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1화 마왕의 핵 (9)
시아트 마왕성 지하에서 마왕 바이카르를 마주한 순간.
솔직히 마신의 파편을 얻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마왕 바이카르라는 녀석은 뜬금없이 내게 마신의 파편을 던져 주었다.
마신의 파편을 받아낸 손바닥이 타오를 것처럼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줄려면 좀 쉽게 줄 것이지.
굳이 이렇게 받기 힘들게 집어던진 건 아마도 저 녀석의 심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뭐 얼떨결에 마신의 파편이 손에 들어오긴 했는데…….
문제는 이걸 준 녀석의 의도가 확실하지 않다는 데 있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재중이 형을 보자 재중이 형도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불멸> 그게 먹고 탈나는 물건만 아니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런 재중이 형의 우려 섞인 말에 곧 쓴웃음을 지었다.
<불멸> 자고로 세상에 공짜라는 건 없는 법이지.
<주호> 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마신의 파편을 현금이나 다른 자원에 비교해보면 어떨까.
어쩌면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그런 물건일 수도 있었다.
우리도 운이 좋아서 베르테니아 마왕성에서 마신의 파편을 얻은 거지.
현실적으로 유저들만의 힘으로 마왕을 잡고 마왕성을 차지해 마신의 파편을 얻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유저들이 어지간한 고렙 몬스터 정도는 씹어먹을 정도로 엄청나게 성장한 아주 나중에라면 또 모를까.
한마디로 이 마신의 파편을 그냥 넘겨주는 일은…….
아무리 마왕 바이카르라고 해도.
엄청난 출혈을 감수한 셈이 된다.
뭐 마신의 파편이 마왕 바이카르에게 별 유의미한 가치가 없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만약 마왕 바이카르가 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면.
지금 굳이 이 마왕성에 직접 행차해 저 마신의 파편을 수거하진 않았을 것이다.
표정을 굳힌 채 녀석을 향해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마왕 바이카르?”
우리를 죽이는 것도 아니야.
그렇다고 적대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마신의 파편을 넘겨주기까지.
내가 저 녀석의 입장이었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다.
그런 내게 마왕 바이카르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말했던 것 같은데?”
낮고 작지만 지하 공동 전체를 중후하게 울리는 착 가라앉은 음성에 순간 소름이 끼쳤다.
이거 아마도 더 묻지 말라는 뜻이려나?
정확한 의도가 먼지는 모르겠지만.
기회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대체 마신의 파편을 우리가 가지는 것과 기회라는 것이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는 거지?
물론 이 마신의 파편을 가지면.
분명히 전력이 한층 올라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단순히 기회라는 말과 엮기는 너무 많은 부분에서 구멍이 존재했다.
굳이 캐묻지 말라는 걸 물어봐야 이쪽이 손해이려나.
<주호> 형, 어떻게 할까요?
<불멸> 글쎄. 녀석이 우리에게 딱히 적대적인 것 같지도 않고. 지금 이대로 빠지면 우리야 좋긴 한데.
재중이 형 역시도 찝찝한 부분이 있는지 쉽게 발걸음을 떼진 못했다.
화련도 마왕 바이카르는 보면서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고.
아마 나름대로 분석을 하고 있는 중이려나.
“내가 이걸 가지고 뭘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이냐?”
내 물음에 마왕 바이카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좋을 대로.”
흐음.
그럼 아주 조금만 더 건드려 볼까?
지금 상태로 봐선 녀석이 갑자기 태도를 돌변할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만약 이걸로 네 진영의 마왕들을 죽인다고 해도?”
그 말을 하는 나를 마왕 바이카르가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곧 말을 꺼냈다.
“죽일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겠군.”
지금 재미라고 한 건가?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 녀석은.
“아니면 내가 상대 진영의 마왕들을 죽여주길 바라는 건가?”
“딱히 상관없다.”
상관없다라…….
무슨 대답이 이런지 모르겠다.
솔직히 뭔가의 퀘스트라도 뜰 줄 알았는데.
그렇다는 건 원래의 시스템에 없는 이 녀석의 단순한 변덕에 의한 진행이라는 말이 된다.
만약 정해진 툴이 있었다면.
벌써 우리에게 퀘스트가 떴을 테니까.
운영자의 의도와는 다른 돌발 상황이 아마 이런 거겠지.
다른 말로.
지금 마신의 파편을 우리가 먹고 째도.
아무런 페널티가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다가 아주 예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가르시아 제국 시절.
녀석이 통제가 안 되는 아이템들을 NPC들에게 쥐어준 전력이 있긴 한데.
마족화를 할 수 있는 아이템.
혹시 이것도 그런 일들의 연장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역시 찝찝한 기분은 어쩔 수 없네.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결론을 내렸다.
“좋아. 네 의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울려 주도록 하지.”
냅다 던져주고 마음대로 하라는데.
딱히 문제도 없어 보이고.
나중에 뭔가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이건 못 먹어도 고다.
아니.
이미 챙겼으니 무조건 갈 수밖에 없다.
내가 순순히 결정을 내리자 마왕 바이카르가 만족스럽다는 듯 아주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낙관적으로만 생각하면 이걸로 마계에서 깽판 치고 다니라는 의도일지도 모르고.
만약 정말 그런 의도라면.
이 녀석은 단단히 미친놈임이 틀림없었다.
적에게 무기를 쥐어주고 피아식별 없이 깽판 치라는 소리니까.
뭐 그런 깽판이라면.
이쪽에서 얼마든지 환영이다.
어차피 잡아야 할 놈들이 천지라.
그런데 그때.
갑자기 시아트 마왕성 지하 공동 전체가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건…….
무의식적으로 새로 얻은 마신의 파편을 인벤에 집어넣은 뒤 고개를 돌리자 지하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뭔가의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강한 진동이 바닥을 타고 공동을 울리기까지 했고.
그걸 느낀 화련이 바로 인상을 구겼다.
“아씨, 이번엔 또 뭐야?”
재중이 형 역시도 상황을 파악했는지 표정을 굳혔다.
<불멸> 아마 마왕 스티어를 따라갔던 녀석들이 돌아온 모양이다.
나와 재중이 형은 그 대략적인 느낌만으로도 어떤 녀석들인지 확인은 가능했다.
<주호> 벌써 잡힌 걸까요?
이건 마왕 스티어를 말하는 거고.
<불멸> 어쩌면 놓쳤을 수도 있겠지. 그 녀석 그림자 계열이잖아.
이전에 마왕 올펠의 발목을 잡았을 때도 그런 형태의 스킬을 썼었다.
애초에 형태 자체가 그러니.
잡히지 않았다면 뭔가의 탈출 스킬이 있지 않았을까.
그게 아니면 이미 잡혀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아깝긴 한데.
마왕 스티어를 내가 죽일 수 있으면 그 특성을 가져올 수 있을 텐데.
좀 아쉬운 기분이 들긴 했다.
얼마 뒤 계단으로 몇몇이 걸어 내려왔다.
선두는.
마왕 데미안인가.
멀리서부터 강렬한 냉기를 풀풀 풍기면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니 이미 여기 누가 있는지는 잘 아는 모양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또 다른 마왕들.
전부 다 돌아오긴 했는데.
아직은 마왕 스티어가 잡혔는지는 확실하진 않았다.
“마왕 바이카르. 네 녀석이 여긴 어떻게……!”
마계 경매장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꽤 냉랭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중립 지역은 아니니까.
언제라도 전투가 벌어질 수 있을 지역이기도 하고.
편안히 이야기나 나눌 장소는 아니지.
가뜩이나 마왕 스티어가 마왕 바이카르의 명을 받아서 마왕 올펠을 죽였다고 여기는 중인데.
심지어 천계의 힘을 가져다 썼다는 오해까지 덤으로 얹고.
그때 잠시 흠칫했다.
아까 마왕 바이카르는 분명 내가 마왕 올펠을 죽였다고 하지 않았나?
아주 콕 집어서 말했으니 떠보는 것도 아닐 거고.
혹시 마왕 바이카르 이 녀석.
내가 진짜 대천사의 검을 가진 것까지 아는 것 아냐?
그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알았다면 벌써 녀석이 날 공격했을 수도 있었다.
녀석에게도 대천사의 검은 분명히 위협이 될 테니.
이건 아닐 확률이 더 높겠지.
하지만 만약 알고도 모른 척한 거라면.
생각 이상으로 미친놈일 수도 있고.
그런 생각들은 마왕 바이카르의 한마디 말에 깨졌다.
“못 올 곳을 온 건 아닐 텐데?”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마왕 데미안이 의심하듯 자신 휘하의 부하가 당해서 와봤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아니면 마왕 올펠처럼 천계의 기운이 느껴져서 들렸다던가.
또 마왕 데미안이 온 곳인데 나라고 못 올 이유는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하고.
생각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말이었다.
그런 태연한 태도에 마왕 데미안에게서 어둡고 짙은 기운이 넘실넘실 흘러나왔다.
애써 참는 듯한 느낌이 드는.
“네 녀석. 천계와 손을 잡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진 않을 텐데?”
그런 마왕 데미안의 말에 마왕 바이카르가 코웃음 쳤다.
“널 상대로? 굳이 내가?”
“이 새끼가……!”
도발이면서도 확실히 선을 그었다.
천계와 손을 잡을 필요도 없다는 걸.
물론 그 말은 마왕 데미안을 화나게 만들긴 충분했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건 마왕 스티어가 단독으로 천계와 손을 잡았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지하 공동을 폭사할 것만 같던 마왕 데미안의 기운이 조용히 갈무리되는 것도 이와 동시였다.
“천계 새끼들만 아니면 벌써 널 찢어 죽였을 거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군.”
연이은 도발이지만 거기에 마왕 데미안은 어울려 주진 않았다.
아마 둘이 정면으로 붙으면 마계가 절반으로 갈라질 확률이 아주 높겠지.
“마왕 올펠이 여기서 죽었다. 천계의 힘을 빌린 마왕 스티어에 의해서.”
따지듯 사실을 말하는 마왕 데미안의 말에 마왕 바이카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한 대답이 나왔다.
“그렇군.”
“그리고 지금 그 녀석은 도망 중이지.”
마치 마왕 스티어 녀석을 잡아서 꼭 입을 벌리게 하겠다는 각오가 보이는 듯했다.
역시 녀석을 놓친 거려나?
만약 마왕 스티어를 잡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 끌고 왔을 테니까.
녀석이 보이지 않는 순간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그리고 잡아온다고 해도 마왕 스티어는 애초에 마왕 바이카르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뭐 강제로 입을 불게 하는 방법도 있긴 하겠지만.
혹여나 녀석이 마왕 바이카르의 소행이라고 하면.
마왕 바이카르 휘하의 마왕들이 이탈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했다.
하지만 마왕 바이카르는 그런 일들에 별로 개의치 않은 모습이었다.
지금도 꽤 나른하게 보이는 표정을 보면.
그런 태연한 모습에 마왕 데미안도 혼란이 오는 듯했다.
“마왕 스티어는 우리가 잡을 거다.”
저건 한마디로 녀석에게 따로 도움을 주지 말라는 뜻이었다.
“어차피 그럴 생각 아니었나?”
“녀석을 숨겨주거나 하진 않겠지?”
“귀찮게.”
귀찮다는 말로 일축한 마왕 바이카르를 본 마왕 데미안은 곧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감정과는 달리 공적인 이야기를.
“마왕 자리에 공석이 생겼다. 그것도 두 자리나.”
하나는 죽은 마왕 올펠의 자리.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금 도망 다니는 마왕 스티어의 자리.
마왕 데미안의 세력에 찍혀 버린 데다가 마왕 바이카르는 그걸 묵인하는 상태였다.
이미 마왕으로서 입지는 사라졌다고 봐야 했다.
“그런가.”
“너도 알다시피 마왕의 수가 줄어들면 천계와의 균형이 깨지게 된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마왕 올펠이 죽은 만큼 새 마왕을 내 선에서 뽑고 싶은데.”
한마디로 자기 세력을 새로운 마왕 자리에 집어넣겠다는 말이었다.
“마왕 올펠의 마왕성을 네가 흡수하는 걸 인정하라는 뜻이겠군.”
그것도 마왕성 하나를 통째로 가져가면서.
마왕 데미안의 말에 녀석을 쳐다보던 마왕 바이카르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대로.”
그런데 그때.
마왕 바이카르가 전혀 뜻밖의 말을 꺼내었다.
“그럼 다른 마왕은 내가 고르기로 하지. 어차피 중립에 최하위니까 상관없겠지?”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법.
마왕 데미안이 마왕 바이카르의 말에 수긍했다.
“좋아. 그래도 후보가 누군진 알려줬으면 하는데?”
그런 마왕 데미안의 말에 마왕 바이카르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그것도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어?
저 녀석.
지금 뭐하자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