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5화 에센시아 방어전 (11)
“저 허공에 말입니까?”
비에른 자작의 얼떨떨한 표정에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왜?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싶은 생각에 비에른 자작을 빤히 바라보자 비에른 자작이 한숨을 쉬면서 말을 꺼냈다.
“저야 상관없지만…… 에센시아 제국과 다른 왕국의 지휘관들은 제 말을 듣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비에른 자작 역시도 그다지 믿는 눈치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하긴.
내가 들어도 어이없는 말일 것이다.
당장 주포를 전부 저 아크 드래곤의 더미에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에.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주포를 집중하라니.
다른 귀족들이 보기에는 거의 역적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비에른 자작을 포박해 감옥에 넣지 않으면 다행이려나?
“왜 제국을 살려 달라며?”
“그건 그런데…….”
“그럼 그 뒤는 알아서 해야 하는 것 아냐? 내가 숟가락까지 들이밀고 입에 넣어 줘야 해?”
비에른 자작이 여기서 내 생각대로 행동을 하지 못하면.
사실 별 의미도 없는 방법이었다.
현재 엔진이 고장 나 제대로 날지 못하는 비공정이 대다수다.
그런 비공정으로는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지.
게다가 우리가 가진 비공정들은 따로 할 일이 있으니까.
여기서 소비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내 꾸짖는 말투에 비에른 자작이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곧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확실합니까? 저곳으로 주포를 집중하면…….”
그러자 재중이 형이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어디 속고만 살았어?”
“……음.”
“어차피 저대로 놔둬봐야 곧 중앙성은 박살 나. 모르진 않겠지?”
재중이 형의 말에 비에른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니까.
아직 남은 게 대략 팔십여 발인가?
그중 절반만 떨어져도 먼지조차 남아 있지 않을 터.
지금 저 상황 그대로 흘러가면 남은 브레스가 활성화되면서 제국 중앙성은 그야말로 지도상에서 사라져버릴 것이다.
곧 입술을 깨문 비에른 자작이 내게 말했다.
“왕자님. 어떻게든 설득해 보겠습니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오늘 제국의 지도가 바뀌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그건 아마 숟가락으로 푹 파낸 것처럼 중앙이 사라진 지도겠지.
그러자 비에른 자작이 품에서 통신구 같은 것을 꺼내들고 급하게 어디론가 연락을 넣는 것이 보였다.
여기선 저게 일종의 스마트폰 같은 거려나?
연락하는 곳은 저 하늘에 떠있는 다른 비공정들일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씨름하던 비에른 자작이 이내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통신구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 새끼들이 진짜……!”
본인이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걸 봐서는…….
아마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은 듯했다.
그 모습을 본 재중이 형이 내게 슬쩍 말했다.
“협상 결렬 같은데?”
“네, 그렇게 보이네요.”
재중이 형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다른 방법은?”
“애석하게도 없죠.”
나도 플랜 B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솔직히 아크 드래곤이 한 번에 브레스를 백여 발이나 준비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현재 그런 상식 밖의 전력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저 아크 드래곤의 하이딩으로 숨어있는 곳을 노리는 것뿐인데.
정작 그게 가능한 녀석들은.
지금도 신나게 아크 드래곤이 만들어 둔 더미만 주구장창 치고 있었다.
재중이 형도 제국 귀족들의 반응에 혀를 내둘렀다.
“제국이 왜 망했는지 알겠군.”
“제 말이요.”
방법을 알려주는데도 불구하고 이 모양이니.
비에른 자작을 보면서 물었다.
“제국 중앙성이 저대로 터지면 어떻게 돼? 그래도 에센시아 제국의 중심지잖아.”
이 상태면 아주 높은 확률로 제국이 멸망 직전까지 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를 생각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던 비에른 자작이 무겁게 말을 꺼내들었다.
“이미 황제는 따로 빠져나갔을 겁니다.”
“벌써?”
내가 딱히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아니긴 한데.
이건 꽤 놀랍네.
나뿐만 아니라 챠밍과 이쁜소녀를 비롯한 모두가 놀란 눈빛으로 비에른 자작을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전쟁 중이다.
그런데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황제가 도망간다?
전사 형도 이건 아니라는 듯 말을 내뱉었다.
“이거 참 너무하네. 황제가 보통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황제가 죽으면…… 제국이 끝나니까요. 황제가 살아있으면 돌아온 영웅들과 함께 제국을 재건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비에른 자작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닌 것이.
황제가 있으면 어떻게든 제국이 유지는 될 것이다.
이 당시 시대상은 혈통을 중요시 하니까.
하지만 그 말에 전사 형이 어림도 없다는 듯 비꼬면서 말했다.
“어차피 황제가 도망간 순간에 제국은 이미 끝난 겁니다.”
전사 형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를 버리고 내뺀 황제를 누가 황제라고 하겠는가.
백번 양보해서 다시 돌아와 어떻게 제국을 재건한다고 하더라도.
정통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때 비에른 자작이 바닥에 형편없이 집어던진 통신구로 그다지 좋지 않은 소리들이 들려왔다.
눈짓을 하자 비에른 자작이 다시 바닥의 통신구를 집어 들었다.
그렇게 한참 뭔가를 듣더니 표정이 확 굳어졌다.
그리곤 어두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황제가 친위대와 함께 사라졌답니다. 황실의 보물들을 챙겨서.”
“……개판이네.”
아마 에센시아 제국 황제는 도저히 저 아크 드래곤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하늘에 떠 있는 저 수많은 브레스의 마법진들도 한몫했을 테고.
하.
그렇다고 정말 제국에 남아있는 백성들을 죄다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튀다니.
남은 백성들은 이러면 성마 전쟁에서 아무 반항도 못 하고 학살당할게 분명하다.
제국이라는 울타리가 사라진 상태에서는 더욱.
거기다 타 왕국의 연합군들과 왕족들, 귀족들 역시 버려지긴 마찬가지였다.
“황자와 황녀들은? 걔들도 몰랐대?”
“다들 이제야 상황 파악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 지휘부는 아비규한이라고…….”
황자와 황녀들조차 모르게 잽싸게 튀었다라…….
그리고 당장 중심을 잡아 줄 황제가 사라졌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파장이 크다.
“끝이 좋게 나진 않겠네.”
당장 성마 전쟁이 한창 시작되려는 시점인데.
아군의 구심점이 되어 주어야 할 에센시아 제국의 황제가 각국의 왕족들을 버려두고 튄다?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였다.
앞으로 크루아 대륙 역사가 뒤집힐 정도로.
파장이 크다 못해 판이 다 엎어져 버린 상태다.
재중이 형도 어깨를 으쓱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판이 감당이 안 되겠는데? 역사가 너무 뒤집혔어.”
“네, 적당히 바뀌어야 어떻게든 따라가는데요.”
애초에 우리가 계획한 건 역사상 주요 인물들을 그대로 두고 최대한 원 역사를 건들지 않으면서 빼먹을 수 있는 것들만 야금야금 해먹는 거였다.
한 번 틀어진 역사는 다시 잡기란 쉽지 않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역사가 뒤집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옆에서 막내별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비 효과가 무섭긴 하네요.”
“뭐…… 그렇죠.”
그 나비가 우리라서 문제이려나.
아크 드래곤을 쭉 달고 들어온 게.
결국 황제 탈주 사건까지 이어져 버렸다.
그때 나르샤 누나가 멀리 있는 한 곳을 가리켰다.
“저거 제국 황실 비공정 맞지?”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아크 드래곤이 있는 방향과 반대쪽으로 부상하는 한 거대한 비공정이 보였다.
이 시점에 저 크기의 비공정이 뜨는 것도 그렇고.
하필 전투 지역과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것도 그렇고.
저건 안 봐도 확실했다.
“황제네.”
“황제네요.”
“황제겠죠.”
모두가 입을 모아서 황제라는 말을 하자 비에른 자작의 눈빛이 확 죽어버렸다.
누구보다 저 제국 황실 비공정의 외형을 잘 아는 사람일 테니.
그런 비에른 자작을 씁쓸하게 바라봤다.
당신이 그렇게 힘겹게 지키려던 제국이라는 게.
고작 이렇나 싶어서.
비에른 자작이 다 죽어가는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혹시 황제 폐하를 지켜주실 순…….”
“어림도 없죠. 아직도 황실에 미련이 남았습니까?”
제국에 대한 충성심은 정말 좋긴 하네.
미련할 정도로.
성향이 이러니까 원 역사에서 마지막까지 제국에 남아 제국과 함께 운명을 달리했겠지.
딱히 비에른 자작의 정해진 성정을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마 바꿀 수도 없을 테고.
그리고 비에른 자작에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난 이미 이 상황을 한 번 목격한 적이 있었다.
비록 직접 눈으로 본 건 아니고.
문헌에서 봤을 뿐이지.
바로 원 역사에서.
멸망하는 에센시아 제국을 등지고 떠나가는 황실 비공정의 모습이랄까.
뭐 그때는 수많은 연합군들과 함께 떠났다는 것 정도가 달랐지만.
왠지 그 원 역사와 지금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그런지 좀 짠한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겠구나 하는 생각.
옆에 있던 챠밍과 이쁜소녀도 그걸 알기에 조금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비에른 자작을 바라보았다.
한숨을 쉬고는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좋은 사람은 오래 살아야 하는데…….”
“네? 무슨 말입니까?”
“아니, 혼자 말이었어.”
어리둥절한 비에른 자작을 뒤로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흐음.
중앙성에서 조금 더 시간을 벌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좀 불안하지만 해봐야 하려나?
성공 여부를 고려해 가면서 머릿속에서 퍼즐이 막 오가는 그때.
비에른 자작이 지닌 통신구에서 불빛이 들어왔다.
흐음.
더 안 좋은 소식이 아니었으면 하는데.
통신구를 든 비에른 자작 역시도 굳은 표정으로 연락을 받았다.
그런데 그때.
의외로 비에른 자작이 깜짝 놀란 듯 외쳤다.
왜 저러지?
“황녀 전하?”
응?
황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단어가 비에른 자작의 입에서 나오자 다들 시선이 집중되었다.
통신구를 통해서 연락을 한 이가 다른 사람도 아닌 황녀라고?
현재 황제가 토낀 이상.
제국에 남아 있는 이들 중에 가장 높은 명령권을 지닌 것이 바로 황자와 황녀들이었다.
그들 중 서열이 어떻게 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보통은 높은 서열의 황자나 황녀가 명령권의 주가 되긴 한다.
그래서인지 딱히 기대는 하지 않았다.
서열이 높은 황자나 황녀가 지금 이 순간에 통신구를 신경 쓸 여력이나 있을까.
지휘체계를 잡는다고 정신이 없을 터.
그렇다는 건.
서열이 꽤 낮은 한 황녀가 우연찮게 통신구를 통해 연락을 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아무 영향력이 없는.
딱히 대세에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테고.
조금 있으면 브레스가 떨어져 폭발할 중앙성에서는 이제 기대를 접어 버렸다.
어떻게든 우리끼리 해봐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는데 비에른 자작이 내게 통신구를 들이밀었다.
“주호 왕자님.”
“응?”
“황녀님께서 빨리 바꿔 달라고…….”
“지금? 나를?”
아니 시간도 없는데.
그래도 궁금한 마음이 앞서서 비에른 자작에게서 통신구를 건네받았다.
“주호 로가슈 왕자입…….”
“통성명은 됐고요. 정말 당신 말대로 하면 살 수 있어요?”
응?
꽤 신선한 반응에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살 수 있다고 해두죠. 그런데 내 말을 믿습니까?”
“아니. 그런데 여기 있는 병신들 중에 제대로 된 방법을 낸 사람이 당신뿐이라서요.”
잠시간의 공백 후 이어서 말이 들려왔다.
“그래서 당신 방법에 목숨을 걸어 보려고.”
흐음?
이 황녀.
꽤 마음에 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