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7화 에센시아 방어전 (3)
타이탄만으로는 아크 드래곤을 절대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크 드래곤은 비행형이기도 하고.
지상에서 아무리 뛰어 봐야 아크 드래곤이 날아 버리면 그만이다.
그 상황에서 아크 드래곤이 지상으로 광역기라도 퍼부으면 그냥 게임 끝.
상성상 애초에 게임이 안 된다.
아크 드래곤을 잡으려면 에센시아 제국의 도움은 필수였다.
여기서 딱 하나 걸리는 건 제국의 협조를 얻을 방법이 없다는 것.
그런데 재중이 형은 내게 방법이 있다고 했다.
“잘하는 거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과 지금 상황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때 내 주변을 날아다니던 금속의 정령이 아주 단호하게 한 마디를 꺼냈다.
“사기!!”
“응?”
“사기를 잘 쳐!”
“하아…….”
금속의 정령이 설마 사기라는 말을 꺼낼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그러자 재중이 형이 바로 배를 잡고 쓰러졌다.
“크큭. 이거 정령이 주인을 너무 잘 아네.”
아주 숨이 꺼억꺼억 넘어가는 걸 보면 저대로 웃겨서 죽을 건가 보다.
“사기라뇨. 전 절대 그런 적이 없…….”
음.
없진 않군…….
아마.
꽤.
많이.
대부분.
흐음.
생각하니 계속 떠오른다.
손으로 바로 그 생각들을 휘젓고 있자 재중이 형이 나를 보며 말했다.
“일단은 별이가 정답이다.”
“와아!!! 맞췄다!!!”
끙.
이게 좋아할 일은 아닐 텐데.
왠지 모르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재중이 형에게 물었다.
“사기라면 어떤 사기를 말하는 거예요?”
“음. 지금 같은 경우에는 말이지…… 신분 사기라고 해야 하나?”
“네?”
신분 사기?
“뭐 신분이라도 훔치자는 거예요? 하지만 어지간한 신분으로는 의미가 없을 텐데요. 거기다 높은 신분은 보장이 확실할 테고.”
에센시아 제국에 파고들 수 있었다면 진작 파고들었다.
굳이 의심스런 영웅 후보인 레온 브라이더를 찾아 감옥에 들어가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연을 만들려고 했던 것도 그런 과정의 일환이었지.
만약 과거의 영웅 레온 브라이더에게 줄을 댈 수만 있다면.
에센시아 제국 사회에 손쉽게 올라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냥 보증된 신분증이랄까.
중간에 꽤 이상하게 엇갈리긴 했지만.
아크 드래곤이 쳐들어오지 않고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레온 브라이더에게 접근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터.
하지만 문제는 지금 이 순간이다.
레온 브라이더에게 접근하는 문제는 둘째 치고.
당장 에센시아 제국이 망해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뭔가의 높은 신분을 만들기에는.
너무 시간이 빠듯했다.
할 시간도.
그럴 여유도 우리에겐 없다.
그런데 신분 사기라…….
지금 같은 상황에선 충분히 혹할 만한 이야기지만.
역시나 그 방법이 문제였다.
만약 쉬운 방법이었다면.
재중이 형이 진작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던 재중이 형이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그것도 타이탄의 튼튼한 다리를 주먹으로 툭툭 치면서.
“자. 잘 생각해 보라고. 예전하고 지금의 우린, 가진 재산이 다르지 않나?”
그런 재중이 형의 말에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들이 있었다.
“설마. 이걸로 우리 신분 보장을 한다는 건가요?”
“어. 꽤 그럴 듯 하고 폼 나잖아? 고대 정령 병기라는 건?”
“으음. 확실히 그럴듯하긴 한데…….”
아니다.
단순히 그럴듯한 게 아니라.
꽤 좋은 그림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몇 가지만 더 끼워 넣는다면…….
아마도.
나쁘지 않은 그림이 될 터.
“고대 정령 병기 정도면…… 어지간한 왕국에서는 구경하기 힘들겠죠?”
“어, 이 시대상이 얼마나 발전해 있는지 몰라도 아크 드래곤하고 맞먹을 만한 병기를 쉽게 가지고 있진 못할 거야. 최소한 제국 정도는 되어야지. 혹은 아예 모르는 국가이거나.”
솔직히 말해서 제국도 아직 이 정도의 병기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
아니.
고대 정령 병기라는 물건이 국가가 소유할 수 있는지가 더 문제이려나?
지금껏 그 어떤 국가에서도 이런 관련 자료를 찾아보지 못 했다.
이미 크루아 대륙의 과거 역사를 어지간히 알고 있는 우리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려 금속의 정령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정령들의 나라 같은 건 없겠지?”
“응. 정령계는 나라가 아니야.”
이건 확실히 아니군.
애초에 지상에 정령들의 나라라는 게 존재했다면.
이미 우리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령계라면 또 몰라도.
마계나 천계 같은 아예 독립된 공간이라.
여기서 등장하기에는 문제가 된다.
아마 믿어 주지도 않을 테고.
그렇다는 건.
좀 더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꽤 그럴싸한.
누구나 믿을 법한.
적당히 관심이 없는.
의심하지 않을.
딱 그 정도의.
나라가…….
있긴 있나?
우리 팀과 함께 크루아 대륙의 다른 제국들과 여러 개의 왕국들의 리스트를 떠올려 보았는데.
딱히 적합한 나라가 맞춰지지 않았다.
거거다 문제는.
우리가 그중 하나를 택한다고 해도 문제였다.
“형, 어지간한 나라들은 지금 죄다 에센시아 제국성에 와 있잖아요.”
“그렇지.”
“신분을 위장하려고 해도 불가능하지 않아요?”
만약 어디 왕국의 귀족이라던가 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고 진짜 그 왕국 사람을 만나게 되면.
정체가 들키며 개털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신분 위조.
에센시아 제국 내에서 꽤 중벌에 처하는.
그것도 타 제국이나 왕국의 귀족을 사칭하는 정도라면.
결코 가볍게 끝나지 않을 터.
잘못하다가는 이 과거 이벤트를 홀라당 날려먹을 지도 모른다.
이건 조금 빨리 가려고 하다가 아예 황천길 가는 셈이지.
“어, 맞아. 불가능이지. 의외로 그런 시스템은 확실하니까.”
역시 재중이 형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자 재중이 형이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거쳐 온 곳들도 과연 그럴까?”
“네?”
“좋은 곳 있잖아. 이곳 대륙과 아예 동떨어져서 사는. 과거 제국 역사에 등장조차 하지 않는 곳 말이야.”
“그런 곳이 어디 있…….”
그때.
머릿속에 확 스치고 지나가는 지명이 생각났다.
하.
이걸 왜 생각도 못 했지?
확실히 재중이 형 말대로.
이곳과는 아예 교류가 안 되는 대륙이 있긴 했다.
적어도.
지금 이 시점의 과거 크루아 대륙과는.
거의 단절된 장소.
“테슬라 대륙 말이죠?”
“어. 그리고 거기 좋은 왕국이 하나 있잖아?”
“로가슈 왕국.”
그것도 르아 카르테를 처음 얻은 왕국이기도 했다.
왕국의 가보로 되어 있던 걸 받아왔지.
지금은 다른 서버도 모두 아는 꽤 유명한 퀘스트였다.
내 주력 무기를 얻는 퀘스트로.
이후에 성장을 시키냐 못 시키느냐는 둘째 치더라도.
“역사상 하르 수출국 정도 위치긴 한데. 그게 가르시아 제국이 크루아 대륙 남쪽에 자리 잡고 난 뒤의 일이야.”
“네. 지금과는 딱히 관련이 없죠.”
“존재는 하되. 굳이 크루아 대륙에 넘어올 일이 없는 왕국이라면 꽤 매력적이지 않아?”
“으음. 확실히.”
“자. 그럼. 우리가 역사의 순서를 좀 뒤집어 보자고.”
“로가슈 왕국이 등장하게요?”
“그렇지.”
이건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꽤 높은 확률로 통할만한 사기다.
무엇보다.
우린 로가슈 왕국의 증표도 가지고 있거든.
쓸 일이 없어서 어디 창고 인벤에 처박혀 있기는 한데.
당장 신분 증명을 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물건은 없을 것이다.
퀘스트를 마치고 로가슈 왕이 직접 하사한 거니까.
만약 문제가 있다면.
르아 카르테도 있었다.
로가슈 왕국의 가보.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도 로가슈 왕국의 가보이긴 한가?
흐음.
이 시대의 르아 카르테가 에센시아 제국 어딘가에 있는 걸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고.
이건 좀 알아봐야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재중이 형이 나를 보며 아주 재밌겠다는 표정을 가득하고는 말했다.
저건 꽤 위험한 웃음인데…….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말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왕 하는 거. 넌 왕자 정도 해라.”
“네?”
“그 정도는 해야 어디 가서 말빨이 먹히지. 어설프게 귀족 나부랭이가 와서 설친다고 하면 게임이 되겠어? 그것도 외진 다른 대륙의 왕국 귀족이?”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요…….”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재중이 형이 피식 웃었다.
“왕자가 싫으면 아예 왕을 시켜 주랴?”
바로 왕자에서 왕으로 승격 당하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 잠시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왕은 꽤 나이가 있어야 하지 않나?
“……그냥 왕자로 하죠.”
정말 신분 상승이 롤러코스터네.
만약 저쪽 대륙에 제국이라도 있었다면.
바로 대륙 패자로 등장할 뻔했다.
“흐음, 챠밍하고 이쁜소녀는 공주 정도 하면 되겠고.”
“……이젠 아주 막 나가시네요.”
“뭐 어때?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데.”
저게 딱히 틀린 말이 아니라서 오히려 말이 된다는 게 어이없을 뿐이다.
“형은요?”
“아, 난 뭐 국왕의 친척 정도 하면 되려나? 일단 공작 정도로만 해두지. 다 왕족이면 이상하잖아. 그래도 공작은 되어야 어디서 말빨이 통하지.”
국왕의 친척도 충분히 이상합니다만.
“하아. 마음대로 해요. 형 말대로 누가 알아볼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너 그 감옥의 끄나풀한테 뒷배가 있다고 했다면서. 마침 좋은 핑계 아니냐?”
“아, 그러고 보니. 그건 나쁘지 않네요.”
다른 대륙의 숨겨진 왕국의 왕자에 무려 고대 정령 병기인 타이탄을 보유한 왕국이라…….
이 정도면 뒷배라고 하기에 확실히 조합이 괜찮았다.
“큭, 고대 정령 병기 하나 있으니 편하네.”
“네, 사기가 바로 진실로 둔갑하잖아요.”
아마 이 타이탄이 없었다면.
의심부터 하고 봤을 텐데.
타이탄 정도의 무력이라면.
그 거짓말을 바로 진실로 바꿔줄 만한 힘이 있었다.
곧 재중이 형이 웃음과 함께 허리를 숙이면서 내게 인사했다.
“그럼 가시죠. 왕자님.”
하아.
꽤 피곤해질 것 같은 느낌이.
벌써부터 드네.
* * * * *
나와 재중이 형은 황실 비공정을 띄워서 올라탔다.
그리고 타이탄은 일단 지상에서 따라오게끔 자동 조작으로 바꾸어 두었다.
내구도가 워낙 엉망이라 좀 삐걱거리기는 한데.
당장 움직이는 거에 만족해야 하려나.
어차피 제대로 된 전투는 한 번밖에 못하니까.
딱 그때까지만 잘 버티면 된다.
그 이후에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내 쪽이 타이탄의 조정을 맡고.
재중이 형은 황실 비공정을 몰면서 말했다.
“미리 전사한테 로가슈 왕국 국기 좀 보내달라고 하고.”
“네, 말해 둘게요.”
<주호> 전사 형. 상황 어때요?
<방패전사> 어, 개판이지. 여긴 완전 지옥이야.
흐음.
생각보다 상황이 더 안 좋은 것 같은데?
<주호> 어느 정도예요?
<방패전사> 외부 시가지의 반이 날아갔다. 성벽도 상당수 무너졌고. 내성도 곧 위기야.
전사 형과 우리 팀이 있는 곳이 내성의 바깥쪽이니까 그렇게 시간 여유가 많진 않았다.
<주호> 너무 빨리 무너지네요.
<방패전사> 급수가 달라도 너무 달라. 듣도 보도 못한 영웅들도 꽤 많이 등장했는데. 죄다 죽거나 쓰러져서 실려 갔다.
<주호> 메인 영웅들은요?
<방패전사> 아직 코빼기도 안 비치는데? 아마도 아크 드래곤의 체력을 최대한 빼놓고 등장하려나 보지.
일리 있는 말이었다.
후에 성마전쟁의 한자리씩을 꿰차고 활약할.
메인급 영웅들은 크루아 대륙 역사 전체로 봐도 중요한 존재들이었다.
제국 입장에서도 이런 곳에서 소모시키기는 무리겠지.
평범한 영웅 후보들과 국가의 전력으로 아크 드래곤의 체력을 빼놓으면 그때야 등장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때까지 제국이 버틸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막말로 아크 드래곤이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제국 전 지역에 깔아 버리면 나중을 위한 안배 따윈 의미도 없었다.
누가 제국의 대가리인진 모르겠지만.
판단을 한참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당장 튀어나가서 막아도 모자랄 판에.
어쩌면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제국이 망하는 건 지금 저런 좋지 않은 판단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재중이 형이 흘리듯이 말했다.
“언젠가는 망할 제국이라……. 지금 망해도 이상할 건 없겠지.”
“그렇네요.”
우리가 그 방아쇠를 조금 더 당겼을 뿐.
곧 의아한 눈치로 전사 형이 보내준 로가슈 왕국의 국기를 황실 비공정에 교체했다.
이젠 누가 봐도 로가슈 왕국의 비공정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저 멀리 지상에.
불타오르는 에센시아 제국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휴, 제대로 사기 치러 가보죠.”
자칭 로가슈 왕국의 제1왕자.
주호 로가슈.
에센시아 제국 방어전.
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