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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040화 (1,028/1,404)

#1040화 에센시아 방어전 (6)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처음에 나와 재중이 형이 생각했던 건.

어떻게든 아크 드래곤의 힘을 빼놓은 뒤.

영웅들이 나서서 아크 드래곤을 섬멸하는 방식을 택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아크 드래곤이 제국 내에서 난장판을 치고 있을 때도 나타나지 않은 게 그런 이유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제국성에 피해를 누적시키면서 아크 드래곤을 시가지 내로 끌어들여야 하는가 하는 점.

한번 시가지가 박살나면 복구하는데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간다.

복구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고.

큰 피해가 날 게 확실한데…….

처음에 제국 내의 내로라하는 비공정들을 띄워 에센시아 제국성의 외부에서부터 녀석을 막으려고 한 행동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뭐 비공정이 시가지 내에서 주포를 날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외곽에서 아크 드래곤을 막는 게 정상적이긴 하다.

그래서 처음엔 그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비공정을 쓰는 게 공중 네임드를 막는 방법이기도 했고.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사실을 다 알고 나니.

그게 오히려 그 비공정들이 마지막 저지선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은 사정을 알고 있으니 눈에 보이는 것들.

아크 드래곤을 저지할 영웅이 없다는 것.

어떻게든 비공정과 성벽의 포만으로 막았어야 하는데.

사실상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인 성벽이 뚫린 이상.

누구라도 뭔가 수를 내지 않으면.

이 제국은 곧 망한다.

반대로.

지금 이 순간.

제대로 된 활약을 한다면.

단번에 에센시아 제국에서 핵심 위치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시선을 돌려 책임자라고 불려온 NPC에게 물었다.

“직책이?”

“에센시아 제국 제3 외성 방어대장입니다. 비에른 자작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주호 왕자님.”

<불멸> 외성 방어대장? 거기다 귀족이잖아. 생각보다 거물인데?

<주호> 네, 그냥 잔챙이가 올 줄 알았는데 말이죠.

그러고 보면 지금이야 무너진 성벽의 잔해를 뒤집어써서 꽤 추레한 행색이었지만 그 속에 묻혀 있는 갑옷은 일반 병사들하고는 다르게 상당히 고가의 형태에 품위가 있어 보였다.

무엇보다 직위가 생각 이상으로 높았다.

자작이라면 앞에 나서기보단 뒤에서 떵떵거려도 될 만한 직위니까.

일반적으로 기사 수준에서 방어 대장을 하는 편이기도 하고.

아마 제국이라 편제가 좀 다른가 했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은 특별한 전시 상황이었다.

특히 아크 드래곤 같은 미친 녀석이 들이닥친 상황.

오히려 성벽 방어가 가장 중요한 상황에는 이 정도 직위가 통솔을 위해 대장을 맡는 게 맞는 일일 수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비에른 자작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자작이 직접 나서야 할 만큼 급한 상황이긴 하죠.”

곧 비에른 자작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나라를 지키는 일입니다. 직위가 중요하겠습니까.”

처음에 부랴부랴 달려왔던 모습과는 다르게 꽤 침착하고 안정적인 눈동자였다.

일단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는 건가.

하긴 외성 방어를 맡겨놓을 정도라면 어느 수준 이상의 자격은 있어야 할 테다.

그런데 비에른 자작이라는 이름이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스쳐 지나가듯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비에른 자작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봤더라?

그때 옆에서 놀란 눈빛을 한 재중이 형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불멸> 하. 설마 이 녀석이 비에른이었어?

<주호> 네? 혹시 중요한 사람이에요?

<불멸> 어, 너 기억 안 나냐? 챠밍이 모아 주었던 자료 중에 있었잖아.

음.

솔직히 한 번에 너무 많은 자료를 봐서 그런지 이름 하나하나를 전부 기억하지는 못한다.

당장 펼쳐놓고 찾으라면 어떻게 찾긴 할 텐데.

반면에 재중이 형은 잘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주호> 누구예요?

<불멸> 비에른 공작. 고대 영웅 중에 하나다.

비에른 공작?

그 말을 듣는 순간 스쳐지나가는 이름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직책이 아닌.

한 영웅의 별명.

“통곡의 벽?”

내 혼잣말에 비에른 자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아, 아니다.”

솔직히 좀 당황한 면도 있긴 했다.

이 녀석이 그 유명한 통곡의 벽이라고?

이 별명은 마족들이 지어준 별명이었다.

절대 뚫을 수 없는.

요새 방어의 일인자.

이 녀석을 넘지 못해 성벽 앞에서 죽어간 마족의 수만 아마 수백은 족히 넘어갈 거다.

마왕군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아마 꽤 다수의 종족이 싸그리 멸족할 수준일 테고.

몬스터 사체로 벽을 쌓아 요새를 메운다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괜히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이 녀석은.

그야말로 전설과도 같은 신화를 쓰는 녀석 중에 하나다.

비록 에센시아 제국이 멸망하면서 이 녀석도 죽긴 하지만.

그 전까지는 마족들이 이 녀석을 보면 치를 떨 정도로.

어마무시한 영웅이 된다.

오죽하면 마족의 천적으로 불리는 이 녀석만은 천사들이 빼내려고 했었던가.

그 제안을 뿌리치고 멸망하는 에센시아 제국을 마지막까지 남아 지키다가 죽는.

그야말로 역사에나 등장할.

진짜 영웅이다.

이거 참.

어떻게 보면.

지금 눈앞에 이 녀석이.

우리가 만나볼 수 있는 영웅 후보 중에서는 그야말로 최상위라고 볼 수 있는 녀석이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여기 있을 존재가 아닌데?

솔직히 이 비에른 자작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기에 처음부터 다른 영웅 후보인 레온 브라이더를 점찍었던 거다.

애초에 우리와 이 비에른 자작 사이에 그 어떤 접점이 없기도 했고.

보통 성의 방어를 맡으면서 외부에는 나오지 않는 인물이었다.

<불멸> 어떻게 보면 가장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기도 해. 지금 같은 전시 상황이 아니면. 절대 표면에 나오는 녀석이 아니니까.

<주호> 네, 하지만 지금은 그 전시죠.

재중이 형 말대로 우리가 만날 수 없는 녀석이었는데.

지금 어떻게 우연찮게 기회가 되어 선이 이어졌다.

만약 아크 드래곤이 에센시아 제국에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이 시나리오가 다 끝나기 전까지도 못 만났을 확률이 높은.

그런 수준의 대어였다.

“하하, 그렇군. 앞으로 잘 부탁한다, 비에른 자작.”

웃으면서 손이 나가자 비에른 자작이 멀뚱멀뚱한 듯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내 손을 맞잡았다.

“저 역시 잘 부탁드립니다, 주호 로가슈 왕자님.”

에센시아 제국의 귀족이 보통 왕국의 귀족보다 한 급 위로 쳐준다고는 하나.

한 왕국의 왕자와 일개 자작을 비교할 수는 없는 거다.

서로 문제가 생기면 외교적인 문제로 번지겠지만.

그전까지는 이 녀석이 무조건 저 자세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난 그런 점을 십분 이용할 생각이었다.

“일단은…… 급한 불부터 좀 꺼야겠지.”

“불이라 하면…….”

내 시선이 다시 저 멀리 시내가 불타오르는 화마로 향하자 통곡의 벽 비에른 자작 역시 침울한 표정으로 똑같은 광경을 바라봤다.

그리곤 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 녀석이 여기서 해볼 수 있는 있는 건 이미 다 실행했을 거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비록 통곡의 벽인 전성기의 공작 수준이 아닌.

아직 영웅 후보 정도인 녀석이긴 해도.

기본 바탕은 똑같다.

지금도 성벽 방어대장을 하는 걸 보면.

능력이 부족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는 평범하게 역사가 흘러갔을 때의 이야기.

아크 드래곤이라는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는 부족했을 터.

만약 영웅들이 좀 더 존재했더라면.

비에른 자작의 방어 능력이 더 빛을 발했겠지만.

아쉽게도 성마 전쟁 때문에 대부분 나가 있는 중이라.

속수무책으로 뚫려버린 성벽으로는.

그런 능력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영웅 후보는 아니지만.

내게 좋은 패가 존재했다.

“흐음, 비에른 자작. 당신 같으면 이 녀석이 있으면 어떻게 써먹겠나?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러면서 내 뒤에 서 있는 타이탄을 가리켰다.

“타이탄…… 입니까.”

그리고는 뭔가 고민에 빠진 듯 생각에 잠겨들었다.

이건…….

실험이다.

이니 정확하게는 녀석에게 주는 일종의 시험이었다.

과연 이 녀석이 내가 원하는 답에 도달할 수 있는지.

그러자 재중이 형이 재밌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불멸> 호오. 영웅을 한번 거느려 보겠다?

<주호> 그렇게 보였나요?

<불멸> 아니라면 굳이 번거롭게 의견을 물을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는 재중이 형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내게 말을 이었다.

<불멸> 어차피 너. 저걸로 아크 드래곤 때려잡을 방법은 다 생각해 놨잖아.

<주호> 하하…… 너무 티 났어요?

<불멸> 저런 좋은 패가 있는데 그 정도도 못하면 안 되지.

보아하니 재중이 형 역시도 가능성 높은 방법을 생각해둔 듯했다.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여유를 부릴 순 없을 테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을 쓰지 않는 것은…….

<주호> 이왕 영웅이라는 좋은 패가 들어왔는데 써먹어야죠.

<불멸> 정확하게는 네 밑에 넣겠다는 거고.

<주호> 미리 선점해 두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요.

고대 영웅.

그 이름 하나가 가진 가치가 얼마나 될까.

아마 어지간한 미친 스펙의 아이템들보다 이쪽이 더 값어치가 있을 지도 모른다.

특히 지금 같은 시대에는.

기회가 있고 손을 뻗을 수 있다면.

최대한 많은 영웅을.

내 밑으로 끌어들이는 게 좋다.

그리고 그 시발점이 되어줄 녀석.

비에른 공작.

그때 녀석이 내게 물었다.

“이 타이탄을 얼마만큼 움직일 수 있으십니까?”

기동력을 말하는 거려나?

“내가 움직이는 수준으로는 가능해.”

“그렇다면……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이라. 계속 해봐.”

“아크 드래곤을 죽이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 제국에서 몰아낼 수는 있을 겁니다.”

현재 우리는 잘 모르지만.

이 비에른 자작은 제국의 방어시설에 대해서 통달해 있었다.

그런 비에른 자작이 장담을 할 정도라면.

분명히 아크 드래곤을 잠시라도 몰아낼 수는 있을 터.

“그 이후에는 영웅을 기다린다?”

“네, 아크 드래곤을 확실히 잡으려면 영웅님들이 모두 나서야…… 방법은 이렇게…….”

나쁘지 않다.

타이탄을 빌려주고 에센시아 제국의 흥망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건.

에센시아 제국에 엄청난 빚을 지워두는 셈이니까.

거기다 지금 눈앞의 이 미래의 영웅에게도 빚을 달아두는 거다.

한참 비에른 자작의 방법을 듣던 재중이 형이 약간 못마땅한 듯 말했다.

<불멸> 좋은 장사긴 하지.

<주호> 네, 좋은 장사긴 하죠.

<불멸> 그런데 이 녀석. 생각보다 배포가 작은데? 영웅이 될 녀석이 이렇게 간이 작아서야.

그런 재중이 형의 말에 마주 웃음 지었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려나.

확실히 좋은 방법이긴 했다.

비에른 자작이 내놓은 방법은.

그런데 문제는.

그 방법 자체가 너무 수비적이라는데 있었다.

단순히 아크 드래곤을 이 제국에서 몰아낸다 정도를 한계로 생각해 버리고 작전을 짜니까.

딱 거기에 맞는 해답밖에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아크 드래곤을 몰아낸다고 치자.

그리고 이후 다른 영웅들이 복귀를 해서 다 같이 아크 드래곤을 잡는다 치고.

그러면 내게 남는 게 뭐지?

현재 비에른 자작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 에센시아 제국의 안위만을 위한 작전을 짰다는 거다.

뭐 지금 쫓아낸다면 내게도 충분히 보상이 돌아오긴 하겠지만.

후에 아크 드래곤을 영웅들이 잡아 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피곤해지는 일이다.

아무래도 이 통곡의 벽은.

뻔한 미래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본인의 목숨을 다 바쳐 싸우다 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영웅.

그 타이틀은 분명 멋지긴 하지만.

영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녀석을 조금 더 내 스타일대로 주물러 줄 수밖에.

한참을 듣다가 비에른 자작의 말을 손을 들어 끊고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을 꺼냈다.

“정답이 틀렸어.”

“네?”

“아크 드래곤은…… 오늘 여기서 죽는다.”

우리끼리 다 해먹을 수 있는 걸.

굳이.

남들과 나눠 먹을 필요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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