지 못한 제국을 구해주신 유일한 왕자님이십니다. 저 아크 드래곤을 잡아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