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1화 승자 없는 전장 (11)
전신이 철수한다고 말하는 순간.
정신없이 치고받던 전투 현장이 마치 그대로 멈춘 것처럼 다들 손을 멈춰버렸다.
정확히는 초월 연합 유저들이 먼저 발을 뺐고, 그러자 상대할 유저가 없어진 혼령의 연합 유저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장소에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중앙의 크리스탈이었다.
힘을 내 더 밀어붙이면 밀어붙이지 여기서 빠진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 상황.
그렇게 고지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적들이 일제히 빠지자 혼란스러운 듯 잠시 멈춘 상태가 되어갔다.
“어? 뭐지?”
“이 녀석들 갑자기 왜 빠져?”
“저쪽도 전부 빠지는데?”
“안 뚫려서 그냥 포기했나?”
“그건 아닌 듯.”
“그래, 우리가 딱히 유리했던 건 아냐.”
“혹시 함정?”
아군이 보기엔 마치 보란 듯이 발을 빼는 모습이 오히려 함정이라고 생각될 정도랄까.
때문에 쉽사리 따라붙지 못하고 라인만 유지하자 곧장 혼령이 우리 옆으로 뛰어 들어왔다.
다소 놀란 듯한 얼굴을 하고선.
“뭐야? 왜 다 빠져?”
“발록과 전신이 한판 붙었다가 전신은 제대로 힘도 못 쓰고 밀렸거든.”
사실 바로 철수까지 할 거라고는 나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버티다가 양쪽 다 피해가 커지면서 전장이 엉망이 되는 걸 생각했는데.
하지만 전신의 말에 초월 연합이 일제히 빠졌고, 그 좁아 보이던 시가지가 뻥 뚫린 것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녀석들을 추격해야 하나?”
“너, 그 녀석들 잡을 수는 있고?”
“흐음, 그건 솔직히 힘들겠지.”
잠시의 고민도 없이 대답하는 혼령.
혼령도 이번에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막상 붙어보니까 적들의 저력이 장난 아니었다.
만약 발록, 뱀파이어 로드, 혹한의 얼음 여왕이 나서지 않았다면 정말 아무것도 못 해보고 그대로 밀렸을 확률이 아주 높았다.
그만큼 혼령에게는 이번 전투가 교훈이 되었을 터.
쪽수가 아무리 많아 봐야.
진짜 제대로 된 녀석들하고 붙으면 개박살 난다는 사실을.
이번에 너무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초월 연합 유저들이 빠지는 방향을 보다가 전투가 끝나 가만히 서 있는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 혹한의 얼음 여왕이 눈에 들어왔다.
의외로 얌전히 있네.
자신들에게 덤벼들던 녀석들 정도만 깔끔하게 녹여 버린 뒤 입맛만 다시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본 혼령도 놀라운 눈빛을 보냈다.
“저들이 도와주면 가능할 것 같은데.”
“아, 딱히 내 말을 잘 듣는 편은 아니라서.”
뭐 억지로 말하면 가능하기야 하겠지만.
굳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이미 저 셋의 위력을 본 녀석들이라…….
직접 상대하려고 들지도 의문이고.
“그런가? 할 수 없군.”
혼령도 딱히 무리하게 요구를 하진 않았다.
의외로 포기가 빠른 녀석일세.
“저 정도 NPC를 움직이려면 대가가 적진 않겠지.”
“뭐 좋을 대로 생각해.”
딱히 오해를 풀어주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
그냥 알아서 오해하도록 두었다.
그때 재중이 형이 다가와 혼령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보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냐? 그 녀석은 이렇게 쉽게 포기할 녀석이 아니다.”
누구보다 전신의 성격을 잘 아는 재중이 형이 그렇게 말했다면 확실하다고 봐야겠지.
지금의 후퇴는 그냥 후퇴가 아님을.
“흠, 그래?”
“여기가 안 뚫린다고 포기할 녀석이면 고생 안 하지.”
그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던 혼령이 내게 말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글쎄?”
솔직히 전신이 그대로 빠지는 건 예상에 없던 일이라.
결국 재중이 형을 보면서 따로 물어보았다.
“녀석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이곳은 안 된다는 걸 알았으니까. 다른 방향으로 지원을 가겠지. 어차피 한 곳만 제대로 뚫으면 되니 굳이 이곳이 아니라도 상관없을 거다.”
“연이나 데스 쪽으로 지원 갈 거라는 거군요.”
“딱히 선택 사항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현재 다른 방향은 너무 쉽게 끝난 우리와 달리 치열하게 팽팽한 전투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이 상황에서 전신의 지원이 추가되면 그쪽은 반드시 뚫린다고 봐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 성벽을 지키던 패황의 병력들도 돌아오니까 어느 정도 상쇄야 되겠지만.
그사이에 뚫리면 답도 없지.
“역시 아까 전신을 죽여 버렸어야 했나 봐요.”
슬쩍 발록을 보자 발록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있었다.
<윈> 아무래도 발록은 지금 전신을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요.
<심연> 녀석만의 기준이 있겠지. 억지로 강요해 봐야 역효과다.
재중이 형이 나서서 싸우면 어떻게 잡을 수 있긴 하겠지만.
그러려면 풀 전력으로 나서야 하니.
이쪽도 힘든 일이다.
발록이 저러니 뱀파이어 로드나 혹한의 얼음 여왕도 딱히 간섭을 하지 않았다.
셋 다 자신의 영역은 확실히 지키는 듯하네.
그럼 적당히 자리를 만들어 줄 수밖에 없나.
“발록, 저 중앙의 크리스탈만 깨지지 않도록 해줄 수 있어?”
그러자 발록이 슬쩍 중앙을 바라보더니 별로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지.”
일단 이거면 크리스탈이 박살 날 일은 없을 것 같고.
발록의 가드를 뚫고 지나갈 수 있는 녀석이 있을 리가.
현 유저들 중 가장 앞서 있다는 전신조차도 힘겹게 상대하는 판에 다른 유저가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뱀, 넌 북쪽으로 가.”
내 말에 잠시 귀찮은 티를 내려던 녀석이 이어지는 내 말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거기 가면 죽일 놈들이 잔뜩 있거든. 그리고 네 마음대로 죽여도 돼.”
“호오. 그것 참 마음에 드는 말이군.”
“죽일 수 있는 놈들만 빠르게 죽여 버려. 강한 놈은 딱히 상대하지 않아도 문제없을 거야.”
북쪽에는 데스가 있으니까.
괜히 그 녀석을 상대한다고 시간 끌어 이 좋은 기회를 날려버리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알았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곧장 뱀파이어 로드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 녀석도 몸이 달아 있다니까.
“퀸은 서쪽. 가서 마찬가지로 싹 녹여 버려.”
“그러지.”
혹한의 얼음 여왕 역시도 만족할 만큼 학살을 하진 못 했으니 그쪽에 배치해 주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얼음 여왕이 텔레포트로 사라지니 혼령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저들이 가면 어떻게든 처리되겠군.”
그런 혼령에게 미리 말을 해두었다.
“쟤들이 좀 막 싸우는 스타일이라, 아군이 좀 죽어도 양해해 달라고 미리 연락을 해놔. NPC들이 유저 별로 신경 안 쓰는 건 잘 알지?”
“그건 내 선에서 알아서 하도록 처리해 두마.”
이래서 머리를 잡고 있는 놈하고 일해야 한다니까.
어지간한 일은 다 무마할 수 있으니.
“안 그래도 인원을 빼기는 난감했는데 잘 됐군.”
“혹시 녀석들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내 말에 혼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하다고 다른 곳을 지원 가다가 정작 여기가 뚫려 버리면 그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두고두고 욕먹을 일이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혼령은 이곳에서 병력을 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딱히 돌아오진 않겠지만.
혹시라는 게 있으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자, 그럼 우리는 전쟁 구경이나 해볼까?”
* * * * *
동쪽 구역은 우리가 나서서 확실히 틀어막을 수 있었고, 이는 생중계를 통해 서버의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았다.
방송을 하는 유저들도 제법 되었으니까.
- 초월 쟤들 다 내뺐잖아?
- 와, 전신이 저래 밀리는 거 처음 봤음.
- 상대방 누구야?
- 발록이라는데?
- 미친, 누가 네임드 이름으로 아디 만들었냐.
- 실력이 되니까 만들었겠지.
- 크크, 전신 맨날 무게 잡고 다니드만 깨져서 쪽 다 팔았겠네.
- 잡고 다닐 만하지 않나? 서버 1위인데. 그런데 생각해 보면 상대가 미쳤네.
- NPC라는 말이 있던데? 영웅급.
- 오, 그럼 말이 되겠네. 솔직히 전신보다 센 유저가 지금 어딧냐.
어느 정도는 추측에 기반한 댓글들이었지만.
소문은 소문을 타고 계속 퍼졌고 많은 사람들이 믿어 버리자 그게 곧 진실이 되는 기적을 구경할 수 있었다.
거기다 발록뿐만 아니라 뱀파이어 로드, 혹한의 얼음 여왕도 방송을 탔다.
셋 다 압도적인 능력으로 적들을 찍어 눌렀다.
특히 뱀파이어 로드와 얼음 여왕은 다시 서쪽과 북쪽 전장에 투입되어 유저들을 미친 듯이 학살하는 모습이 영상에 고스란히 잡혔다.
아주 대놓고 아군이고 적이고 다 녹여버리는 모습이란.
덕분에 패황 연합에서 뒤늦게 지원 병력을 보내 수습을 했음에도 별다른 무리 없이 중앙의 크리스탈을 지켜낼 수 있게 되었다.
기습을 통해 거점에 들어온 적 연합 유저들은 혼령의 연합에 1차 저지를 당해 시간이 너무 걸려 버렸는 데다가.
2차는 세 네임드의 활약으로 다수의 유저들을 잃어버렸다.
거기다 3차로 패황 연합 유저들이 복귀를 해 지원 오는 바람에 그들의 기습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버리게 되었다.
결국 기습의 실패는 적들의 주력이 너무 많이 죽는 결과로 이어졌고.
성벽에서 일어나는 공성 역시도 더 이상의 힘을 받지 못하고 허무하게 공성이 끝났다.
- 와, 결국 버텼어.
- 대박. 기습당했는데도 이겼네.
- 패황이 대단하긴 해.
- 에이, 솔직하게 패황은 솔직히 아무것도 못 했잖아.
- 맞아, 기습 당한 지 한참 지나서야 병력 보내서 얼마나 욕을 처먹었는데.
- 어휴, 패황 생각하니 짜증나네. 혼령이 미리 병력 배치 안 해놨으면 벌써 거점 날아갔다.
- 혼령이 거점도 다 차지하고 심지어 중앙 거점까지 싹 막아 줬네.
- 솔직히 초월 연합도 정말 강했는데 이번엔 혼령이 대처를 잘 했다고 봄.
- 혼령 아니었으면 벌써 져도 백번은 졌다.
역대 최고의 유저들의 공성이었던 이번 공성이 끝나자 사람들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초월 연합이 패퇴에 그들을 비난하는 글들과 새로이 떠오른 패황 연합과 혼령 연합을 칭찬하는 글들.
그리고 그중에서 호의적인 댓글들은 전부 혼령을 찬양하는 글들밖에 없었다.
“흐음,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너무 잘 된 느낌이죠?”
“어, 계획보다 훨씬 좋네. 반응이 폭발적이야.”
이긴 자가 다 가지는 세상이기는 한데.
이번에는 그 정도가 좀 심했다.
그만큼 패황이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는 걸 뜻하기도 했다.
반대로 혼령은 그야말로 새로 떠오르는 스타라고 할 수 있었다.
<혼령> 이번 일은 잊지 않겠다.
<윈> 뭐, 계약대로 할 일을 했을 뿐이야.
<혼령> 훗, 그런가. 아무튼 덕분에 연합 내 패황을 지지하던 세력들 대부분이 내게 돌아섰다.
<윈> 오, 그건 축하할 일이네.
<혼령> 조만간 내 밑으로 새로운 거대 연합을 창설할 계획인데. 어때? 한 자리 내어줄까?
<윈> 나쁘진 않은데, 우리가 할 일이 좀 있어서 말이야. 어디 묶여 있기에는 좀 바쁘거든.
<혼령> 언제든 생각이 있으면 말해. 자리 하나는 만들어놓겠다.
<윈> 좋을 대로.
이번 일에 혼령은 내게 호감이 상당히 쌓인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고라 불리던 초월 연합을 누른 데다가 자신이 모든 권력을 손에 쥔 모양새였으니까.
혼령이 처음에 원했던 대로.
나와의 대화를 듣던 재중이 형이 피식 웃어 버렸다.
“이 녀석 너무 일찍 축배를 드는데?”
“그렇죠?”
“앞으로 전신이 어떻게 나올 줄 알고 저러나 몰라.”
“직접 겪어 봐야 알겠죠.”
지금이야 전쟁 여파로 잠시 초월 연합 쪽이 하락세이긴 하지만.
결국 조만간 두 세력은 또 붙게 될 것이다.
“맞다. 이제는 처리해도 되겠죠?”
“아, 그거? 그래. 이젠 때가 됐지.”
재중이 형의 허락이 떨어지자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럼, 조만간 연하고 자리 좀 만들어 주세요.”
팔아먹어야 하는 게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