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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956화 (1,205/1,404)
  • #956화 마왕성 구축 (11)

    화련의 뜬금없는 요구에 순간 머릿속이 멍하게 변했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어…… 그러니까.”

    하도 황당해서인지 내가 멍하게 있자 화련이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아이씨…….”

    뭐지.

    분명히 화련이 엄청난 요구를 해올 거라 생각했는데.

    최소한 마왕성 시아트의 도크를 전부 요구하거나 그와 상응되는 어떤 보상.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던 건 이건 하나의 좋은 패였다.

    내가 어지간하면 들어줄 수밖에 없는 히든 카드.

    그런데 정작 화련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이었다.

    아니.

    왜?

    전화번호를?

    그리고 화련이 불편하게 쳐다보는 것을 보자마자 등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설마…….

    이건 현피인가?!

    전화번호를 알아내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사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화련을 좀 많이 등쳐 먹기는 했어.

    아니지.

    시도 때도 없이 뜯어먹었으니 좀 많은 수준은 넘어가는 거려나.

    화련에게 그간 했던 일들이 머릿속에 주마등 스치듯 지나가자 본능적으로 내 발걸음이 뒤로 밀려났다.

    알려주면 죽이러 올 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며.

    “왜 뒷걸음질을 치는 거지?”

    “아하하…… 아니, 그냥 습관이 그래요. 생각이 많을 때 뒤로 가는 습관이…….”

    “장난해? 그래서 빨리 내놓기나 해.”

    으음.

    이거 괜히 부탁을 들어준다고 했었던가.

    설마 그게 내 목숨과 바꾸는 일이 될 줄 알았다면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을 것을.

    이럴 거면 차라리 마왕성의 도크를 내어주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재중이 형이 배를 잡고는 웃어 버렸다.

    아무래도 닦달하는 화련과 뒷걸음질 치는 내가 많이 웃겼던 모양이었다.

    “여왕님이 달라는데 드려야지.”

    “아. 그게…….”

    “히든카드 하나 퉁 치는 셈 치고는 괜찮은 거래잖아?”

    확실히 반드시 들어줘야 하는 약속을 이걸로 퉁치는 건 나쁘지만은 않은 거래였다.

    하지만 그게 내 생존과 직결된다면 또 다르단 말이지.

    그러자 화련이 재중이 형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쏘아붙였다.

    “네가 처음부터 줬으면 이렇게까지 안 하잖아.”

    “아아, 내 번호가 아닌 걸 어쩌냐. 주인 허락도 없이.”

    “하! 말을 못하면 밉지는 않지.”

    “큭, 너무 미워하지는 말라고. 이쪽도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둘은 뭐 그동안 쌓인 게 많은지 그다지 좋은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결국 한숨을 쉬면서 화련에게 내 전화번호를 적어 쪽지를 보냈다.

    “받았죠?”

    그리고 내 쪽지를 확인한 화련이 목적을 달성해서인지 화가 많이 누그러진 표정으로 덤덤하게 대답했다.

    “받았어. 대체 무슨 비밀 기관도 아닌데 뭘 그렇게 숨기고 있는 건지…….”

    화련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건.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내 경호와 보안에 관련된 모든 사항들을 DS사에 극비리로 묶어둔 상태였다.

    그리고 이전에 노출되었던 전화번호도 바꿨으니 알아내려고 해도 못 알아낼 수밖에.

    내 번호를 아는 건 가까운 지인들 정도에 불과하니 결국 직접 물어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을 쓸어내리며 화련을 보자 그녀가 다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했다.

    “앞으로 연락하면 재깍 받아.”

    “아, 그건 힘들…….”

    “너 때문에 내가 손해를 얼마나 본 줄 알아?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잠수 타면 내가 뭐가 되냐고?”

    “으음…… 할 말이 없네요.”

    솔직히 화련 입장에서는 전신을 누르겠다고 내게 투자를 꽤나 한 상태였는데 중간에 붕 떠버렸으니.

    저렇게 불만을 토로해도 되는 입장이었다.

    “그. 러. 니. 까. 앞으로 잠수 타거나 씹으면 뒤질 줄 알아.”

    “하하…….”

    이거…….

    마치 목줄을 찬 것 같은 찝찝함이 드는 건 내 착각이려나.

    “칫, 원래는 다른 걸 요구하려고 했는데…….”

    그 순간 화련의 입에서 나온 작은 읊조림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말고 다른 거가 또 있었어?

    “혹시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됐어. 이젠 의미도 없고.”

    이제 의미가 없다라…….

    그럼 최소한 지금의 마왕성과 관련된 내용은 아닌 듯 한데.

    “설마 스카웃은 아니었죠?”

    “왜? 들어줄 생각이야?”

    “아뇨. 그건 아니죠.”

    칼 같은 답변에 화련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안 되는 일에 힘 빼긴 싫어.”

    화련이 그걸로 물고 늘어지면 어쩌나 했는데 그쪽은 아닌 모양이었다.

    슬쩍 주변을 바라본 화련이 이곳을 보는 유저들을 한 번씩 노려본 뒤 내게 말했다.

    “빨리 가기나 해.”

    소기에 목적을 달성해서인지 꽤 곱게 놓아준 것 같기도 하네.

    “네, 그럼.”

    그렇게 화련을 비롯한 각지에서 몰려든 유저들을 비공정에 태우고 다시 마왕성 시아트로 향했다.

    생각보다 많은 유저들이 몰려들긴 했는데.

    어차피 마지막에 웃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을 것이다.

    그중에 한 명이 옆에 있는 화련일 테고.

    “경매에 참가할 건가요?”

    “그럼 설마 내가 네 전화번호만 물어보러 여기까지 왔겠어?”

    순간 아니냐고 물어보려다가 본능적으로 입을 닫았다.

    날 째려보는 눈빛이 꽤 사나웠으니.

    “넌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아, 뭐 그건 아니겠죠.”

    “짜증나.”

    “네네.”

    뭐가 맘에 안 드는지 툴툴거리던 화련이 곧 내게 뭔가를 물어왔다.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말로.

    “내게 통째로 팔 수 있어?”

    “도크요?”

    그러자 화련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왕성 전부.”

    “여전히 스케일이 크시네요.”

    확실히 이 여자는 진짜 생각하는 것 하나는 핵폭탄 급이었다.

    도크가 아니라 마왕성 전체를 사려고 했다니.

    “설마 여기 온 것도?”

    “맞아. 마왕성을 사려고 왔어.”

    “돈이 얼마나 들어갈 줄 알고요?”

    “너도 샀는데 내가 못 살까봐?”

    틀린 말이 아닌 게 화련이라면 마왕성을 통째로 사고도 남겠지.

    하지만 그건 마왕이 팔아준다는 전제가 있어야 했다.

    마왕성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지분.

    51%.

    이건 마왕 스티어가 절대 내어놓지 않을 것이다.

    “대답부터 하자면 불가능해요.”

    “어째서?”

    “마왕이 있으니까요.”

    “그럼, 마왕과 자리를 만들어.”

    “흠, 가능하긴 하겠지만. 마왕이 좀 사납거든요. 마왕성을 다 산다고 하면 바로 목부터 칠 걸요?”

    내가 가진 지분 49%도 마왕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니 허락한 셈이었다.

    그 이상을 노린다면 마왕이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아쉽네.”

    너무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는 화련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 가능했다면 화련은 마왕과 협상을 해서라도 마왕성을 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조금 떨어져 듣고 있던 재중이 형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불멸> 확실히 무서운 여왕님이군.

    <주호> 네, 무섭죠.

    마왕을 등에 업은 화련이라…….

    무력에서 최강인 마왕과 금력에서 최강인 화련이 만나면.

    그 자체로 밸런스 붕괴다.

    혹시나 정말 마왕과 협상하는 일은 없게끔 화련에서 설명을 해주었다.

    괜히 예상하지 못한 이상한 방향으로 튀는 건 사양이라.

    “일단 마왕성에는 지분이라는 게 있어요.”

    “그래?”

    “그리고 최소한의 지분은 있어야 마왕성의 시설들을 이용할 수 있어요.”

    “마왕성 도크처럼?”

    “그런 셈이죠. 그리고 지분에 따라 각각의 물건들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도 달라져요.”

    “비공정을 많이 생산하려면 지분을 많이 가질수록 유리하겠네.”

    그러더니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화련이 내게 물었다.

    “아마 네가 마왕성 지분의 49%를 가지고 있을 테고?”

    그 말에 재중이 형이 꽤 즐거운 눈빛으로 말했다.

    <불멸> 호오, 예리한데?

    단순히 지금 오가는 말들만으로 우리 지분이 얼마나 되는지 한 번에 눈치채버렸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요?”

    “아까 그랬잖아. 마왕은 마왕성을 팔진 않을 거라고. 그럼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분은 가지고 있을 테지. 이를테면 51%라던가.”

    정확한데?

    “그리고 넌 어떻게든 마왕을 구워삶아서 최대치의 지분을 얻어냈겠지. 그게 49%.”

    이어지는 말도 너무 정확해서 할 말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아마 유저들에게는 적당히 팔아넘길 생각이겠지. 한…… 20프로 정도? 최대 24% 정도이려나? 그래야 너도 마왕성에서 2인자 정도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을 테고. 아냐?”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마치 내 생각을 다 뚫어 보는 것 같은 통찰력이라.

    “하. 설명할 게 없겠네요.”

    그런데 여기서 화련이 한 단계를 더 뛰어넘어버렸다.

    “혹시 마왕성이 전쟁 준비 중이야?”

    “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솔직히 지금 말에는 등에 소름이 돋았다.

    대체 화련이 어디까지 내다보는 거지?

    내가 모른 척하자 화련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기분 나쁜데? 날 너무 우습게 보지 마.”

    “설마요.”

    “됐고. 만약 내가 마왕성의 지분 49%를 가지고 있다면 지분 전량을 내가 소유하고 비공정들을 생산해 전 서버의 비공정 시장을 뒤흔들었을 거야. 말 그대로 독점이니까. 원하는 대로 가격을 올렸다 내렸다 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비공정을 대가로 원하는 협상도 끌어낼 수 있을 테고.”

    화련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지금 마왕성에서 생산되는 비공정은 부르는 게 값일 지도 모른다.

    거기다 생산 능력을 손에 틀어지고 있으면 원하는 게 뭐든지 간에 상대는 다 들어줄 수밖에 없을 테지.

    남들에게 뒤쳐지고 싶진 않을 테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분을 판다? 이건 한 가지밖에 예상 못 하겠는걸?”

    “그런가요?”

    “응, 현재 마왕성의 지분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 혹은 그에 상응하는 위험이 있어서 그런 위험을 분산해야 할 때.”

    그러더니 화련이 내게 선언하듯이 말했다.

    “결국 이 마왕성이 전쟁을 앞두고 있다고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아. 아님, 마왕성이 망하기 일보 직전이거나.”

    그 추론에 재중이 형이 바로 감탄했다.

    <불멸> 이거 상상 이상인데? 난 화련이 이렇게 똑똑한 줄 처음 알았다.

    <주호> 저도 그 생각 중이에요.

    그리고 화련은 한 마디를 더 했다.

    “마왕성 도크라는 달콤한 유혹으로 이런 사실을 덮고 있겠지만. 그게 과연 얼마나 갈까?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야.”

    아니다.

    화련이 지나치게 똑똑한 거다.

    보통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 할 테니.

    순간 재중이 형이 놀리듯이 화련을 보고 말했다.

    “설마 지금껏 바보인 척한 거냐?”

    “뭐? 바보? 죽을래?”

    “아니, 이건 순수한 감탄이다.”

    재중이 형이 감탄을 잘 안 하는데 말이야.

    이 정도면 인정해 줘야겠지.

    그동안 하도 우리에게 당하기만 해서 나 역시 화련이 저렇게까지 생각이 깊은 줄은 몰랐다.

    “기분 나쁘지만, 어쨌든. 지분을 팔아먹긴 해야 한다는 거 아냐. 누군가에게는 떠넘기려고.”

    “그런 셈이지.”

    재중이 형도 순순히 인정했다.

    이미 모든 걸 알아버린 뒤라 딱히 발뺌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자 화련이 날 바라보더니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럼 내가 그 가격을 좀 올려줘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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