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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046화 (1,034/1,404)

#1046화 에센시아 방어전 (12)

현재 에센시아 황실은 공백이나 마찬가지였다.

아크 드래곤을 상대로 한 방어전의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황제가 냅다 튀어버렸으니.

당연히 중앙성 내부가 어수선한 걸 넘어 혼란 상태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에센시아 제국의 귀족들에게 도움을 받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상태.

그 증거로 비에른 자작이 황실의 도움을 받기 위해 직접 연락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대답은 싸늘하기만 했다.

저들 생각에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르는 왕국의 왕자라는 명패는 이 상황에서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았다.

비에른 자작 역시도 마찬가지고.

솔직한 마음으로 그냥 에센시아 제국이 한 번 망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준비한 걸 꺼내들기도 전에 망해버릴 나라라면.

그리고 황제가 먼저 짐을 싸서 도망가 버리는 걸 보면.

딱히 희망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 상황에 자신이 황녀라고 소개하고는 내게 먼저 연락을 취해 온 이가 있었다.

순간 고민했다.

이거…….

잡아야 하는 패인가?

지금 에센시아 황실 내부에는 황제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 한참 서로 지휘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들 황제처럼 도망을 갔거나.

아마 뒤늦게 황제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대부분 황제를 따라 도망갔을 확률이 높았다.

특히 타국의 왕족들은 가장 먼저 발을 뺐을 테고.

어차피 그들에겐 황제도 없는 에센시아 제국을 대신 지켜줘야 할 이유가 1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작 주인도 지킬 의지도 없는 나라를 객들이 굳이 목숨 바쳐가면서 지켜줄 이유가 있을까?

이건 절대 아니지.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황제의 제국 황실 비공정이 뒷문을 통해 도망가는 것을 목격한 순간.

제국 상공에서 아크 드래곤에게 한참 주포를 퍼붓던 왕국의 비공정들이 바로 머리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저들 역시 우리처럼 통신구를 통해 제국 내의 상황을 전달 받았으리라.

혹 황제가 동맹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로 이탈하라고 지시했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같이 빠지기로 약속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일단 에센시아 제국은 버린다.

그리고 영웅들이 복귀했을 때 다시 노려보는 것도 한 방법일 테니까.

예상하기로 후에 다른 왕국과의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해 보면.

그들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후일을 기약하려면 왕국의 도움은 필수적일 테니까.

그런데 여기서 약간 걸리는 사실이 존재했다.

과연 황제가 에센시아 제국성을 뜨는 걸 다른 황자나 황녀가 몰랐을까?

다른 왕국의 왕족들에게도 미리 알려주었는데.

앞으로 제국의 기둥이 될 황자나 황녀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건…….

아무래도 좀 무리가 있어 보였다.

만약 황제가 건장하다 치고.

나중에 황자와 황녀들을 다시 낳는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제국의 전력이 뒤로 후퇴하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현재 황자와 황녀들은 영웅 후보에 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존재들이다.

서로 간에 편차야 있겠지만.

그럼에도 함부로 쓰고 버릴 정도의 패는 아니라는 거지.

어쩌면 황자들과 황녀들도 미리 알았을 수도 있으려나?

그런 점들을 생각해 보면.

아직까지 이 황녀라는 여자가 제국 중앙성에 남아 내게 연락을 한다는 건 꽤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재중이 형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저 황녀?”

그렇게 잠시 생각하던 재중이 형이 이내 결론을 내린 듯 대답을 내놓았다.

그것도 내가 생각했던 것과 아주 유사한 답을.

아니.

거의 정답이라고 봐야 할지도.

“흐음…… 아마도 이 황녀는 버리는 패이려나?”

“역시 그렇죠?”

“어, 이미 상위 황자와 황녀들은 다 발을 뺐을 거다.”

그러면서 재중이 형이 손가락을 들어 제국성 뒤쪽을 가리키자 몇 개의 비공정이 더 떠오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재중이 형이 비웃는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황제만 발이 빠른 게 아니잖아?”

“정말 그렇네요.”

에센시아 제국은 거대한 나라다.

그런 제국에 비공정이 단순히 한두 대만 있을 리는 없을 테고.

황자나 황녀들의 개인 비공정 정도는 얼마든지 운영이 가능할 터.

꽤 커다란 비공정들에 황실 깃발이 달려 있는 걸 보면.

이런 생각은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재중이 형에게 말했다.

“꽤 골치 아픈 일을 떠맡은 것 같네요.”

일단 자신이 황녀가 아닌데 황녀라고 가짜로 말할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 할 이유도 없었고.

타국의 누군지도 모를 왕자에게 황녀라고 말해 봐야 별로 의미가 없기도 하니까.

뭐 위험 상황에서 어떤 지원을 바라고 한 일이라면.

꽤 칭찬해줄 만한 일이지만.

당장 제국도 못 막는 판에.

일개 왕국에서 추가로 끼어든다고 딱히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나빴다.

그렇다는 건.

역시나 본인이 진짜 황녀라는 건데.

다른 이들이 모두 내빼는 와중에도 남아 있는 황녀라…….

처음에 재중이 형이 말했듯이.

버려진 패라는 그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재중이 형이 이어서 말을 꺼냈다.

“황자와 황녀가 죄다 튀어버리면 남아 있는 병력들을 통솔할 수 있는 이들이 없으니까.”

“버려도 되는 황자나 황녀를…… 억지로 남겨둔 건가요?”

“높은 확률로?”

그리고는 재중이 형이 뭔가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마 모계 쪽의 출신이 안 좋거나 혹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집안이겠지. 그것도 아니면 아예 없거나.”

“황자나 황녀들 사이에도 급수가 있다는 거네요.”

“어, 빨리 태어나고 늦게 태어나고는 그다지 의미가 없어. 뭐 제일 먼저 태어난 녀석은 좀 다르긴 하겠지만. 그것도 뒤를 바쳐 줄 세력이 있어야 써먹지. 아니면 목이 댕겅 날아갈걸?”

“으음.”

“그래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황자나 황녀를 남겨놨을 거야. 아무것도 아닌 애들 백 명 남겨놔 봐야 의미가 없을 테니.”

한마디로 지금 저 황궁에 남아 있는 황자나 황녀들은.

겉으로는 인지도가 상당히 있지만.

정치적으론 버려도 상관없는 패라는 말이다.

후에 뒤가 전혀 불편하지 않은.

없어져도 되는 패.

그리고 지금 그런 패 중에 한 황녀가 우리에게 연락을 넣어왔다.

황실의 주축은 다 빠져나간.

껍데기뿐인 황실에 남아서.

그런데 딱히 이 상황이 나쁘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형, 그렇다는 건 지금 우리에게 연락을 넣은 황녀가 지금 저 황실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어, 아마도? 급하게 대책을 찾고 있는 걸 보면 틀리진 않을 거야.”

황녀 본인도 살기 위해 발악을 하는 중이라는 건가.

이건 분명히 나쁘지 않다.

이전과는 다르게.

황실과 직통으로 연락이 되는 셈이니까.

게다가 저 황녀는.

우리의 말을 들어줄 마음의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당장 해달라는 건 다 해줄 기세라.

“그럼, 우리도 한번 딜을 해보죠.”

아무래도 저 황녀는 주변의 다른 부하들을 그다지 신용하진 않는 것 같으니까.

어쩌면 귀족들은 죄다 튀었을지도 모르겠다.

목숨 바쳐 버티는 여기 이 비에른 자작 같은 녀석들도 있긴 하겠지만.

그런 충성스런 귀족 수가 많았다면.

예전 역사에서 에센시아 제국이 그렇게 허망하게 망하진 않았을 테니.

뭐 그렇게 충성이 있는 녀석들이 있다고 한들.

지금 상황에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크 드래곤을 상대로는.

그러니까.

저 황녀가 우리에게 연락을 넣은 거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이 황녀의 당찬 태도가 꽤 마음에 들거든.

그사이 아크 드래곤의 브레스가 추가로 개방되면서 또다시 제국성으로 브레스가 뿜어졌다.

쿠아아아!!

총 십여 발의 브레스가 동시에 제국성을 강타하자 제국성을 감싸고 있던 방어 마법 배리어에 슬슬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마법진의 문양이 흐려지거나 흔들리고 또 깨져나가며 균열이 일어났다.

공급되는 마력도 불안정한지 계속 마법진에 빛이 꺼지려고 하고 있었고.

비에른 자작이 말한 게…….

분명 스무 발 이상은 버틸 수가 없다고 했지.

다른 말로.

한 번만 더 추가 공격이 쏟아지면 저 배리어는 박살 난다.

그렇다는 건.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거다.

제국성을 살릴 수 있는.

급히 통신구를 들어서 황녀에게 연결했다.

“시간 없으니까 짧게 말하죠. 현재 통솔 가능한 비공정들이 몇 대 입니까?”

그러자 바로 황녀에게서 답변이 돌아왔다.

그것도 이를 바득 가는 목소리로.

“왕국의 비공정들은 다 빠져나갔고, 황실 비공정들도 세 대가 빠져나갔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쓸 수 있는 건 현재 두 대밖에 없어요.”

두 대라…….

뭐 괜찮다.

솔직히 주축이 다 빠져버린 황실이라 한 대도 운용 못 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황실 비공정에 정신 똑바로 박힌 비에른 자작 같은 녀석들이 타고 있었나 보다.

“화력이 부족하지는 않겠네요. 남은 게 한 대뿐이면 어쩌나 했는데.”

보아하니 지금 이 마법 배리어를 유지하고 있는 건 저 황녀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비에른 자작이 황족만이 이 황성의 마법 배리어를 쓸 수 있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누구 하나 남아야 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남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죠?”

“비에른 자작이 좌표를 알려줄 테니. 그대로 비공정의 주포를 집중시켜요. 실수하면 안 됩니다.”

“알았어요.”

“행운을 빕니다.”

혹시나 저 아크 드래곤을 무력화시키기에는 화력이 부족할 수도 있으니까.

단순히 은신과 더미 마법 외에도 방어 마법 역시 두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 방어를 깨고 들어가려면.

최대한 정확한 지점에 타격을 해야 한다.

곧장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에른 자작에게 말했다.

“지금 가리키는 방향과 거리, 정확하게 맞출 수 있겠어?”

그러자 비에른 자작이 확실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만 십수 년 했습니다.”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성벽 방어에 관련해서는 최강의 영웅이 될 비에른 자작이 하는 말이다.

비공정과 성벽의 주포를 다루는 건.

그야말로 최상급의 능력을 보여줄 터.

“한번 해봐. 거리는……!”

그리고는 내가 느끼는 딱 그 지점을 향해 거리를 재고는 주변의 환경을 보며 계속 비에른 자작과 거리를 맞춰 보았다.

얼마 뒤 비에른 자작이 알겠다는 듯 말했다.

“정확한 위치 측정했습니다. 그럼 비공정에 좌표 전송하겠습니다.”

“좋아.”

만약 감만으로 말했다면 절대 비공정에서는 정확한 좌표를 맞출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직접 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니까.

그리고 얼마 뒤.

남아 있는 황실 비공정 두 개에서 모든 주포가 정면으로 집중되어 돌아갔다.

그리고는 그 주포들에서 일제히 강렬한 파장이 터져나왔다.

콰아아아!

파아아아!!

모든 힘을 다한 주포들이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불을 뿜었는데.

그렇게 날아가던 주포들이 중간에서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콰아앙!

쿠아앙!

그리고 그 속에서 아크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내며 울부짖었다.

“키아아아악!!”

동시에 브레스 마법진도 모두 해제가 되었고.

좋았어.

이제부터 제대로 된 반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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