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0화 대천사의 가호 (15)
이 도박은 반반의 확률이었다.
나조차도 결과를 알 수 없는.
마왕 올펠이 조금만 다른 판단을 내려도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길이 어긋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기도 했고.
정말 도박하는 마음으로 걸어봤는데 결국 꽤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갑자기 마왕 올펠이 광소를 터트리자 화련, 패황이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녀석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분명히 둘이 싸우고 있던 중에 몇 마디 말을 나누고는 마왕 올펠이 저러고 있으니 이상하게 볼 수밖에.
어느새 달려온 재중이 형과 전신이 내 옆에 섰다.
재중이 형은 날 슬쩍 보더니 바로 귓속말을 해왔다.
<불멸> 저 녀석, 왜 저래?
마왕 올펠을 미친놈처럼 보던 재중이 형을 보고는 곧장 웃음 지었다.
<주호> 아. 전에 마계 경매장에서 본 마계 세력 구도 생각나요?
분명히 그때 각 마왕들의 성향과 마왕성의 세력 같은 내용 등을 담은 서류를 비싼 돈을 내고 열람했었다.
마계 경매장이 아니면 구할 수 없는 자료였다.
그리고 그때 본 내용 중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핵심 포인트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재중이 형이 내 등으로 퍼져나가는 대천사의 가호와 마왕 올펠을 번갈아 보고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뭘 했는지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불멸> 서로 갈라서게 만들게?
역시 완벽하게 파악했네.
단순히 마계 세력 구도를 언급한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맥락을 이해해버렸다.
<주호>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에요.
아무리 봐도 지금 우리가 가진 전력으로 마왕 올펠을 완전히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적어도 마왕 스티어가 회복만 제대로 됐어도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물론 결과적으로는 꽤 나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다 내 생각처럼 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크크큭.”
갑자기 마왕 올펠이 미친 듯이 웃어댔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녀석이 뿜어냈다.
이건…….
적의에 가까운데?
그리고는 곧장 강렬한 파장과 함께 마왕 올펠의 전신이 불타오르더니 두 팔의 근육을 크게 팽창시켜 강하게 힘을 터트렸다.
마치 자신을 옥죄고 있는 패황의 리빙 아머 킹 플레이트를 박살내 버리려는 듯.
끼이이익!!
설마 경직이 벌써 풀린 건가!
헤븐즈 스트라이크로 어느 정도는 묶어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모습을 본 재중이 형이 바로 프로미넌스를 마왕 올펠을 향해 들어 올리면서 경계를 했다.
<불멸> 뭐가 잘못된 것 같지 않냐?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느껴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전신 역시도 마찬가지로 영웅의 무기를 들고 정면을 주시했다.
둘 다 이미 기묘한 변신 상태가 해제된 상태였다.
좀 전의 격전으로 둘 다 쓸 수 있는 패는 다 가져다 썼다는 뜻일 테고.
곧장 마왕 올펠을 보면서 말했다.
“충분히 알아듣게 말한 것 같은데? 지금 네 적은 우리가 아니라고?”
그 말에 다시 광소를 터트린 마왕 올펠이 나를 노려보면서 외쳤다.
“크하하하, 그럼 여기서 너희를 모두 죽이고 그 녀석들도 모두 죽여 버리면 되겠군.”
이거 생각보다 훨씬 미친놈이잖아?
애초에 녀석을 설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모양이었다.
솔직히 어느 정도 말이 통했으면 녀석을 방패막이 삼아 다른 마왕들을 노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 녀석의 성향은 애초에 다른 누군가의 말을 듣고 말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냥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녀석들을 일단 다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파트너로 끌고 가기에는.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녀석이었다.
그걸 본 전신이 나를 보면서 표정을 굳혔다.
“끝낼 수 있었을 때 바로 끝냈으면 좋았을 겁니다.”
딱히 전신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저 말이 정답에 가깝지.
약간의 후회가 돌았지만 지나간 일을 생각해봐야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그럼 최대한 빨리 수정할 수밖에.
나중에 어떻게 되든.
지금은 더 이상의 협상이 필요 없었다.
두 개의 레플리카 르아 카르테에 모으고 있던 기운을 녀석을 향해 조준했다.
내 주변으로 맹렬한 기운이 뿜어지자 마왕 올펠이 다시 날 노려보았다.
“어떻게 네놈이 그걸 쓸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대천사의 기술이라도 대천사가 아닌 네가 그걸로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녀석의 말이 맞았다.
이전에 봤던 대천사 루스와 나 사이에는 메울 수 없을 정도의 레벨 차이와 스펙 차이가 존재했다.
그때 잠시 마주친 것만으로도 그건 확실히 확인했으니.
그리고 그런 대천사가 쓰는 기술과 내 스킬이 똑같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결과는 두고 봐야 알겠지.”
바로 재중이 형과 전신을 보면서 말했다.
“잠시만 녀석을 늦춰주세요.”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재중이 형과 전신이 녀석을 향해 바로 튀어나갔다.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녀석과 애써 이야기를 해가며 시간을 끈 게 아니었다.
대천사의 최종스킬.
그랜드 크로스를 바로 쓰면 녀석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적어도 풀 차징에 가깝게 위력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그나마 내 부족한 스탯으로 유효타가 나오게 하려면 확실한 한방이 필요했다.
옆에 화련이 다가오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협상이 완전 파토 난 것 같은데?”
그런 화련을 보고 쓰게 웃었다.
“좀 도와주시죠?”
“하아, 너 정말 여러 가지로 민폐야.”
그러면서 재중이 형과 전신을 따라 화련도 달려 나갔다.
어느새 패황의 리빙 아머 킹 플레이트는 해체되어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재중이 형과 전신, 화련이 번갈아 녀석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계속 압박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만들어 주면……!
그런데 지금 녀석을 잡기는 아군의 능력치가 너무 떨어져 있었다.
한참의 격돌 끝에 재중이 형과 전신, 화련이 연달아 튕겨 나가면서 녀석이 완전히 포위에서 풀려나 버렸다.
모두를 바닥으로 쓰러뜨린 뒤.
마왕 올펠이 나를 비웃듯이 쳐다보았다.
“어차피 날 맞추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는 기술이다.”
칫.
녀석도 이게 한 번뿐인 스킬이라는 걸 너무 잘 알았다.
하지만 마왕 올펠도 쉽게 내게 접근하거나 하진 못했다.
이미 내 레플리카 르아 카르테에 모여진 스킬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잘 느끼고 있을 테니까.
딱 한 방밖에 없지만.
그만큼 강력하기도 했다.
녀석에게 정말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그게 아니었다면 이미 녀석이 달려와 내 목을 틀어쥐었을 것이다.
녀석도 움직이지 못하고.
나 역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
둘 중 하나만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이 싸움은 지는 싸움이다.
조금만 더 있으면 풀 차징인데…….
어떻게든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슬쩍 던지듯 녀석에게 말했다.
“우리가 손을 떼겠다면?”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녀석이 내 말에 조금은 흥미를 보이는 듯 대답했다.
하지만 곧 코웃음을 치며 내 말을 잘랐다.
“그냥 여기서 널 죽여 버리면 후환이 없겠지. 나중에라도 적들과 손을 잡고 날 죽이러 올 테니.”
큭.
이 자식, 대체 누가 설계한 거야?
너무 정답에 가까운 판단이라 내 등에서 땀이 나는 느낌이었다.
녀석 말대로 문제가 생길 만한 건 애초에 처리해 버리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어지간한 꼼수로는 녀석을 묶어둘 수 없다는 생각에 조금 말을 바꾸었다.
“그럼, 너와 손을 잡는 건 어떨까?”
“흠?”
“너무 그렇게 보지 말라고. 우리도 여기서 죽긴 싫으니까.”
사실 죽는 건 크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어차피 유저야 죽어봐야 다시 살아나니까.
하지만 내 경우는 조금 달랐다.
한 번이라도 죽으면 르아 카르테가 날아간다.
다른 상위의 강력한 무기들이 남아있다고는 해도.
결국 핵심은 르아 카르테다.
만약 여기서 마왕성이 날아간다고 하더라도 마왕성 같은 경우는 나중에 어떻게든 다시 수복하면 되니까 큰 문제도 아니었고.
“조금 흥미가 생기는군.”
그렇다고 해도 녀석이 날 향한 경계를 풀진 않았다.
오히려 더욱 긴장감을 높이면서 내게 시선을 집중했다.
저건 여차하면 정말 목을 날리겠다는 거다.
정말 피곤한 녀석에게 걸렸네.
차라리 여길 떠서 어디론가 사라지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또 그것도 아니고.
한 번 노린 먹이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라 나 역시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휴.
내가 나중에 레벨 올라가면 꼭 네 녀석 머리부터 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왕 올펠을 계속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보이는 이 정도의 힘이라면 너도 꽤 탐날 텐데? 무려 대천사의 힘이라고.”
그 말에 녀석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어지간한 마왕들을 누를 수 있는 강렬한 대천사의 스킬.
이것이 가지는 가치는 마왕들에게는 특히 크게 다가올 것이다.
같은 싸움을 한다고 했을 때 이 스킬이 있냐 없냐에 따라 승패가 많이 달라질 테니.
그런데 녀석은 오히려 조금 다른 것을 물어왔다.
“인간이 대천사의 힘이라……. 그럼 어떻게 그 힘을 손에 넣게 된 건지 말해 주면 네 제안을 고려해 보도록 하지.”
하.
이 새끼 봐라?
살고 싶으면 완전 밑천을 다 내놓으라는 말인데?
어이가 없어서 녀석을 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상황만 안 이래도 진짜 얼굴 몇 대는 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느새 레플리카 르아 카르테를 든 두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웅웅 울리는 파장과 함께.
일단 풀 차징은 된 건가?
시간은 충분히 끌었는데.
이제 녀석에게 이걸 어떻게 맞추느냐의 문제가 남았다.
재중이 형과 전신, 화련은 경직이 걸렸는지 아직 자리에서 못 일어나고 있는 중이고.
그렇다고 중립 연합장이 저 마왕을 붙잡아놓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한 곳에 내 시선이 머물렀다가 이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최대한 그것을 본 기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다행히 녀석은 아직 그걸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좋아. 대천사의 힘을 가지게 된 방법을 알려주지.”
그리고 녀석의 흥미를 끌 만한 이야기를 하며 완전히 시선을 끌었다.
마왕 올펠도 관심이 있어서인지 내게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마왕 올펠의 검은 그림자에서 뭔가가 아주 조심스럽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 그림자에서 검은 손들이 수도 없이 튀어나와 마왕 올펠의 다리를 빨아들이듯 잡아끌었다.
바로 빠져나가려는 듯했지만 생각과 달리 스킬이 써지지 않는지 당황하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뭐……?!”
꽤나 당황한 듯한 마왕 올펠의 표정과 시선이 순간 그림자로 옮겨가자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단 한 번밖에 없을 절호의 찬스.
검은 손들이 녀석을 잡아주는 이 순간은 녀석도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헤이스트! 】
【 대쉬! 】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치로 몸을 날려 녀석에게 거리를 좁히고는 곧장 레플리카 르아 카르테들을 녀석의 목에 겨누었다.
“나이스. 마왕 스티어!”
그리고는 확연히 터져나가는 빛의 향연과 폭발.
【 그랜드 크로스!! 】
제발!
여기서 좀 죽어 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