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9화 승자 없는 전장 (9)
압도적이라고 할 전신의 병력들이 밀어붙이자 아군들도 더 이상은 버티기 버겁게 되었다.
좌측에서 연신 전신의 부대가 파고들었고, 우측에서는 연의 원거리 부대들이 화력으로 뚫어냈다.
거기다 북쪽에서는 데스를 앞세운 돌격 부대가 역시 강력한 아이템들을 이용해 밀어붙여 다시 한 번 지원 병력을 궤멸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애초에 이 녀석들로 이길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
그렇게 중앙에서 버티던 녀석들도 슬슬 한계가 오자 지원을 외치기 시작했다.
“증원은?! 더 안 오냐고?!”
“젠장, 더 이상은 못 버틴다니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지원 계속 오긴 하잖아! 일단 버텨봐!”
“이걸로는 택도 없어! 본대가 와야 해!”
성벽 없이 초월 연합의 정예들과 싸운다는 건.
그만큼의 실력이 뒷받침되어 줘야 가능했다.
하지만 이들의 숫자는 많을지언정 그런 전투 능력에서는 너무나 부족한 감이 있었다.
적이 한 번 휘두를 때 몇 명이 동시에 썰려 나가는데 이게 과연 숫자가 많다고 해결이 될 문제인가.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는 이때.
혼령의 병력들이 시가지의 건물들에서 우르르 달려 나와 오히려 전신의 병력들의 뒤를 치기 시작했다.
“우와아아!! 가자!!”
“전부 죽여!!”
“하나도 살려두지 마라!!”
“다 쓸어버리라고!”
채앵!!
쐐애액!!
콰앙!!
두터운 갑주를 입고 온몸으로 밀어붙이는 탱커부터 해서 뒤로는 대검과 중검을 들고 있는 전사들.
그리고 건물 위에서는 궁수들의 날카로운 화살들이 연이어 활시위를 떠나 적들의 등에 날아들었다.
거기다 미리 풀 차징을 하고 기다리던 마법사들의 강력한 범위 마법들도 동시에 적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화르륵!!
파지지직!!
콰아아앙!!
순간 위력이 가장 강력하다는 폭발 마법에 더해 적들의 발을 묶기 위한 전격 마법, 그리고 체력을 확실히 깎기 위한 화염 마법까지.
특히나 중앙 크리스탈로 가는 길목은 전부 시가지의 건물 사이를 지나야했기에 적들은 피할 곳도 없이 전부 광역 마법과 화살 세례를 뒤집어 써야 했다.
정면은 중앙 크리스탈을 지키고 있던 원래의 패황 연합 유저들의 바리게이트가 있고.
후방은 혼령이 미리 준비한 탱커들이 완전히 뒤를 막아버렸다.
거기다 건물 위에서는 끝도 없이 원거리 유저들의 공격이 떨어져 내렸다.
어떻게든 몸을 빼내려고 해도.
심지어 양옆은 전부 건물의 외벽으로 막혀 있었다.
도망갈 곳조차 여의치 않은 상황.
당연히 모든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는 것밖에는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았다.
고립된 것도 모자라 완전히 포위까지 된.
최악의 위치.
“씨발! 피할 수가 없어!”
“젠장, 갑자기 어디서 이렇게 많은 숫자가!!”
“탱커들 전부 쉴드 머리 위로!”
“전부 탱커 뒤로 숨어!”
급한 대로 전신이 빠르게 명령을 내리자 탱커들이 일제히 공중을 향해 라지 쉴드를 들어올렸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광역 공격들을 막는데 있었다.
하지만 원래 기습을 위해 병력 구성을 짜왔던 터라 그들에게 무거운 중갑과 라지 쉴드를 든 유저가 너무 적었다.
탱커가 커버할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이기도 했고.
나머지는 그냥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크악! 이 새끼들이!”
“어떻게든 버텨!”
“죽지 마라!”
그런데 그때 하얀 라지 쉴드를 들고 있던 지아라는 여성 유저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의 스킬을 시전했다.
그러자 초월 연합 유저들 머리 위로 엄청난 크기의 배리어가 생성되면서 떨어지는 모든 광역 스킬들을 동시에 막아내기 시작했다.
퍼어엉!
쾅쾅!
쿠웅!
마치 하나의 거대한 돔을 연상시키는 투명한 쉴드.
그 쉴드가 모든 광역기를 막아내면서 전신을 비롯한 모두를 수렁에서 건져냈다.
저 정도의 방어기라니…….
대체 광역기를 몇 개나 방어해낸 건지 모르겠네.
정확하진 않아도 수백 명이 동시에 건물 위에서 날린 광역기들을 저 지아라는 여성 혼자서 완전히 틀어막아버렸다.
비록 그게 짧은 순간이라고는 해도.
전부 합치면 엄청난 대미지일 텐데.
저런 방어기라면 네임드의 최종 스킬도 막아낼 수 있을지도.
“형, 저게 뭔지 알아요?”
“아니. 나도 놀라고 있는 중이다.”
재중이 형도 모른다는 건가.
아마 숨겨둔 한 수인 모양인데.
지아라는 탱커는 벌써 이 스킬을 쓴 것이 다소 아까웠는지는 몰라도 약간은 찡그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본인에게도 피해가 가는 스킬일 수도 있고.
그리고 공중에서 떨어지던 광역기가 전부 막히자마자 전신이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대검을 들고 건물 외벽을 박차더니 건물 위로 날 듯이 뛰어올랐다.
그렇게 뛰어오른 전신의 대검 전체에 마치 주변의 빛을 전부 끌어모으듯 강렬한 기운이 대기를 울리면서 넓은 검신을 따라 맺히기 시작했다.
으르르릉!!
완전히 빛을 끌어모았다고 생각한 순간.
전신이 360도로 몸을 비틀며 대검을 횡으로 크게 휘둘렸고, 검신에 몰려든 눈이 부실 정도의 빛들이 그 궤적을 따라 확 퍼져 나갔다.
마치 압축된 빛의 파도라고 해야 하나?
저건…….
꽤 위험해 보이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빛에 닿은 모든 건물들이 동시에 폭발음을 일으키며 동시에 터져나갔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우르르르!
그리고 폭파된 건물 위에 올라가 있던 대부분의 궁수들과 마법사들이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그대로 죽음의 빛으로 변해 버렸다.
빛에 닿은 모든 건물들을 박살내 버리는 위력.
거기다 그 범위마저도 엄청나게 넓었다.
그렇게 일대 건물들을 잿더미로 만드는 데는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충분했다.
“휘유, 저 녀석. 굉장한 걸 숨기고 있었잖아?”
어째 그 모습이 재중이 형은 더 신나 보였지만.
지아라는 여성도 그렇고.
전신도 마찬가지.
이런 아이템들을 가지고 있다니.
재중이 형이 발록을 잡고 나온 프로미넌스를 들고 있듯.
녀석들도 뭔가 한가닥 하는 아이템들을 다 가지고 있었다.
“적들이 강한 게 더 좋은 거죠?”
“뭐, 그렇지. 그냥 죽어 버리면 시시하잖아.”
손이 근질거려서 못 참겠다는 듯 눈빛을 반짝이는 걸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 한 번 붙을 자리를 마련해 봐야겠네.
둘 다 제대로 최상의 장비를 갖추고 싸우면 누가 이길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리고 그때.
적진의 한가운데서 검붉은 기운이 잔뜩 누군가에게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저건 아마…….
이전에 한 번 봤던 낙화라는 마법사.
그때와 달리 지금은 상당히 모습이 변해 있기는 했는데.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낙화의 정면으로 몇 겹이나 중첩되는 거대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전부 비켜어!!!”
그러자 초월 연합 측 유저들의 표정이 핼쑥해지면서 미친 듯이 범위 바깥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아, 저 미친년이!”
“이 좁은 곳에서 그걸 쏘면 어쩌자는 거야!”
“돌아버리겠네.”
같은 아군에게 욕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맞지 않으려고 도망가는 녀석들의 모습에 나 역시 호기심이 생겼다.
대체 뭘 쏘길래?
그 순간 정면을 향해 완전히 차징이 된 검붉게 타오르는 화염 브레스가 쏘아져 나갔다.
“전부 뒤져!!”
그리고 쏘아진 화염 브레스가 정면을 가로막고 있던 모든 유저들을 일제히 녹여버리며 완벽하게 관통해버렸다.
“끄아악!”
“뭐냐!!”
“막……!”
미처 막을 틈도 없이 유저들을 통째로 녹여버리는 대량 살상 광역 마법기.
중앙 크리스탈까지 빽빽하게 막고 있던 유저들을 싹 없애버리자 완전히 길이 뚫려버렸다.
그리고 그 한 방을 쏜 낙화는 자리에 풀썩 쓰러져버렸다.
“진짜 내가 이것까지 써야 해?!”
단독으로 수백을 녹일 수 있는 마법사라.
이미 저 자체로도 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체 얼마나 고강 아이템과 강력한 스킬들로 도배한 건지.
흡사 예전의 챠밍이 떠오르는 것 같아 약간 씁쓸한 느낌까지도 들었다.
그렇게 전신과 지아, 낙화 단 세 명의 활약에 포위망이 뚫려버리자 곧장 혼령에게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혼령> 하, 뭐냐, 저것들은…….
<윈> 내가 묻고 싶은데? 생각보다 훨씬 세잖아?
혼령이 준비한 유저들이 어느 정도 시간을 끌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적들의 전력이 강했다.
특히 저 세 명.
그리고 뒤를 따르는 나머지 유저들도 그렇게까지 약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혼령> 아무래도 우리 애들로는 저 녀석들을 막을 수 없는 모양이군.
혼령도 어렴풋이 느끼는 듯했다.
아예 클래스 자체가 다르다고.
휘하에 수백, 수천의 유저들을 밀어붙인다고 해도.
숨겨둔 스킬 한 방에 싹 녹아버리는 판국이라.
<윈> 다른 쪽은 어때?
여기가 이렇다면.
다른 쪽도 그렇게 사정이 좋진 않을 터.
<혼령> 북쪽과 동쪽은 그럭저럭 막고는 있다고 하는데. 정작 여기가 이 모양이군.
연과 데스가 밀고 오는 방향은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지 않다는 거려나.
역시 이쪽이 주력이라 할 수 있겠네.
결국 저 초월 연합의 주력만 막을 수 있다면.
이 전투는 우리가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혼령>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진 않지만. 이쪽도 강력한 패를 꺼내들어야겠어.
혼령은 아마 우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해결해볼 생각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포위하는 지형이 좋기도 하고.
적들도 혼령이 배치한 인원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기습까지 성공한 상황.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버렸다.
잘못하다가는 다른 방향의 수비 병력까지 이쪽으로 돌려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혼령은 다른 연합장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
가뜩이나 패황을 끌어내려야 하는 혼령에게 있어 이건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윈> 뭐, 알았어. 좀 이르긴 한데.
여기서 뚫리는 건 우리도 아쉬운 일이라.
<윈> 저 셋만 처리해 주면 되는 거지?
<혼령> 그럼 부탁하지.
<윈> 그래, 이 빚은 나중에 생각해 보자고.
“발록, 뱀, 퀸.”
셋을 부르자 동시에 내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 셋. 잡을 수 있지?”
그러면서 전신과 지아, 낙화를 가리키자 네임드 셋 다 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아, 알았어. 미안.”
저들이 유저 입장에서는 강하다고 해도 네임드가 보기엔 확실히 약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마왕과도 한판 해보니 어쩌니 하는 애들인데.
저들이 눈에 차기나 할까.
그때 얼음 여왕이 날 보면서 물었다.
“남은 애들도 다 죽여도 돼?”
“흐음, 어쩔까나…….”
잠시 적들을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혼령이 여기서 활약을 하게 하려면 다 죽이는 건 곤란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어설프게 맡겨놨다가 망하면 그것도 골치가 아팠다.
휴.
혼령의 세력이 조금만 더 강했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야.
재중이 형을 바라보자 재중이 형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잖아.”
“역시 그렇죠?”
과정이야 어쨌든.
여길 지켜내기만 하면 되니까.
혼령도 딱히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발록, 뱀파이어 로드, 혹한의 얼음 여왕을 보면서 웃어보였다.
“응, 싹 죽여 버려.”
거기다 한 마디를 속삭이듯 더 붙였다.
“걸리적거리면 아군도 같이 다 죽여 버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