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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029화 (1,017/1,404)
  • #1029화 에센시아 제국 (8)

    덩치에게서 마족이라는 말이 나오자 지하 감옥 안에 있던 모든 죄수들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그런 시선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들.

    그건 공포심이었다.

    어떤 이에게선 분노도 보였고.

    하지만 하나같이 적의에 가까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긴.

    에센시아 제국성은 현재 마족들하고 전쟁 중이었지.

    우리가 제국성에 접근했을 때도 동향 병사가 가장 먼저 마인인지부터 확인했었다.

    그만큼 이들에게 있어서 마족이라는 존재는 위협적이고 적대적인 존재인 것이다.

    당연히 지금 덩치가 마족을 언급하자 이들도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그나저나 천사와 황실까지는 같은 진영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마족을 언급하는 건 무슨 뜻이지?

    그러다가 하나의 가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마족? 설마 제국성 내에 마족이라도 들어와 있는 건가?”

    이건 내 순수한 가정이었다.

    거의 넘겨짚는 수준의.

    그런데 오히려 덩치가 내가 던진 말에 몸을 움찔했다.

    하.

    이건 대놓고 인정하는 것 같은데.

    지금 지하 감옥의 어둠 속에서 덩치의 표정이 어느 정도 감추어져 있어 확신할 순 없지만.

    꽤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방금 자기 입으로 마족을 말해놓고는 모른다니.

    그리곤 바로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저 행동은 아예 대놓고 맞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치밀한 녀석은 아닌 듯한데…….

    대체 이 덩치 녀석과 레온 브라이더 사이에는 무슨 연관이 있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를 아무리 떠올려 봐도 레온 브라이더와의 관계를 유추하지 못하겠다.

    그렇다고 무력으로 눌러서 물어보자니 지하 감옥의 환경이 여의치 않았고.

    후.

    정말 한판 떠봐야 하나?

    저렇게 숨기는 이상 그냥 대놓고는 말해주지 않을 듯한데.

    녀석을 쳐다보다가 재중이 형에게 연락을 넣었다.

    <주호> 형, 혹시 마족이 지금 에센시아 제국성에 들어와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불멸> 마족? 흐음…… 마족이라……. 그 녀석이 그렇게 말해?

    <주호> 아뇨. 직접 대놓고 말한 건 아닌데. 말하는 뉘앙스를 봐서는 에센시아 제국성에 마족이 침투해 있는 것처럼 말하네요.

    <불멸> 한번 알아보지. 거기 상황은 어때?

    <주호> 음. 달려들거나 하진 않고 있어요. 다들 좀 적대적인 것만 빼면요.

    <불멸> 좋은 소식은 아니군. 레온 브라이더는 물 건너갔고?

    <주호> 네, 이 녀석은 일단 아니에요.

    아무리 봐도 저기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녀석은 레온 브라이더가 아니다.

    영웅에 대한 그 어떤 향기도 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저 덩치가 더 영웅에 가깝지.

    휴.

    재중이 형이 준비해 줄 때까지는 좀 시간이 걸릴 듯하고…….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볼까?

    어차피 이곳에 있어 봐야 시간만 죽이는 셈이니.

    덩치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최대한 얻어가야 했다.

    일단은 살짝 떠볼까.

    “진짜 레온 브라이더는 어디에 있지?”

    이젠 저기 찌그러져 있는 녀석이 진짜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덩치 녀석이나 나나 진짜가 아니라는 건 잘 아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이 녀석이 레온 브라이더다.”

    하지만 녀석은 끝까지 시치미를 뗄 생각인 듯 내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았다.

    뭐 어차피 큰 기대도 하진 않았다.

    이러면 여기서 조금만 더 정보를 풀어 볼까?

    “하하. 네가 보기엔 저 녀석이 영웅 후보처럼 보이냐?”

    일단 영웅 후보.

    레온 브라이더는 명실상부한 최강의 영웅인 7 영웅 중에 하나다.

    시작점이 아무리 미미하다고 해도 저런 상태는 아니지.

    조만간 수면 위로 올라온다면 적어도 지금쯤은 누가 봐도 영웅 후보쯤 되는 분위기를 낼 터.

    내가 꺼낸 영웅 후보라는 말에 녀석의 눈빛이 확연히 변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매섭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건 적대감인가?

    아냐.

    달라.

    오히려 경계심에 가까운.

    딱 그런 느낌이다.

    이 이상 넘어오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야수 특유의 경계심.

    “네 녀석. 뭘 알고 있는 거냐.”

    결국 녀석이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더 큰 녀석이었네.

    거기다 남들 머리통만 한 크기의 우람한 팔뚝만 봐도 일반 NPC와는 이미 격차가 아득히 벌어져 있었다.

    그냥 대충 봐도 이건 영웅의 느낌이 풀풀 난다.

    “뭐…… 저 녀석이 레온 브라이더가 아닌 위장 같다는 사실 정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레온 브라이더가 아닌데.

    내게는 레온 브라이더라고 뜬다면.

    가능성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정체 위장.

    유저들이야 아이디 위장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NPC들은 그런 것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예전에 재중이 형에게 들었던 것들 중에 하나.

    필요하다면 NPC도 정체 위장이 가능하다.

    바로 시민증을 갈아치운다면.

    이곳 에센시아 제국성에 상주하는 NPC들에게 발급하는 신분증이나 같은 명패.

    그걸 바꿔치기 한다면 얼마든지 아이디 위장이 가능했다.

    대부분의 평범한 성향의 NPC들은 그게 중범죄라 하지 않을 뿐이지.

    만약 조금만 성향이 다르다면 아예 못할 것도 아니었다.

    지금처럼.

    이곳 지하 감옥에 갇힌 범죄자들이라던가.

    내게서 나온 위장이라는 말에 이번에도 녀석이 반응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아니, 잘 알겠지. 보아하니 저 녀석 혼자서 한 건 아닌 모양이고. 원래의 레온 브라이더를 잘 아는 녀석이 도와준 것 같으니까.”

    잠시 녀석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게 바로 덩치 너일 테고 말이야.”

    진짜 레온 브라이더를 모른다면 덩치가 보여주는 지금 같은 반응들이 나올 수가 없었다.

    최소한 레온 브라이더가 어떤 녀석인지 알아야.

    저렇게 반응할 수 있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걸리던 점 하나.

    “뭐 사실 레온 브라이더가 실존 인물인지조차 모르겠기는 해. 혹시 레온 브라이더 자체가 누군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려나?”

    이것 역시도 내 가정이었다.

    그간 우리 팀과 함께 조사한 정보들 중.

    몇 가지 앞뒤가 맞지 않는 정보들이 존재했다.

    영웅인 레온 브라이더의 최초 등장 시기가 애매하다든가.

    혹은 매번 등장마다 보이는 무위의 상태가 다른다든가 하는.

    어떨 때는 마왕군을 압살하는 실력을 보였다가도.

    다른 때는 마족 하나에 빌빌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거의 극과 극에 가까운 실력 차이는.

    단순히 정보가 구멍이 많다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역사에 나오는 모든 정보를 싹 뒤져보지 않았다면.

    절대 모를 만한.

    조그마한 함정들.

    그러니까 계속 마음에 걸렸던 거다.

    7 영웅 중에 하나였던.

    레온 브라이더가.

    실존 인물이 아닐 확률.

    아니면.

    존재는 하는데, 그게 여러 명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냥 처음부터 위장된 인물일 수도 있었다.

    그런 사실을 이전까지는 흘러가는 생각 정도로만 여겼는데.

    지금 이 지하 감옥에서.

    내 눈으로 직접.

    이상하리만큼 약해빠진 레온 브라이더를 본 순간.

    어느 정도 확신으로 굳어졌다.

    레온 브라이더는.

    그냥 위장이다.

    진짜는 따로 있다.

    허구의 인물.

    아예 작정하고 만들어낸.

    누군가가 필요에 의해 등장시킨.

    역사의 허점.

    문제는 그 누군가가 누구냐는 건데…….

    굳이 이렇게 허위의 영웅으로 위장할 필요가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정체 위장이라는 말에 이미 가짜 레온 브라이더는 표정이 까맣게 죽어 있었다.

    “너. 명패 위조는 중범죄인 건 알고 있겠지?”

    내 말에 레온 브라이더였던 녀석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확실하네.

    여긴 더 안 물어봐도 알겠고.

    그리고는 덩치를 바라보면서 느긋한 어투로 말했다.

    “어이, 덩치. 바로 간수들 불러다가 한번 조사 좀 시켜볼까? 이 녀석의 정체에 대해서?”

    내 말에 덩치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아무래도 이 녀석.

    지금 반응을 보면 여기서 위장하는 걸 도와주려고 온 것 같기도 한데.

    무엇보다.

    이 정도의 고급 인력을 고작 위장하는 데 쓰다니.

    그것도 지하 감옥에 들어오는 짓까지 해가면서 말이야.

    나야 레온 브라이더를 만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미친 짓을 강행했지만.

    보통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NPC들은 몇 없다.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먼가가 떠오르자 녀석에게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아하. 그러니까 레온 브라이더라는 녀석이 반드시 지하 감옥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구나? 길진 않겠지만. 잠시 누군가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라던가 말이야.”

    보여주기식 위장.

    어차피 아무도 관심이 없고 못 알아본다고 치면.

    굳이 이렇게까지 위장에 공을 들일 필요는 없었다.

    뭐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혹은 저 가짜 레온 브라이더를 직접 눈으로 보기만 하면.

    바로 가짜라는 걸 알 텐데…….

    그렇다는 말은.

    결국.

    레온 브라이더라는 작자를 눈으로 볼 정도로 여유가 없다던가.

    아니면 굳이 귀찮게 보러 오지 않을 정도의 꽤 높은 직위를 가졌던가 정도…….

    아마도 단순 확인만 필요한 수준?

    생각은 계속 꼬리를 이어 덩치 녀석에게 전달되었다.

    이건 너무 긁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녀석의 입을 열기 위해서는.

    이 정도까지 녀석을 몰아붙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서류상으로…… 보여질 필요가 있는 거겠지. 레온 브라이더가 감옥에 있다는 사실 말이야.”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건…… 진짜 레온 브라이더가 몰래 활동을 해야 하는데 그사이의 알리바이를 만들어 준 녀석이 있다는 거군? 그것도…… 꽤 높으신 분이겠군, 아마? 너 같은 강한 녀석을 단순히 이런 작업에 투입한 걸 보면 말이야. 음…… 최소한 황실에서 직위가 꽤 높은……?”

    그런데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덩치에게서 엄청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듯.

    강렬할 기세를 내뿜으며 녀석의 두 주먹에서 화염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너는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버렸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죽어 줘야겠군.”

    이런.

    너무 건드렸나?

    하지만 이로써 확실해졌다.

    내가 말했던 사실들이.

    거의 진실에 근접해 있던 거라는 걸.

    휴.

    대충 짚듯이 말했지만.

    설마 진짜 황실과 연관되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쩌면 방금의 발언으로 너무 큰 판에 갑자기 끼어들게 됐을 수도 있었다.

    “너, 진짜 내가 누군지 안 궁금하나?”

    내 말에 덩치가 잠시 움찔했다.

    녀석 입장에서도 내가 궁금한 건 마찬가지일 거다.

    갑자기 지하 감옥에 튀어나와서는 레온 브라이더의 정체를 까발리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하고 있던 일을 대부분 밝혀 버렸으니까.

    녀석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겠지.

    그러니까.

    날 죽이기 전에.

    녀석은 내 정체를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한마디로.

    날 여기서 막 죽이지는 못한다는 거다.

    그렇다고 내가 대놓고 죽어 주지도 않을 거고.

    지금 필요한 건.

    조금의 시간이다.

    “하. 그건 죽이고 나중에 알면 되겠지.”

    “내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면 그런 말을 못 할 텐데?”

    내 말에 녀석이 다시 움찔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역시 이 녀석.

    머리가 아니었어.

    명령이 없으면 확실히 행동할 수가 없다.

    그건 누군가 판을 짜준 녀석이 따로 있다는 거다.

    누군지 알아내야 할 텐데.

    그때 갑자기 지하 감옥 창살의 자물쇠가 툭 열리는 소리가 났다.

    드디어 왔나?

    “타임 오버네. 그럼 다음에 이야기해 보자고? 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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