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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938화 (928/1,404)

#938화 승자 없는 전장 (8)

오직 정면만 막으면 되는.

거점 패황은 그동안의 그 어떤 거점들보다도 방어하기에는 굉장히 용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후방이야 어차피 유적지로 가는 산맥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패황은 정면에 가득 힘을 주고 어떻게든 버티면 된다는 식으로 수성 병력을 구성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거의 절반이 넘는 유저들이 성벽에 올라가 적들의 공세를 방어하는 중이었다.

한 번에 성벽에 올라가 방어 가능한 최대치의 병력.

그리고 남은 절반은 지원 병력으로 아래에 남아 있었다.

빈틈이 생기면 곧장 성벽으로 올라가는 예비군의 느낌이랄까.

물론 그 숫자가 적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병력 숫자가 만 단위가 넘어가면 그 숫자만으로도 압박감을 줄 수 있었다.

그게 반이 되었든 전부가 되었든.

그런 그들이 당황함과 함께 전부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적들이 거점 안에 들어왔다는 내 외침과 함께.

“적이라고?!”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무슨 일인지 빨리 확인해!!”

“확인하면 너무 늦어!! 일단 가서 틀어막아!”

“노는 놈들 전부 후방 지원!!”

그리고 다들 이어진 수성에 어느 정도는 긴장을 하고 있었기에 눈치가 빠른 녀석들은 제각기 다 무기를 쥐어들고 시가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적들에게 바로 중앙 크리스탈을 파괴당할 수 있으니까.

처음엔 당황한 듯 했던 패황 역시 곧바로 정신을 다잡고는 급하게 휘하의 연합장들에게 뭔가의 지시를 내렸다.

그것도 꽤 급해 보이는 목소리로.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패황 자신이 제일 잘 알 터.

“녀석들보다 빨리 도착해야 한다!! 움직여!!”

최소한 적들보다는 중앙 크리스탈에 도착이 빨라야 방어를 해보든 뭘 하든 수가 생긴다.

그런데 이미 뒤를 잡힌 상황이라.

아무리 빨라도 적들이 먼저 도달할 확률이 더 높았다.

“중앙 크리스탈에 주둔하는 부대는 어느 정도지?”

내 물음에 혼령이 바로 대답해 주었다.

“대략 이백 여명 정도.”

“길드 두세 개분밖에 안 되네?”

“흠, 사실 그것도 많은 거지. 성벽이 뚫리지 않는 이상은 그냥 버리는 병력이나 마찬가지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치는 해두었지만 아깝다는 생각을 계속했을 거다. 여차하면 죽어서 부활한 유저들로 때워도 되는 일이라.”

“패황이 운이 아주 없진 않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정말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겨놓고 수성을 진행하는 편이었다.

혼령 말대로 수성을 하다가 죽은 유저들이 부활을 하면 후방에서 부활을 하기 때문에 그들로 급하게 메울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보통 상황이었다면 대처 자체가 나쁘진 않다는 말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보통 상황이 절대 아니었다.

적들이 비밀 통로를 통해 우르르 거점 안을 파고 든 상황.

그렇게 최소 병력만 남겨놓은 상태로는 절대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비밀 통로를 통해 들어오는 녀석들이 결코 쉬운 녀석들이 아닐 테니까.

이번 한 번으로 공성을 성공시키느냐 마느냐의 기습인데 어설픈 애들로 보냈을 리가 없었다.

“넌 여기서 구경해도 되나?”

내 물음에 혼령이 곧장 손을 저었다.

“이미 배치는 끝냈지.”

“뭐 그렇다면야.”

어차피 혼령이 직접 나가서 싸운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니니까.

전투를 한다고 정신이 팔려 지휘를 못하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손해일 수도 있었다.

“넌?”

“뭐 이쪽도 마찬가지라.”

“솔직히 우리 애들만으로는 막기 힘들어.”

혼령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들어온 녀석들은 그냥 적당히 강한 녀석들이 아니라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혼령에게 꾸준히 이런 저런 보고가 들어오는 걸 봐서는 이미 전투가 한바탕 시작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미리 준비한 영상을 띄워놔 한 번에 다 확인이 가능했다.

애초에 비밀통로가 어디로 들어오는지는 몰라도.

적들이 노리는 장소는 딱 한 곳뿐이었다.

중앙에 있는 크리스탈.

결국은 그곳을 노려야 이 거점을 탈환할 수 있으니.

영상을 볼 수 있는 곳을 전부 그 근처로 배치해 두었다.

재중이 형이 그 영상들을 보다가 바로 흥미로운 눈빛을 보냈다.

“호오, 전신 이 녀석도 들어왔잖아?”

“그래요?”

“어, 좌측 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중이네. 지금 공성 전체를 지휘해야 하는 녀석이 직접 뛸 정도면 정말 급하긴 급했나 본데?”

최고점에 있는 지휘관이 직접 발로 뛴다?

여유가 있을 때 나가서 싸우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건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고 판단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한방에 사활을 걸었다는 거겠죠.”

전신의 뒤로는 새하얀 갑주를 입은 탱커도 보였다.

저 여자는 지아라고 했었지.

거기다 전에 결투를 했었던 마법사인 낙화까지.

전부 다 프로 팀이었던 녀석들이다.

“거기다 연도 보이네요.”

연은 전신과 정 반대인 우측 방향에서 치고 오는 걸 봐서 한쪽이라도 성공하길 바라는 게 아닐까.

어찌 되었든 한 곳만 뚫으면 성공이니.

“북쪽도 나왔다.”

북쪽은 산맥으로 나가는 길이라 정말 어지간해서는 병력을 배치할 일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북쪽 병력들은 시가지를 쭉쭉 밀고 들어오며 거리를 한 번에 좁혀갔다.

북쪽의 리더 역시 이전에 본 적이 있는 녀석이었다.

“저 녀석, 데스네요.”

네임드 템인 글래시어를 들고 있던 바로 그 녀석.

저 녀석 하나만으로도 어지간한 유저들은 전부 베어내고 지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두 곳의 비밀 통로 역시 마찬가지.

일제히 적들이 튀어나오며 빠르게 중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정예 병력이다 보니 숫자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저들 하나하나가 일당백은 할 수 있는 녀석들이겠지.

거기다 입고 있는 장비들 역시도 지금껏 보지 못했던 각종 이펙트를 내면서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저들의 장비 레벨은 현재 구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보면 된다.

그동안 네임드들을 독점하다시피 했으니.

개개인의 실력도 실력이고.

아마 그동안의 만난 어떤 녀석들과 비교해 보더라도 이 녀석들이 강할 것이다.

“쉽지 않겠네요.”

“미리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말이야.”

재중이 형은 앞으로 있을 일들이 즐거워 보이는지 한껏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거 참, 녀석들을 직접 상대하지 못하는 게 아쉽네.”

조금 아쉬운 표정과 함께.

“형이 지금 붙으면 바로 정체가 들통 날걸요.”

“알아. 어지간히 날 상대해본 녀석들이라 말이지.”

재중이 형이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이유 중에 하나.

녀석들이 재중이 형과 무기를 맞대어 보면 그 순간 바로 눈치챌 것이다.

지금의 위장 신분을.

그러면 정말 일이 골치 아파지게 돼.

재중이 형도 이걸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전면에 나서지 못 했다.

그리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

녀석들과 직접 상대해 본 적이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스펙은 녀석들을 상대하기에 조금 모자란 감이 없잖아 있었다.

거기다 르아 카르태는 거의 봉인하다시피 싸워야 하니.

차포 떼고 장기를 두는 셈이랄까.

가득이나 부족한 전력에 한 손을 놓고 싸우라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전투가 불가능해.

“조만간 붙을 기회가 있겠죠.”

“어, 꽤 기대하는 중이다. 이 일만 끝나면 말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히 못을 박아 둬야 했다.

영상에서는 계속 적들이 중앙 크리스탈을 향해 달리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걸 본 재중이 형이 날 보면서 피식 웃어 보였다.

“용케 여기까지 생각했네.”

“네, 엉덩이 무거운 녀석들을 한 번에 다 끌어들이려면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아서요.”

전신이나 연 같은 녀석들은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잡기가 힘들었다.

주변에 녀석들을 지키고 있는 유저들도 다수인데다가 애초에 지휘를 위해 일선에 바로 나오는 경우도 없을 테니.

아마 그대로 뒀으면 이 공성이 끝나갈 때쯤이야 얼굴을 한 번쯤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 너무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꺼내두었으니까.”

“안 들어오고는 못 배기겠죠.”

비밀통로의 존재를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둔 것은.

녀석들을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그리고 녀석들도 비밀통로를 통해 한 번에 공성을 끝낼 수 있으니까 다소 위험이 있음에도 이렇게 치고 들어온 것이었다.

서로의 노림수가 교차하는 지금 이 때.

결국 승리는 누구의 준비가 더 잘 되었느냐겠지.

“준비는?”

“잘 해놨어요. 여차하면 나설 수 있게 준비도 더 해놨고요.”

“괜찮네. 혼령은 모르지?”

“네. 알면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큭, 알아도 했을걸?”

“그래요?”

“뭐 그런 녀석이니까.”

재중이 형이 웃자 나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그럼 한 번 지켜보자고요.”

* * * * *

상황은 꽤나 급박하게 흘러갔다.

비밀통로를 통해 나온 적들이 순식간에 중앙 크리스탈 쪽으로 파고 들어오자 일단 지키고 있던 병력들이 1차적으로 녀석들을 막아섰다.

“으악! 또 죽었어!”

“젠장! 무슨 새끼들이 이렇게 강해?!”

“하, 진짜 뭐 이렇게 쌔냐. 못 막겠잖아.”

“여기서 전부 죽더라도 어떻게든 막아!”

“몇 초라도 막으면 본대가 온다!”

“억지로 몸으로 틀어막어!”

당연하겠지만 순삭에 가까울 정도로 적들에게 목을 내어주고 그 자리에서 전멸해버렸다.

물론 그들이 희생이 헛되지만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을 벌어줌으로써 패황의 병력들이 중앙 크리스탈에 달려올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었으니까.

거기다 부활해서 기다리고 있던 유저들까지 바로 도착해 합류해 바리게이트를 쌓아 1차 저지선을 만들어내었다.

아무리 적들이 강하다고는 하나.

이쪽의 전력은 그들 못지않게 몰려들었다.

어떻게든 급하게 막아낸 모습이랄까.

“여기까지다! 이 새끼들아!”

“쥐새끼처럼 들어오다니.”

“이곳부터는 허락 받고 지나가라고!”

“바리게이트 더 두껍게 쌓아! 절대 지나가게 하면 안 된다!”

“부활한 애들 빨리 돌아오라고 해!”

하지만 이렇게 급조한 병력들이 적들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곧 적들의 압도적인 강함에 처절할 정도로 밀려서 죽어나갔다.

“끄악! 이렇게 죽을 수는!”

“버티라고! 버티면 무조건 이긴다!”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어! 어차피 녀석들은 더 이상 부활 못 해!”

“그래! 물고 늘어지면 우리가 이기는 싸움이야!”

이들은 지금의 우위가 어디에서 오는지 아주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거의 몸을 날리다시피 적들과 함께 죽는 경우도 허다하게 나왔다.

같이 죽으면 이쪽은 부활할 수 있지만.

적은 그게 불가능하니까.

그리고 이런 거센 저항에 전신도 순간 눈썹을 꿈틀 거렸다.

“쉽게 가는 법이 없군.”

물론 그 와중에도 적들의 목을 대검으로 끝없이 날려냈다.

확실히 나기 난놈이네.

한 번에 수 명의 목을 날려 버리는 걸 보면.

그것도 싸운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페이스가 떨어지지도 않았다.

저건 지금 최고의 힘을 낸 상태도 아니라는 거다.

거기다 그를 지원하는 녀석들도 다 한 가닥 하는 녀석들이니.

“혼령, 이제 나서야겠는데.”

이미 전장은 혼잡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조금 더 이 상태를 유지하면.

패황의 병력은 패퇴한 상태로 중앙 크리스탈을 내어주어야 할 것이다.

“흠, 알았다.”

그리고 혼령이 지시를 하자 갑자기 주변의 시가지에도 끝도 없이 많은 병력들이 튀어나가기 시작했다.

혼령이 미리 대기해놓은 병력들의 습격.

이런 대규모 습격에 전신의 표정이 한 번에 구겨졌다.

그래.

어디 한 번 이것도 버틸 수 있는지 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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