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2화 대천사의 가호 (17)
어떠한 촉이라고 해야 하나?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한 준비.
그건 아마 본능적인 영역일 것이다.
마왕 올펠이 혼신을 다한 그랜드 크로스에 맞아 대전에서 튕겨 나갔을 때.
그리고 마왕 스티어와 재중이 형, 전신이 그런 마왕 올펠을 쫓아갔을 때도.
뭔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속에서 간질간질하는 딱 그런 느낌?
그날 해야 할 일을 미처 다 마치지 못한 채 어설프게 남겨놓고 퇴근하는 딱 그 정도의 불안감.
다음 날 시달릴 것을 알면서도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속에 두고 흐릿한 기분으로 있는 느낌은 참 불편하다.
그런데 지금.
그 불편함의 정체가 눈앞에 떡하니 다시 나타났다.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일거리.
지금은 그 일을 확실히 끝맺어야 할 때다.
솔직히 이 녀석이 다시 이 대전에 돌아올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만약 내가 그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면 일단 자리를 피하고 회복한 뒤 다시 전투를 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 마왕 올펠은 어지간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모양이었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그리고 그런 마왕 올펠의 성향은 내게 기회를 주었다.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
시간의 서로 르아 카르테와 대천사의 검 라페르나의 그랜드 크로스 스킬이 활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녀석을 향해 스킬을 시전했다.
【 시간의 서! 】
【 그랜드 크로스! 】
마왕 올펠은 내가 그랜드 크로스를 다시 시전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지 내 정면으로 달려들다가 경악한 표정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정말 당황 가득한 고함을 질러댔다.
“젠장할~!!”
그런 마왕 올펠의 모습을 보고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설마하니 내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여기 머물러 있었다고 생각한 거였나?
마음 한구석에 녀석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화련과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계속 물약을 들이켰었다.
거기다 마왕 올펠이 전투 지역에서 멀어져서 그런지 마력도 자연회복 상태로 돌아가 빠르게 차올랐고.
한마디로.
녀석이 대전에 들어서기도 전에 이미 그랜드 크로스를 다시 쓸 만큼의 체력과 마력은 돌아와 있었다.
문제는.
풀 차징이 아닌 즉발로 날리는 그랜드 크로스가 녀석에게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 것인지는 나도 의문이지만.
지금의 녀석의 당황한 반응을 보면.
아무래도 내가 너무 큰 걱정을 했던 모양이다.
이전의 그랜드 크로스와는 달리 확연히 약해졌지만, 빛의 십자가가 녀석의 몸을 다시 한 번 불태우며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마왕의 최종형태로 변한 화염을 뿜어내는 흑색의 철갑의 늑대는 그런 성화의 빛에 타들어 가면서 연이어 폭발했다.
화아아악!!
콰아아아앙!!
쿠아아앙!!
결국 마왕의 마기를 통째로 찢어내며 녀석의 철갑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며 갑주를 녹여냈고.
이내 녹아 버린 갑주 너머로 녀석의 본체를 그대로 타격해냈다.
파아아아!!
촤아아악!!
동시에 온몸에서 처절한 피분수가 터져 나오면서 마왕 올펠이 통째로 성화에 불타올랐다.
“크아아악!!”
다시 대전의 벽에 몸채로 처박힌 녀석이 더없이 괴로운 비명을 연이어 질러댔다.
계속 피어오르는 성화의 폭발 사이에서 마왕 올펠의 눈길은 악을 쓰듯 여전히 나를 노려보았다.
“쿨럭!! 이 새끼!! 찢어 죽여 버릴 테다!!”
어쩌면.
녀석이 대전에 돌아왔을 때 내게 바로 달려들지 않고 간을 보면서 내 약점을 찾아 날 압박했다면.
결과는 지금과는 좀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꽤 회복이 됐다고는 해도.
완전한 상태는 절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녀석이 한 번에 승부를 걸 듯 달려 들어준 덕분에.
나 역시 내가 준비한 패를 확실히 녀석에게 박아 넣을 수 있었다.
더 이상은 일어날 힘이 없는지 녀석이 비척거리다가 다시 제자리에서 쓰러졌다.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그랜드 크로스는 대천사의 최종 스킬이다.
그걸 정면에서 받아냈으니.
거기다 녀석은 이미 마왕 스티어와 그 부하들 그리고 재중이 형과 전신의 합격으로 피해를 많이 본 상태였다.
만약 이 중에 하나의 요소라도 부족했다면 당한 건 내가 됐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내가 이 자리를 피했겠지.
난 마왕 올펠이 날 죽이려는 것만큼 녀석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으니까.
녀석의 그 작은 욕심이.
돌아가기 전에 날 죽이려는 그 한 번의 실수가.
결국 최악의 선택이 되어 버렸다.
곧장 바닥에 떨어진 물약을 하나 집어 들어 삼키자 체력이 쭉 차올랐다.
그랜드 크로스 같은 최종 스킬은 이게 문제다.
한 번 쓰면 정말 체력이고 마력이고 할 것 없이 죄다 바닥을 긁어버린다는 것.
그나마 녀석이 저기 처박혀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지금쯤 내 목이 날아갔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화련이 옆에 있으니 잠시나마 시간은 벌 수 있었겠지만.
화련이 날 보고는 말했다.
“아주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네?”
“뭐 그런 셈이죠.”
애초에 마왕 올펠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순간 바로 튀었어야 정상이지만.
그러지 않는 날 보면서 화련도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벽에 처박혀 쓰러져 있는 거대한 철갑 늑대를 보며 화련이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화련이 물어보고자 하는 바는 확실했다.
여기서 내가 조금만 손을 쓰면.
마왕 올펠은 확실히 죽을 것이다.
“다른 마왕들 말이죠?”
“그래.”
“혹시 쫄았어요?”
내 농담 섞인 말에 화련이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죽을래?”
“하하…… 지금은 정말 무서운 말이네요.”
솔직히 지금 상태라면 화련이 날 한 대만 쳐도 정말 죽을 지도 모르겠다.
“이 녀석을 여기서 죽이면 그때부터는 저쪽 마왕 세력들하고 바로 전쟁이야.”
나도 안다.
마왕 올펠이 소속되어 있는 세력이 있다는 걸.
전에 마계 경매장에서 본 정보에도 분명히 그런 내용들이 있었다.
아까만 해도 녀석과 다른 세력을 갈라놓으려고 했는데.
이 녀석이 워낙 미친놈이라…….
우리마저 죽이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았고.
“안 죽인다고 저 녀석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하긴 그건 그래.”
화련도 내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마왕 올펠과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아니 애초에.
이 녀석 때문에 우리 연합과 길드들이 고생한 걸 생각해보면 여기서 죽이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마왕 올펠만 아니었다면 전신이나 다른 녀석들이 세력을 키울 때 손가락 놓고 구경만 하지도 않았을 테고.
저놈 성격에 앞으로 가만히 있을 거라는 건.
너무 장밋빛 생각일 뿐이다.
곧장 르아 카르테와 라페르나를 들어 녀석에게 걸어갔다.
내 발자국이 점점 녀석에게 가까워질수록 마왕 올펠이 눈길이 더 사납게 변했다.
회복할 시간?
여유?
그런 건 절대 없다.
마왕이라는 녀석들에게 어떤 수가 남아있을지 알고.
내가 성큼성큼 다가가 검을 들어 올리자 녀석이 내게 외쳤다.
“여기서 날 죽이면 넌 마계 어디에서도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아아, 그래.”
“그러니까…….”
“그래서 뭐?”
아무렇지도 않고 웃으면서 바로 르아 카르테와 라페르나에 오러를 불러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녀석의 부서진 철갑 갑주 사이로 두 개의 검을 세차게 박아넣었다.
푸우욱!!
“끄아아악!!”
아마 저 변형이 되는 철갑 갑주는 상상 이상으로 방어력이 강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단단한 갑주가 있다는 건 반대로 그만큼 안쪽은 약하다는 말이 된다.
모든 것이 완벽한 존재는 로스트 스카이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왜? 이번에 내가 죽이지 않으면 다시 와서 날 죽이려고?”
푸우욱!!
푸욱!!
촤아악!!
현재 르아 카르테와 라페르나에 내장된 강력한 스킬은 그랜드 크로스 정도가 다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렇게 타격을 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한 번 공격을 넣을 때마다 녀석이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역시 라페르나 덕분이려나?
대천사의 검은 악 성향의 존재에 대해 추가 대미지가 상상을 초월한다.
거기다 지금 공격들은 평타이긴 해도.
전부 녀석의 본체를 파고드는 치명타였다.
굳이 스킬이 아니라고 해도 폭발적인 대미지 상승이 가능하다는 거지.
계속해서 피를 뿜어내는 마왕 올펠의 본체가 축 늘어지며 녀석이 정말 다급한 듯 외쳤다.
“그, 그만!!!”
“넌 우리 애들 괴롭히고 다닐 때 그만뒀냐?”
사냥터에 쫓아다니는 건 예사고.
심심할 때마다 와서 뒤집어놓고 죽이고 다니던 녀석이었다.
내 말에 녀석이 움찔했다.
그러자 마왕 올펠이 다시 흥정을 걸어왔다.
“젠장! 내 마왕성에 있는 재물을 전부 넘겨주겠다!! 네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그런 아이템들이 있단 말이다. 마계의 역사를 자랑하는……!”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
이건…….
솔직히 좀 땡기긴 하는데?
아주 잠시지만 녀석의 목숨과 마왕성에 가득할 재화와 아이템들이 머릿속에서 저울질되었다.
그러다 피식 웃으면서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와, 아주 잠시지만. 혹했다.”
내 말의 뜻을 알아들은 녀석의 안색이 확 죽어버렸다.
이게 그렇게 강력하던 마왕에게서 나오는 표정이라니.
그런 녀석을 보고는 비웃듯이 말했다.
“너 바보 아냐? 어차피 널 죽이면 그거 다 내 껀데. 뭐 하러 널 살려 주냐?”
오히려 살려두면 더 문제지.
언제 들고 튈지도 모르고.
“덕분에 마왕성을 가져야 할 이유가 더 늘었어.”
재물이 그렇게 많다면야.
즐거움이 두 배가 될 뿐이다.
웃음이 교차하는 차가운 표정과 함께 르아 카르테와 라페르나를 들어올렸다.
정말 다급해진 녀석에게서 또 다른 말이 나왔다.
“날 죽이면 숨겨진 마왕성의 재물은 절대로 얻지 못할 것이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어, 그래. 그건 그냥 버리지 뭐.”
“뭐라고?”
“어차피 없어도 상관없어.”
내 대답이 너무 의외였는지 녀석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결국 마지막은 폭언으로 이어졌다.
“젠장! 널 평생 저주하겠다!”
“마음대로 하시던가.”
그때 인벤에서 뭔가가 웅웅 하고 울었다.
이건.
그리곤 바로 르아 카르테를 집어넣고 하나의 아이템을 꺼냈다.
마신의 파편.
테르타로스.
“와. 이건 진짜 고민되네.”
설마 여기서 테르타로스가 반응할 줄이야.
사냥한 몬스터의 성질을 가져오는 마신의 파편의 능력.
그리고 지금 눈앞에는.
무려 다 죽어가는 마왕이 있었다.
옆에서 화련이 물었다.
“왜? 갑자기 그건 왜 꺼내?”
“아…… 행복한 고민 중이에요.”
마왕을 죽여서 드랍된 템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저 마왕 올펠의 스펙을 테르타로스에 흡수시킬 것인가.
테르타로스로 흡수시키면 드랍템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건 둘 다 딱 한 번밖에 없는.
다시 선택할 수 없는 기회였다.
아이템을 얻으면.
테르타로스의 스펙 업은 포기해야 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마왕을 죽였을 때 얼마나 좋은 아이템과 스킬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직 아무도 죽여본 적이 없으니.
정말 미친 생각도 못 한 아이템이 나올 확률이 아주 높았다.
마왕을 흡수한 테르타로스가 얼마나 성장할지도 모르고.
둘 중 하나를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다.
하지만.
선택할 수밖에 없다.
살면서 이 정도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선택을 하게 될 줄이야.
한참을 저울질하다가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면서 테르타로스와 라페르나를 동시에 들어올렸다.
“내 선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