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1화 에센시아 방어전 (7)
비에른 자작이 준비한 방법은 분명 통하겠지.
하지만 여기에는 가장 큰 문제가 존재한다.
바로 우리의 실질적인 이득.
예상하기로 아크 드래곤과 싸우고 나면 필히 타이탄은 폐기 상태까지 갈 것이다.
이러면 일단 무조건 우리에게 마이너스다.
한 번밖에 써먹지 못하는 타이탄을 단순히 아크 드래곤을 몰아내는 데만 써먹어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거다.
최소한.
에센시아 제국에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아내야 할 텐데…….
하지만 과연 에센시아 제국에서 우리에게 그만큼의 보상을 내어줄 수 있을까?
퀘스트상으론 분명 방어전 순위별로 보상이 있긴 했다.
그런데 이게 과연 타이탄과 바꿔먹을 정도의 보상일 수 있나?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특수 강화석 몇 개 받아 내거나 황실의 지원 혹은 주요 인물 호감도 상승 정도겠지.
뭔가 대단한 아이템을 받아내지 않을 정도라면.
사실상 크게 의미가 없는 보상이었다.
뭐 당장 제국이 망하기 일보직전인 상황에서 구해내기야 한다면 그에 준하는 아이템을 얻어낼 수 있긴 할 테다.
그렇다고 해도.
손해는 손해다.
비에른 자작이 이야기한.
단순히 아크 드래곤을 에센시아 제국성에서 몰아내는 정도로는.
나로선 오히려 방어전을 안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번 방어전을 치를 거라면.
그 이상의 뭔가를 노려야 했다.
그리고 그런 우리 눈앞에 있는 보상 중에 가장 먹음직스러운 녀석은 바로.
아크 드래곤.
비에른 자작이 경악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지금 아크 드래곤을 죽일 거라는 겁니까?”
“왜? 문제 있어? 잡지 마?”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보통은 저런 반응이 맞다.
아크 드래곤은 잡느냐 못 잡느냐로 평할 만큼 약한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현재 에센시아 제국 내에 있는 전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아크 드래곤을 잡지 못할 것이다.
그게 가능했다면.
이미 아크 드래곤을 쫓아내거나 죽였을 테니까.
최소한 성마 전쟁 원정을 나간 영웅들이 돌아오기라도 해야 승산이 있을 텐데.
그것도 아니지.
그렇다고 에센시아 제국 내에 남아 있는 병력들은 이미 한 차례 패배했다.
방어 시설이 밀집된 성벽도 와르르 무너졌고.
남아 있는 전력이 아직 꽤 되긴 하겠지만.
그것도 시간 끌기가 전부다.
집 나간 영웅들이 돌아올 때까지.
무너진 성벽과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가 비에른 자작을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지금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있지?”
“음, 확실히 집계해 봐야 알겠지만 부상과 사망자를 제외하면 대략 일천 명 정도는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흐음.
나쁘지 않다.
원래의 병력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지금 비에른 자작의 반응을 봐서는.
방어를 위해 운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병력 정도는 남아 있는 듯했다.
어차피 부상자들은 써먹을 수 없으니 원래의 병력 숫자는 의미가 없기도 하고.
“여기 지휘관은 비에른 자작이 전부인가?”
아까 책임자를 부르러 간다는 병사가 사라진 지 꽤 됐지만 다른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제3 외성 방어대장이면 비에른 자작 같은 지휘관이 몇 명은 더 있을 텐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지휘관은 이 녀석이 전부다.
아마 다른 녀석들은 죽거나 활동 불능 혹은 부상일 터.
만약 그게 아니라면 벌써 나타났겠지.
그렇다면.
지금의 이 외성 방어의 총책임자는 이 비에른 자작일 것이다.
다른 말로.
외성의 모든 방어 시설을.
이 비에른 자작의 명령 하나로 통제할 수 있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좋아.”
오히려 이쪽이 더 좋았다.
괜히 지휘관이 여럿 있어 봐야 의견과 동선이 꼬이기만 할 뿐.
그나마 비에른 자작은 내가 확실히 로가슈 왕국의 왕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의견을 잘 따라줄 것이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은?”
“……아직 없습니다.”
“원래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지?”
내 물음에 비에른 자작이 바로 대답해 주었다.
“성벽 방어에서 피해 입은 병력을 추슬러서 중앙성으로 지원 갈 예정이었습니다.”
이게 정석이긴 하다.
어차피 아크 드래곤에 중앙성이 날아가면 성벽 방어는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들이 지원을 가 봐야 사실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크 드래곤은 하늘을 날면서 폭격하는데.
성벽 방어 시설의 도움 없이 막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기껏해야 하늘을 향해 거대 몬스터를 저격하는 발리스타의 거대 화살이나 추격 마법을 날리는 정도?
솔직히 그마저도 아크 드래곤의 기동력이 너무 빨라 대부분 맞지도 않을 테지만.
나중에 시간이 좀 지나 병기가 더 좋아지면 방법이야 있겠지만.
당장 아크 드래곤을 떨어뜨릴 수준은 아닐 것이다.
옆에서 재중이 형이 조금 거들었다.
“가 봐야 다 죽는 건 알 테고?”
그러자 재중이 형을 보던 비에른 자작이 내게 물었다.
“이쪽은 누구십니까?”
“아, 불멸 공작이다. 로가슈 왕국의 군대를 이끌고 있는 장군이기도 하고.”
<불멸> 내가 언제부터 장군이었냐?
<주호> 이왕 하는 거 막 나가죠?
<불멸> 큭, 배움이 너무 빠른데?
장군이라는 말을 듣자 비에른 자작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 불멸 공작님이시군요. 공작이시면서 군대를 이끄시는 분은 흔치 않은데.”
“싸우는 걸 좋아해서 말이지.”
그 말에 감탄하는 듯한 비에른 자작의 표정.
아마 지금쯤 재중이 형의 시스템 메시지는 호감 상승으로 잔뜩 도배 되지 않았을까.
같은 동지를 만난 딱 그런 느낌일 테다.
아니나 다를까.
재중이 형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불멸> 이 녀석하고 호감도 막 올라가는데?
<주호> 눈빛만 봐도 알겠어요.
<불멸> 이러다 내가 먼저 친해지는 거 아닌가 몰라.
그런 말을 하다가 재중이 형이 멀리 성벽에 반쯤 걸쳐져서 허리가 갈라진 비공정들을 보며 물었다.
저항도 못 해보고 형편없이 구겨진 비공정들의 잔해들이 얼마나 아크 드래곤이 강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비공정들은?”
“아, 현재 전투가 가능한 비공정들은 전부 중앙성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우리가 에센시아 제국을 떠났을 무렵.
광범위 뇌전으로 다수의 비공정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지금 자세히 멀리 있는 성벽을 살펴보니.
의외로 지상에 추락한 비공정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이 근처는 추락한 비공정들로 인해 불바다가 되어 있어야 할 텐데.
생각 이상으로 많은 비공정들이 살아남은 듯했다.
특히 왕국을 대표하는 비공정과 제국의 거대 비공정들은 꽤 버텨낸 모양이다.
지상에 추락한 건 대부분 중소형 비공정들이 전부였다.
하긴.
왕국이나 제국의 비공정을 타고 있던 주요 직책 중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지금 여기서 비에른 자작을 마주하는 건 우리가 아닌 그들이 되었을 것이다.
주도권을 가져오지도 못했을 테고.
당장 어느 시골 나라 왕자냐면서 따지고 들지 않았으면 다행이다.
재중이 형이 다시 물었다.
“지상에 추락한 비공정 중에 기동이 되는 건 몇 척이지?”
“추진기관이 폭발한 비공정은 무리지만…… 추려보면 이십여 대는 운영 가능할 겁니다.”
“생각보다 괜찮네.”
재중이 형이 곧장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불멸>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는데?
<주호> 네, 완전 바닥은 아니네요.
혹여나 이십여 대도 되지 않는다면 어쩌나 했다.
그럼 아무리 우리가 수를 낸다고 해도 화력이 너무 부족해질 테니까.
그때 비에른 자작이 한숨 섞인 말을 내놓았다.
“하지만 다시 난다고 해도 아크 드래곤을 상대할 만큼의 기동력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확실히 광역 뇌전에 한 번 쓸렸기도 하고 추락하면서 선체가 피해를 보기도 했을 것이다.
나 역시 정상적으로 비행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비공정의 기동력이 아니니까.
“괜찮아. 어차피 거기까진 기대도 안 했어.”
사실 비에른 자작 말대로 비행해 봐야 어차피 다 떨어질 텐데.
굳이 힘들게 날려 보낼 이유는 없었다.
“다 다른 왕국의 비공정들이던데 비에른 자작이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나?”
비에른 자작의 소속은 에센시아 제국이지만 비공정들은 아니다.
각 왕국에서 차출된 비공정들인데 만약 그중에 비에른 자작보다 직위가 높은 이의 명령을 받는다면 우리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비에른 자작이 어림도 없다는 듯 말했다.
“전시 상황에서는 현재 외성 방어대장인 제가 최우선적인 작전 지휘권을 가집니다.”
“그래?”
“제국 황제께서 협의한 사항이라 문제없습니다.”
“너보다 상위 직책을 가진 자라면?”
“왕국의 왕족, 제국의 공작이나 황족이 아니라면 괜찮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내 생각 이상으로 비에른 자작의 지휘권이 높은 듯했다.
제한이 좀 있기는 해도.
이 정도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미 비에른 자작 이상의 작전권을 쓸 녀석들은 이미 비공정을 타고 중앙성으로 향한 듯했고.
적어도 여기 남아 있는 녀석들 중에서는.
비에른 자작의 명을 거스를 녀석은 없어 보였다.
곧장 비에른 자작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거리낌 없이.
“그럼 나, 비공정들 다 빌려도 될까?”
“네?”
“여기 있는 비공정. 전부 내가 좀 쓰고 싶다고.”
비에른 자작 본인이 다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내게 비공정을 전부 다 빌려주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다.
비공정의 무력을 생각해 보면 한마디로 작전권을 다 넘겨달라는 말과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조금은 망설이는 듯한 비에른 자작의 모습.
뭐 이게 맞지.
생판 듣도 보도 못한 녀석이 왕국의 왕자라면서 나와서는 쓸 수 있는 비공정을 다 빌려달라고 한다.
정상적인 지휘관이라면 당장 내 목을 쳐도 딱히 할 말이 없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
바로 내 뒤에 웅장하게 서 있는 저 타이탄.
이 보증 수표가 버젓이 있으니 저렇게 망설이는 거다.
“아까 왕국의 왕족이 원하면 작전권을 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건 정말 형식적인 절차입니다. 각국의 왕족을 우대하기 위한…….”
들어보니 확실히 알겠다.
작전권을 달라고 할 순 있지만.
실제로 그걸 전시에서 행사할 간 큰 왕족은 없다는 걸.
빤히 제국의 황제가 있는데 대놓고 전투 상황에 나서서 배놔라 감놔라 하긴 어렵다는 뜻일 테다.
제국 황제의 얼굴에 똥칠할 생각이 아니라면.
각국에서 병력 협조는 하되.
작전 자체를 깽판 놓을 순 없다는 소리다.
자신들의 병력을 소모품으로 쓴다던가 하면 또 이야기는 달라질 테지만.
그때 재중이 형이 다시 나섰다.
“제국에서 병력을 지원받을 수 있는 것 아니었나?”
이건 퀘스트상에 나오는 문구였다.
다르게 말하면.
강제적인 협조 시스템을 요구할 수도 있다는 건데…….
문제는 지금 우리가 원하는 지원이 꽤 많다는 데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아마 모르긴 해도 시스템 메시지가 뜬다면.
《 지원해 드릴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
이런 글귀가 뜨지 않을까.
비에른 자작이 어렵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아.
아크 드래곤을 잡아 준다고 해도 이러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비에른 자작 입장에서는 저 비공정들을 다 날리고 나면.
안 그래도 외성 방어에 실패한 마당에.
오라는 지원은 안 가고.
비공정을 엉뚱한 녀석에게 냅다 쥐어주면?
바로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재중이 형이 그런 비에른 자작을 보고는 한마디 했다.
“그런데 말이지. 그것도 에센시아 제국이 남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흐음.”
“당장 제국이 멸망할 지경인데 절차 다 지켜가면서 어떻게 지키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그리고 네 방식대로 하면. 정말 제국을 지킬 수 있는 것 맞아?”
그 말에 비에른 자작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명령과 실상.
두 가지 선택지에서 흔들리는 중일 테다.
그때 내가 비에른 자작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말을 해주었다.
“잘못되면 책임은 내가 지도록 하지. 비공정을 빌려달라고 한 건 나니까.”
그리고 당근을 하나 더 내놓았다.
“어차피 외성 방어에 실패한 이상. 문책은 피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나와 함께 아크 드래곤을 잡을 수만 있으면. 과연 어떻게 될 것 같아?”
감미로운 목소리처럼 내 말 하나하나가 흘러들어가 비에른 자작에게 닿았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비에른 자작은 아직 공작이 아니다.
그만큼 입지가 불안하기도 할 테고.
반대로 성공만 하면.
앞으로의 이 녀석의 앞길은 탄탄대로다.
“위기에 빠진 제국을 구한 영웅. 어때? 해볼 생각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