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8화 대천사의 가호 (13)
모두 전멸해서 죽음의 빛으로 사라진 공간을 바라보며 신음을 삼켰다.
너무 녀석을 쉽게 봤나?
아니 오히려 너무 강해서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게 패착이었다.
그리고 방금의 마왕 올펠의 행동 양식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마왕이라는 존재들은 애초에 어그로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만약 어그로가 적용되었다면 앞에 있는 재중이 형, 전신, 화련, 패황을 그대로 두고 저렇게 자리를 옮겼을 리가 없지.
혹시나 랜덤으로 어그로가 바뀔 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아예 표적 자체가 뒤에서 후방 지원하는 유저들로만 한정되어 있었다.
네임드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어그로라는 방식을 유지하기 때문에 공략이라는 게 가능했다.
탱딜힐이라는 공식.
기본만 잘 지키고 장비가 되며, 공략 방식을 잘 숙지하면 몇 번이라도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지금의 이 마왕 올펠은 그냥 그런 공식 자체를 깨버렸다.
그냥 자기가 죽이고 싶으면.
가서 죽인다.
마왕 올펠이 내 쪽으로 쳐다보자 재중이 형이 빠르게 내게 뛰어와 옆에 섰다.
“저 녀석, 랜덤 어그로도 아니야.”
재중이 형도 보자마자 바로 확신한 모양이었다.
“네, 전투 지능 자체가 아예 달라요.”
네임드가 공략 가능한 몬스터라고 한다면.
이 녀석은 오히려 NPC에 가까웠다.
언어구사 능력부터 해서 판단력, 인지력 등 실제 유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전에도 제국이나 다른 주요 장소에서 지능이 높은 NPC들이 다수 나오긴 했지만.
그들 중 네임드에 버금가는 능력치를 가지고 적이 된 경우는 드물었다.
특히 자율적인 행동 패턴을 가진 녀석들도.
솔직히 말하면.
녀석이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
사람의 그것처럼.
“그동안은 그냥 놀아준 거였어.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이.”
분명히 이전에도 마왕 올펠은 후방에 있는 지원 유저들을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부러 네임드처럼 행동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대로 놀아주었다.
지금의 저 표정만 봐도 그건 잘 알 수 있었다.
정말 재밌다는 표정.
놀다가 잠시 흥미를 잃은 장난감의 목을 부러뜨리듯 유저들의 목을 날려버린 뒤 녀석의 시선은 우리에게 와 닿았다.
그리고 웃음을 지으면서 우리에게 말했다.
놀리기라도 하듯.
더없이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크크크크큭, 내가 가만히 싸워주면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지? 안 그래?”
그간 패황이 탱 자리를 사수하고 재중이 형과 전신이 열심히 조율을 했던 게 아니라.
이 녀석이 우리 장단에 맞춰서 놀아준 것이었다.
거기다 녀석이 한마디 말을 더 했다.
“마왕 스티어를 그런 식으로 살려내면 안 되지.”
그 말에 나와 중립 연합장의 시선이 마주쳤다.
“저 녀석. 우리 대화를 듣고 있었나 보네요.”
“하아, 이제 어떻게 해요?”
마왕 스티어를 회복시키기 위해 물약을 모아준다는 계획이 아군 유저들이 다 죽어 나가면서 완전히 막혀버렸다.
물약을 가진 채로 전부 죽어 나가버렸으니.
그나마 바닥에 떨어뜨려 놓은 물약이 있긴 하지만.
문제는.
이 물약도 저 녀석에게 인지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설마 알면서도 바닥을 그냥 둔 거였나?
아마 녀석은 우리가 준비하는 걸 그냥 쭉 지켜본 것 같았다.
연극 무대를 세팅하는 걸 기다리는 것처럼.
마왕 스티어가 핵심인데…….
정말 어이없는 방법으로 묶여버리다니.
어느새 전신이 내 옆으로 다가와 영웅의 대검을 들어 올리며 마왕 올펠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음 지었다.
웃어?
지금 이 상황에서?
“오랜만에 사냥할 만한 녀석이 나타났군요.”
그건 전신만의 웃음만도 아니었다.
재중이 형도 똑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마왕 올펠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먹음직한 먹잇감이 있는 것처럼.
아주 즐거운 눈빛으로.
상황을 모두 지켜본 뒤 오히려 둘의 기분이 더 좋아진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려나?
“간만에 재미있겠네. 그거 기억나지? 영웅 사가.”
그 말에 잘 안다는 듯 전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그로가 필요 없는 게임이죠. 개인이 알아서 잘 싸우면 되는.”
“모처럼 성향에 맞는 녀석이 나왔어.”
“마찬가지입니다.”
“패턴 분석은?”
“지금까지 본 건 전부 끝났습니다. 마찬가지겠죠?”
“후배한테 밀리면 쓰나.”
“그럼, 전력으로 가볼까요?”
“그래, 제대로 밟아보자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듯 화련이 바라보자 전신이 영웅의 대검을 올리면서 화련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만 싸웁니다.”
“뭐?”
전신이 화련이 들고 있는 보랏빛 레이피어를 보고는 무심하게 말했다.
정말 아무런 사심 없이.
순수하게 사실만을 말하는 눈빛.
그 눈빛에 화련이 잠시 움찔했다.
평소에 보던 전신과는 많이 다른 그런 느낌이었으니까.
“그 무기. 사용자의 능력치를 크게 끌어올려 주는 건 잘 알겠지만. 딱 거기까지인 건 본인이 잘 알겠죠?”
“이씨,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잠시 쉬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어떤 상황이 올지 모르니까. 전력 비축 정도면 괜찮은 말이 되겠군요.”
“지금 전력을 아끼고 싸우겠다는 거야?”
“좋은 대로 생각하시죠.”
그리고는 패황을 보고서도 똑같이 말했다.
“더 두들겨 맞아봐야 어그로 같은 건 없어.”
“큭.”
“어차피 어그로가 통하지 않는 상대로는 너무 무거운 세팅이라는 건 잘 알겠지?.”
탱커가 중요한 건.
정면에서 위협적인 공격을 몸으로 대신 받아주는 데 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장비 세팅이 무거워지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의 패황의 세팅도 마찬가지.
무겁디무거운 전신 플레이트에다가 육중한 배틀 액스까지.
아무리 민첩을 올려봐야 속도가 느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플레이트 세팅은 방어력을 최대한 살리는 탱을 할 때나 의미가 있지.
속도가 밀리면 그냥 아까처럼 샌드백이 될 뿐이었다.
더군다나 적이 그 샌드백을 쳐주기라도 하면 감사하겠지만.
아예 무시해 버린다면 더욱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방해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애초에 따라가질 못하니.
“쳇. 알았다.”
자존심상 허락이 안 되더라도.
마왕의 이속과 공속을 못 따라간다는 건 지금까지 맞은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둘이 뭔가의 귓속말을 나누더니 패황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기회가 온다. 네 판단에 맡기지.”
“네 녀석이 먼저 뒤지면 아무 의미 없다.”
“그럴 리가.”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마왕 올펠을 바라보았다.
“저런 NPC 나부랭이에게 죽을 정도라면 그게 더 의미 없는 일이지.”
물론 필터링되어서 들리겠지만.
NPC라는 말만 빼고 나면.
아마 마왕 올펠에게는 꽤 굴욕적인 말로 들리지 않을까.
반응은 바로 왔다.
마왕 올펠에게서 검은 기류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재밌는 장난감들이라 좀 즐기려고 했더니. 입을 찢어나야겠군.”
그런 녀석의 말에 내가 재중이 형에게 말했다.
“NPC가 저런 말을 써도 되나요?”
“저 녀석 몬스터 아냐?”
“……음. 그렇게 말한다면야.”
뭔가 핵심을 벗어난 것 같긴 한데.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중간 지점 정도의 녀석이라.
“나와 전신이 틈을 만든다.”
“둘이서 되나요?”
“일단 봐. 정말 제대로 하면 어떻게 되는지.”
갑자기 재중이 형이 입고 있던 발록 풀 플레이트에서 붉은 기운이 끓어오르더니 플레이트가 점점 변형이 되기 시작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체를 감싸는 형태로.
거기에 프로미넌스까지 동조해서 갑옷과 무기가 일체화된 하나의 강렬한 기세를 뿜어내었다.
이건 예전에 처음 봤던 발록의 그것과 유사한데?
꼬리만 없다뿐이지.
전신 쪽에서도 변화가 보였다.
대검의 검신을 이루고 있던 칼날이 분해되듯이 잘게 갈라지더니 이내 전신의 갑옷 표면 곳곳으로 이동하여 하나의 갑옷을 만들어내었다.
대신 커다란 대검이었던 영웅의 무기는 검신이 완전히 사라진 채 백광을 내는 새로운 형태의 무기로 변해 있었다.
저건 또 뭐야?
빛을 내는 무형의 무기?
프로미넌스도 화염을 기반으로 하는 무형에 가까운 무기라 두 무기가 완전히 대조가 되어 보였다.
“시작하지.”
“갑니다.”
재중이 형과 전신이 동시에 마왕 올펠의 양옆으로 쇄도했다.
그리고는 원을 그리듯 빠른 속도로 녀석의 주변을 돌았다.
붉은빛과 백광의 기운이 띠를 이룬 채.
옆에서 화련이 놀란 눈빛으로 말했다.
“빠르잖아?”
지금까지의 속도전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둘의 속도가 엄청나게 향상되어 있었다.
마치 압박하듯이 원이 점점 반경을 줄여가더니 어느 순간부터 속도에 휘어지게 보이는 불꽃의 채찍이 마왕 올펠의 옆구리를 크게 할퀴고 지나갔다.
반대쪽에서는 역시 휘어진 백광의 띠가 녀석의 팔을 크게 갈라버렸다.
“크아악!”
지금껏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던 마왕 올펠에게서 처음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저 한 방의 위력이 얼마나 강하길래…….
마왕 스티어와도 싸울 때는 안 이랬는데.
그리고 그런 속도의 폭풍이 마왕 올펠의 전신에 커다란 상흔을 계속해서 남기기 시작했다.
꾸준히 늘어가는 상처들을 지켜보던 패황이 한숨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다.
“하, 저 속도에서 컨트롤이 되다니.”
아마 패황은 그게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확실히 지금의 속도는 좀 놀라운 면이 있었다.
현재 내 스펙에서 최대치로 움직인다고 해도 저런 고속 기동이 나올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컨트롤이 가능하냐다.
무작정 빠르기만 한 거라면 민첩만 미친 듯이 올려버리면 된다.
하지만 그래서는 본인의 몸을 본인이 컨트롤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한계점 이상의 민첩은 경험해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한다 하더라도 손발이 꼬이는 경우가 대부분일 테고.
지금 저들은.
자신들의 몸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반응 속도인 RTP가 높은 게 개인 고유의 능력이라고 한다면…….
저들은 그 능력을 정말 제대로 끌어내는 중이었다.
감당 가능한 최대의 무기.
어쩌면 빨라질수록 그 사람의 진가가 더 나오는 게 맞겠지.
화련도 눈으로 좇다가 아미를 찡그렸다.
“빠르잖아.”
“네, 제대로 싸우고 있네요.”
“잘 보여?”
“음…….”
솔직히 보이느냐고 한다면…….
보인다.
그것도 너무 잘.
당장 몸만 따라준다면 저 사이에 끼어서 싸워보고 싶을 정도로.
“뭐 그럭저럭요.”
“쳇, 재수 없어.”
“연습하면 될 거예요.”
“넌? 안 했잖아.”
“음…… 아주 안 한 건 아니에요.”
화련이 들으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저것보다 더 빠른 속도에서도 테스트를 하긴 했었다.
다른 말로.
난 저 속도보다 더 높은 속도에서도.
컨트롤이 가능할 것이다.
아마.
재중이 형과 전신이 연신 마왕 올펠을 두들기자 모두 희망이 생기는 분위기였다.
이대로면 마왕 올펠이 별다른 반항도 못 해보고 죽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런 희망은 재중이 형이 바로 깨주었다.
<불멸> 이거 오래는 못 해.
<주호> 역시 그런 거였나요?
어쩐지 갑자기 너무 오버 스펙이 나온다 했다.
컨은 가능하지만 지속이 불가능한.
어쩌면 마력 부족일 수도 있고.
아니면 스킬 지속 시간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둘이 내는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마왕 올펠의 몸을 받치고 있던 갑주가 둘의 폭풍과도 같은 몰아침에 점점 깨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생채기 내기도 힘든 갑옷을…….
심지어 실제로 대미지도 높은지 마왕 올펠의 패턴도 달라졌다.
네임드로 치면 페이즈가 변한다고 해야 하나?
마왕 올펠이 화가 끝까지 오르는지 괴성을 질렀다.
“크아아! 죽여버릴 테다!”
항상 버러지라고 하는 존재들에게 완전 유린당하는 중이니 열이 받을 수밖에.
그때 갑자기 마왕 올펠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도망간 건 아니야.
그렇다는 건……!
“뒤를 조심~!!”
어느새 우리의 뒤에 워프로 나타는 마왕 올펠의 날카롭게 변한 손날이 내 몸을 관통하려는 듯 뻗어왔다.
그때 언제 달려든 건지도 모르겠지만 화련이 갑자기 내 앞을 막아서면서 녀석의 손날을 막아섰다.
보랏빛 레이피어의 검신에서 터져 나온 기운이 마왕의 일격도 막아낼 강렬한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아씨. 아끼던 건데! 못 끝내면 진짜 죽을 줄 알아!”
그 순간.
리빙 아머 킹과 유사한 몸체가 마왕 올펠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강력하게 두 팔로 묶어냈다.
그런데 패황의 목소리는 전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이 새끼 드디어 잡았다!!”
시선을 돌리자 멀리서 패황이 갑옷이 없는 상태로 서 있었다.
갑옷 원격 조종?
설마.
둘 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건가?
마왕 올펠이 반드시 이쪽을 노릴 걸 알고?
그럼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이 실수가 널 죽일 거다. 마왕 올펠!”
내 몸에서 폭사하는 환한 빛의 향연이 펼쳐졌다.
【 대천사의 가호! 】
이제 패는 던져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