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0화 에센시아 제국 (9)
끼이익.
귀곡성과 같은 소리.
감옥 창살 바깥에는 아무도 없는데 자물쇠만 열리자 죄수들의 표정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히익!”
“귀신이다!”
음.
여기도 귀신이 있긴 한 건가?
약간은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창살 쪽을 바라보자 귓속말에 바로 불이 들어왔다.
기다리고 있던 반가운 연락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르샤> 나 왔어.
<주호> 네. 봤어요.
조금은 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 이상으로 잘해 주셨네.
이전에 미리 약속을 해 두었다.
플랜 D가 되면.
나르샤 누나가 이곳 감옥에 오기로.
내 시선에는 전혀 잡히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은신.
감각을 끌어올리자 앞에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긴 했다.
그것도 허공에서 공기의 흐름을 막아서는 미세한 여성의 실루엣 정도?
발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발걸음 소리조차 일체 들리지 않는다.
내가 가진 하이딩 망토보다 훨씬 고도화된 은신이랄까.
단순한 은신이 아니라 기척 은폐,음파 제거, 주변 환경 동화 같은 기능 등이 추가로 달려있었다.
아마 보통의 감각을 가진 수준에서 저 은신을 눈치채기는 힘들 것이다.
대놓고 정면에서 티를 내지 않는 이상은.
무엇보다 나르샤 누나의 은신은.
나나 재중이 형이 가진 하이딩 망토하고는 질적으로 차원이 달랐다.
공격을 해도 은신이 풀리지 않지.
영웅의 무구.
그 이름값에 맞는 정말 최고의 기능을 가진 무기였다.
누가 봐도 사기라고 할 만한 그런 녀석이다.
아마 경매에 내놓으면 유저들이 전 재산을 꺼내 사려고 할지도 모르겠네.
포착도 안 되는데.
나르샤 누나에게 피격을 당해도 은신도 안 풀린다.
공격 순간 은신이 풀리는 기존의 아이템들하고는 개념 자체가 다른 물건이라.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면.
그냥 나르샤 누나에게 의뢰하면 그만 아닐까.
최소.
숨겨진 기척을 수준 이상으로 느낄 수 있는 존재들 정도만 상대가 될 터.
그것도 거리가 멀어지면 그것도 쉽지 않다.
애초에 궁수가 근거리에서 싸워줄 일도 잘 없을 테니까.
거기다 원거리에서 나르샤 누나의 저격 실력은 전 서버에서도 최상위권이다.
저격에 최적화된 무기까지 들고 있으니.
사기나 마찬가지지.
그런 영웅의 무기를 들고 나르샤 누나가 손수 마중 나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보면서 말했다.
<주호> 경비들은요?
<나르샤> 시간이 없어 그냥 지나쳐오기는 했는데. 지금 처리해 놓을까?
넘치는 자신감.
나르샤 누나가 이곳까지 오는데 그 어떤 제지도 받지 않았다는 게 그 자신감의 증거다.
솔직히 충분한 시간만 주어지면 이 근방의 경비병들은 죄다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감옥이라 좁은 환경이 걸리긴 해도.
<주호> 아뇨. 괜히 소란스럽게 만들 필요는 없겠죠.
<나르샤> 알았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바깥쪽 먼저 돌아볼게. 천천히 나와. 애써 침투했는데 나가다 걸리면 억울하잖아?
그러더니 나르샤 누나가 내게 물었다.
<나르샤> 저게 네가 말한 그 덩치야?
<주호> 네. 어때 보여요?
<나르샤> 대충 봐도 강하게 생겼네. 이런 곳하고 어울리지 않게.
확실히 누가 봐도 강해 보이긴 하나 보다.
일반적인 NPC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는 소리지.
<주호> 혹시 한판 떠야 할 수도 있으니까 문제 생기면 바로 와줘요. 지금 제가 손발이 다 묶인 상태라서요.
지금 르아 카르테를 꺼내들기에는 아무래도 저 덩치의 소속이 의심스럽다.
심지어 르아 카르테를 가진 영웅과 연관이 있는 녀석인데.
못 알아볼 리가 없을 터.
그렇다고 테르타로스를 꺼내 들었다가는 마족 소리를 듣기 딱 좋을 테고.
마검 역시 마찬가지.
꺼내드는 순간.
바로 싸움이 날 것이다.
거기다 천사라고 물어보는 걸 보면 이 녀석은 분명 천사 쪽하고 어떤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른다.
적대든 아니든.
그럼 라페르나를 알아볼 확률도 아주 높다고 가정해야 한다.
한마디로 내가 들고 있는 대부분의 능력을 숨기고 싸워야 하는데.
그냥 차포 다 떼고 붙으면 게임 자체가 안 된다.
아직은 귀찮지만.
조금은 돌아가야겠지.
<나르샤> 그래. 좀 있다가 봐.
시선을 잠시 거두자 나르샤 누나의 기척이 감옥 바깥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나도 파악하기 힘들 정도라니.
정말 괴물 같은 물건이네.
그런데 이 정도 수준의 영웅의 무기들을 가지고도 망해 버리는 이전의 제국은 대체 얼마나 엉망이었다는 걸까 싶기도 하고.
그때 덩치가 날 보면서 말했다.
“네가 감옥을 열었나?”
아.
덩치는 그런 착각을 할 법도 하네.
내가 말하기 무섭게 감옥이 열렸으니.
그런 덩치를 보면서 다소 여유 섞인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아, 내가 전에 말 안했던가? 내 소속이 궁금하지 않냐고.”
“역시…… 황실이었군.”
“뭐 좋을 대로 생각하고. 일단 난 나갈 생각인데…….”
그러면서 고개를 옆으로 슬쩍 흘리자 녀석의 시선이 열려진 창살에 닿았다.
그런데 의외로 녀석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흐음.
여기서 나가지 않을 생각인가?
당장 이 감옥 안에 있는 저 많은 죄수들은 지금 나와 덩치의 눈치를 보면서 나갈까 말까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그런 녀석을 보면서 살짝 말을 흘렸다.
“아마도…… 나가지 못하는 거려나?”
내 말에 녀석이 인상이 확 구겨졌다.
아마 속내를 들켰다는 건가.
그리고는 확신이 들었다.
“역시 넌 여기 있어야 하는 거구나. 저 녀석과 같이.”
가짜 레온 브라이더를 손가락을 가리키자 녀석도 이젠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곧 졌다는 듯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면서 녀석이 말했다.
“네 녀석이 어디 소속인지 몰라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을 거다.”
“그래? 그런데 그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 내 입은 비싼데 말이지.”
내가 바깥에서 이런 정보를 떠들고 다닐 일은 없겠지만.
저 녀석이 생각하는 건 다를 거다.
정확한 정체를 모르는 이상에야.
협박 반을 섞은 내 말에 한참을 노려보던 녀석이 이를 갈면서 물었다.
“젠장. 원하는 게 뭐냐?”
“이제야 이야기가 좀 되네.”
기브 앤 테이크.
내가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녀석 역시 내어주는 게 있어야 할 터.
다행히 상도덕은 아는 녀석이라 마음이 편해졌다.
만약 여기서 아무 정보도 얻지 못하고 나갔다면.
한참을 고생했을 텐데.
그 수고를 덜게 되었다.
녀석이 진실을 말하든.
거짓을 말하든.
어쨌든 진실에는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전 제국의 정보가 제법 있으니까.
대조를 해보면 답이 나오겠지.
슬쩍 감옥 바깥을 보면서 시간을 쟀다.
그리고 나르샤 누나에게도 연락이 왔다.
<나르샤> 너무 오래 시간을 끄는 건 안 돼. 곧 교대 병력이 들어올 거야.
<주호> 네, 금방 끝나요.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네요.
<나르샤> 다행이네. 저 앞에 녀석들 다 죽여야 하나 걱정했거든.
우리가 여기서 경비병들을 다 죽이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문제이긴 했다.
사라진 사람은 나뿐인데.
다 죽어 나가면 귀찮아지지.
그냥 나 하나 내빼는 것과 경비병을 죄다 죽이고 나가는 건 아무래도 갭이 크다.
나중에 수배라도 떨어지면 정말 귀찮아지니까.
시선을 돌려 덩치를 보면서 물었다.
“여기 있는 녀석들이 들어도 되나 모르겠네? 네 입장에서는 좀 귀찮아질 질문이라서.”
다른 말로 이 질문을 듣는다면 여기 있는 죄수들의 목을 전부 날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 죄수들이 전부 이 덩치 녀석과 같은 소속이 아니라면 말이지.
아마 이 덩치의 손에 죄다 죽을 수도 있었다.
녀석을 보며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정말 귀찮다는 식으로 말했다.
“딱히 죄수들을 걱정하는 건 아닌데.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
“음. 알겠다.”
녀석 역시도 여기서 얼마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일단 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은 듯 했다.
그리고 녀석이 신호를 하자마자 몇 녀석들이 일어나서 죄수들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역시 몇 놈은 이 녀석의 쫄따구였네.
어째 소란 없이 통제가 잘 된다 했다.
감옥이 제법 크기에 소리를 낮춘다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벌어지자 녀석이 내게 말했다.
“됐나?”
“나름. 아주 작정하고 들어 오셨구만. 그러니까 내 질문은 말이지…….”
그리고 이어지는 내 의외의 질문에 순간 덩치의 몸이 들썩였다.
내 질문이 그렇게 정곡이었나?
“너, 어디서 그 정보를……?”
“말했잖아. 내 배후가 궁금하지 않냐고.”
사실 그런 건 없긴 한데.
정상적으로 이야기해서는 아무래도 좀 꿀린단 말이지.
내가 예상하는.
이 녀석의 소속은.
생각 이상의 거물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 이 낚시에 걸려들 수밖에.
특히 오늘은.
꽤 재밌는 이벤트가 있는 날이기도 했다.
이전 에센시아 제국의 역사에서.
우리와는 당장 연관이 없기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역사 속의 한 페이지였지만.
이 녀석을 보자 어느 정도 퍼즐이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제국 역사서 낸 놈들은.
다 헛다리를 짚고 있었을지도.
눈앞에서 으르렁거리는 녀석을 보니 확신이 섰다.
아니라고 해도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고.
“그러니까 오늘 죽는 황자는 너네 그림이냐?”
* * * * *
하이딩 망토를 뒤집어쓰고는 인기척을 지운 채 지하 감옥의 복도를 쭉 걸어 나왔다.
마지막에는 정말 죽을 뻔했는데?
덩치 녀석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살기에 정말 무기를 꺼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녀석은 나를 노려보기만 할뿐.
일체의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얌전히 날 보내주었다.
경비병들의 동선은 나르샤 누나가 미리 파악해 주어서 쉽게 지하 감옥을 빠져나왔다.
이거 너무 허술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하긴.
당장 밖에서 긴급 소집령이 떨어진 판에.
이곳이 제대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완전히 감옥을 빠져나와 길거리에 숨어든 뒤 은신을 풀었다.
“흐음. 이거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린 거려나.”
그때 내 혼잣말에 바로 옆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문제 있어?”
“아, 누나. 깜짝 놀랐어요.”
“다 알고 있으면서.”
역시 나르샤 누나의 은신이 스르륵 풀리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감각으로 접근한다는 건 알고 있긴 했는데.
조금만 긴장을 풀면 고생할지도.
스킬이 아니면 파악하긴 꽤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잘 됐고?”
“네, 뭐 적당히 뒷걸음치다가 소를 밟아버렸네요.”
“으음. 그 말 거꾸로 된 거 어냐?”
“그만큼 대어를 잡았다는 거죠.”
“대어?”
“네, 녀석 뒤에 있는 게 꽤나 거물이에요. 그것도 제국 내에서 최상단에 자리 잡은 녀석들 같고요.”
“그래?”
솔직히 덩치가 내 마지막 질문에 반응을 안 했으면.
이런 판단을 내리지 못 했을 터.
처음에는 그냥 레온 브라이더의 행방을 찾기 위해 적당히 하다가 나오려고 했는데.
이젠 딱히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나와 덩치의 대화 내용을 궁금해하는 나르샤 누나를 보면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누나. 아무래도 우리. 에센시아 제국의 황위 다툼 속에 들어온 것 같아요.”
그것도 황족 살해 사건의 중심 속으로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