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5화 승자 없는 전장 (5)
잠시 한숨을 쉰 혼령이 곧 살짝 짜증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휴, 아무래도 지원을 가야겠지.”
“역시 그런가?”
“흠, 알고 있었나?”
“아니, 선택지가 없어 보이길래.”
“그렇지. 안 갈 수가 없는 노릇이지. 적들의 본대가 다 빠진 상태에서 내가 가지 않으면 오히려 내 쪽에서 욕을 먹게 될 거다.”
혼령이 말한 대로다.
현재 연의 페가수스 연합을 비롯해 적들의 주력이 모두 거점 패황으로 향했는데 혼령이 여기 죽치고 있으면 아군들의 의심스런 눈초리를 피할 수가 없을 터.
“쩝, 게다가 거점 패황까지는 포탈 한 번에 바로 이동할 수 있으니 안 갈 수가 없잖아.”
이것도 혼령이 안 갈 수가 없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전에 적들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거점들을 포탈로 묶어서 서로 이동이 가능했다.
먼 곳에서 서로 거리를 줄이는 최고의 방법이기는 한데.
지금 이 방법이 혼령의 뒤통수를 세게 때리고 있는 중이었다.
발 한번 놀리면 바로 갈 수 있는데도 안 간다라…….
이건 자길 욕해 달라고 대놓고 광고하는 것과 다름없지.
그걸 잘 아는지 혼령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기껏 평판을 여기까지 쌓아왔는데 말이야. 이것 한 번에 다 까먹을 수는 없어.”
안 그래도 세 거점을 적들에게 다 뺏으면서 혼령의 주가는 최고를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당장 다른 연합장들도 혼령의 한 마디에 아무 말도 못 하지 않았는가.
그만큼 지금의 혼령은 모든 것을 가진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에 한 번 실수하면 그 평판이 어떻게 될진 눈에 선하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네.”
“그래, 아무튼 우린 패황을 지원하러 갈 건데 넌 어쩔 셈이야?”
혼령은 이미 마음을 굳혔는지 내게 물어왔다.
그러자 재중이 형에게 시선을 돌렸다.
<윈> 어떻게 할까요?
내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재중이 형이 대답해주었다.
<심연> 음, 우리는 남는 편이 낫겠다.
<윈> 그래요?
<심연> 어, 가면 해먹을 게 많기야 하겠지만. 언제까지 묶여 있어야 할지 몰라. 저 개싸움에 시간을 계속 쓸 생각이 아니라면.
원래의 목적에 집중하라는 거려나.
애초에 우리가 원했던 건 이미 거의 다 그려 놓은 상태였다.
조금 더 개입을 하면 그림이 좀 더 좋아지긴 하겠지만.
<윈> 그럼, 우린 슬슬 손을 떼죠.
<심연> 그래, 어차피 하루 이틀에 끝날 싸움이 아니야. 중간에서 균형만 맞춰 주면 몇 주, 몇 달이고 싸울 기세니까.
원래 부족했던 반통제 연합의 세력은 이미 상당히 올라온 상태였다.
거기다 지금도 급속도로 그 세력을 불리는 중이었다.
우리가 중간에 개입하긴 했지만 어쨌든 중간에 거점 세 곳을 가져오는 일까지 성공했으니 이미 세력은 양쪽이 비슷하다고 봐야 하겠지.
특히 거점을 가지고 와서 수비적으로 버티기만 하면 이쪽의 숫자가 많기에 언제까지라도 버틸 수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어떤 특별한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심연> 앞으로 초월 쪽 애들도 계속 공성을 한다고 다른 데는 신경도 못 쓸 거야.
<윈> 원하는 대로 됐네요.
그리고 공성과 수성을 번갈아 계속하다 보면 엄청난 전쟁 자금이 들어가게 된다.
무한한 소모전이라고 할까.
당장 득 될 건 없는데 싸우기는 싸워야 하는.
그런 상황에 두 거대 연합이 말려든 셈이었다.
이젠 자존심 때문에라도 어느 한쪽이 먼저 포기하진 못한다.
물론 실질적인 이득 역시도 포기할 수 없을 테지.
“우린 이 거점을 지키는 걸로 이야기가 됐어.”
“흠, 그래? 같이 가면 큰 도움이 될 텐데 말이야.”
다소 아쉽다는 듯 말하는 혼령에게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우리가 가 봐야 수성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안 될 거야. 적들이 성벽을 뚫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에야.”
사실 이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공성 때야 우리가 성벽을 타고 넘어가서 성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지만.
반대로 수성 때는 그냥 성벽 위에서 계속 멍 때리는 일만 생길지도 모른다.
거점 패황은 패황이 워낙 심혈을 기울여 성벽을 올려놔서 아주 방어가 탄탄하다니까.
지금이야 총공세 때문에 밀린다고 해도.
혼령의 연합을 비롯해 지원군이 연달아 지원을 가면 그 이야기는 쏙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긴. 쪽수가 어느 정도 맞춰지고 나면 결국 수성은 숫자보다 돈이지. 타르포를 한 번 쏘는데 드는 돈만 해도 어마어마하니까.”
“엄살은. 네가 그 정도 돈에 놀랄 정도는 아니지 않나?”
일단 혼령은 돈이 많다.
그것도 아주.
이건 아마 패황도 마찬가지일 테고.
타르포를 쏘고 다시 쏘는 데 걸리는 재장전 시간.
그 시간 동안만 성벽을 커버해줄 병력만 있다면.
수성 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을 할 수가 있었다.
한 마디로 타르포를 쉴 새 없이 쏴댈 수 있는 자금만 있으면.
어떻게든 길게 수성을 이어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나라고 그 돈이 아깝지 않은 건 아니라고. 수성 한 번 하고 나면 스포츠카 몇 대는 그냥 날아가니까.”
공성을 거는 녀석이나.
방어하는 녀석이나.
돈이 많이 들어가는 건 매한가지다.
결국 이긴 상태로 거점을 유지하면서 계속 세금을 걷거나 주변 사냥터에서 수익을 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공성과 수성을 번갈아 하는 중이니.
돈이 무한정 깨지기만 하겠지.
어지간히 자본이 없으면 거점을 굴리지도 못한다는 게 여기서 나온 말이었다.
“뭐 그건 알아서 해.”
“매정한 녀석 같으니라고.”
내 돈 들어가는 일이 아니라서.
“그럼, 바로 출발할 거냐?”
“안 갈 순 없으니까.”
“흐음, 그럼 적당히 시간만 끌면서 놀다가 와.”
“적당히인가…….”
“패황이 너무 이겨도 곤란하잖아?”
“그렇긴 하지.”
혼령이 지금 제일 골치 아플 것이다.
가서 활약을 해봐야 패황이 다 가져갈 거고.
그렇다고 안 가자니 유저들에게 욕먹을 거니까.
그럼 답은 하나다.
“적당히 하다가 패황이 지는 그림이 제일 보기 좋을 것 같네.”
“흠, 참고하도록 하지.”
“그렇다고 너무 티 나게 깽판 놓지는 말고. 눈치라는 게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 정도는 알아서 한다.”
“다 된 밥에 재 뿌리지만 말라고.”
혼령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 기회를 놓칠 녀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어떻게든 패황이 한 번은 망가져 줘야겠지.
그 시작은 아마 거점 패황을 뺏기는 일부터 시작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점을 너무 쉽게 넘겨줬다가는 오히려 전쟁이 너무 불리하게 돌아가게 된다.
혼령이 앞으로 잘 하기를 바랄 수밖에.
그렇게 수도 없이 많은 유저들이 거점 패황으로 가는 포탈 앞에 줄을 섰다.
“지원 가야 한다며?”
“아, 방금 전까지 힘들게 싸웠구만.”
“칫, 우리가 도와달라고 할 때는 씨알도 안 먹히드만. 당장 죽을 거 같으니까 계속 와달라는 건 뭐냐.”
“패황 이놈도 배가 불렀어.”
“싸우기만 계속 싸워 주고 패황이 주는 건 하나도 없잖아.”
“말이 반통제지, 정작 사냥터는 가 보지도 못하는데.”
“그래도 이겨야 통제를 안 할 거 아냐.”
“이번에 이기면 좀 달라지려나?”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 전쟁만 하다가 날린 돈이 얼마나 많은지 허리 휘어지겠네.”
그런 유저들의 웅성거림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그런 상황은 오지 않은 거야.
당장 거점을 유지하고 버틴다고 해도.
사냥터를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초월 쪽 연합 녀석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어떻게든 사냥터를 돌아다니며 상대편을 쓸고 다닐 것이다.
이 전쟁에서 어느 쪽이 이기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지.
앞으로 멀고도 긴 전쟁이 남았다는 걸.
그때쯤 가면 알게 될지도.
“자! 가자!”
곧 수천에 달하는 유저들이 싹 포탈로 사라져 버리자 횡하니 빈 공간이 확 눈에 들어왔다.
성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던 유저들도 포함해서.
그 결과, 거점 용아에는 우리를 포함해서 레스의 용병 정도만이 남게 되었다.
“이거 참, 빈 곳이 너무 많아 보이네요.”
“정말 그러네.”
다들 자리를 비우자 다른 유저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장님과 모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이에요.”
“허, 그래. 이게 다 무슨 일이냐. 빨리 오라고 해서 오긴 왔다만.”
거점 용아를 먹은 것부터 해서.
초월 연합과 패황 연합의 싸움 한 가운데 일하고 있는 것까지.
사장님이 모르는 일이 너무 많긴 했다.
“음, 우리가 편히 움직일 수 있는 포석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게 다 말이냐?”
“네, 일종의 위장이죠.”
그리고는 미리 생각해둔 것을 사장님께 말했다.
“이제 때가 왔어요. 길드원들 전부 복귀시키죠.”
“흐음, 그래?”
“네, 이제 저들이 서로 치고받는 동안 최대한 위로 치고 나가야 해요.”
애초에 이것 하나만을 보고 판을 짠 것이었다.
우리가 어디서 뭘 하든.
전혀 신경 쓸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지금은 양쪽 다 방해는커녕 저들끼리 싸운다고 바쁠 테지.
서로 갉아먹는다고 바쁠 때.
우리는 쭉 치고 나간다.
“허, 오랜만에 부활하겠구나.”
“부활 정도가 아니라 압도해야죠.”
그냥 적당한 선만 그을 거라면 이 정도까진 안 했다.
최소한 이전 수준 이상.
그 포지션을 찾으려면.
“일단 사냥터부터 개척해야겠어요.”
그것도 어중간한 사냥터로는 부족했다.
안 되더라도 발록이 있던 용암 지대 수준의 사냥터.
혹은 그보다 더 윗급의 사냥터까지 올라서야 해.
적들 이상의 레벨로 올라서려면.
사실 이것도 부족한 면이 있었다.
“아, 가기 전에. 발록, 뱀, 퀸.”
“불렀나?”
“무슨 일이야? 또 싸워?”
“또 죽이면 되나?”
그런 셋의 물음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어, 지금 이 거점을 포위하고 있는 저 껍데기들 보이지?”
연이 쪽수만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남겨두고 간 유저들.
아마 저들은 말단에 속해 있는 녀석들일 것이다.
실질적으로 레벨이 그렇게 높지는 않은.
제대로 된 녀석들은 지금쯤 거의 거점 패황 쪽에 도착했을 테니.
이젠 저들과 합류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보여주기식으로 남겨진 녀석들이라는 거다.
그런 녀석들도 거점의 성벽 위에 병력들이 대거 빠져 횡하니 비어 버리자 조금 다른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아주 발칙한 생각을.
“어? 병력 다 빠졌잖아?”
“정말이네.”
“흐음, 혹시 함정일까?”
“아니야, 방금 본대에 물어봤어. 정말 다 빠진 거라는데?”
“에이, 설마 우리를 두고 병력을 다 뺐다고?”
“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야!”
“어…… 본대에서는 그냥 대기만 하고 있으랬잖아.”
“야야, 성벽 싹 빈 거 안 보여? 당장 쳐들어가기만 하면 거점이 손에 들어오는데 안 할 거냐?”
“먹기만 하면 대박이긴 한데…….”
“우리 한번 일내 보자!”
“그래, 언제까지 녀석들 밑이나 닦아줄 순 없잖아. 거점 하나 가지고 있으면……!”
“크흐, 맞아. 그냥 팔기만 해도 부자 된다고.”
“가자! 거점을 먹는 거야!”
한동안 웅성거리던 녀석들이 결국 거점을 향해 칼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대략 삼사백은 되어 보이나?
정상적으로 공성을 하기에는 부족하나.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상당히 많은 숫자였다.
아마 이 정도 남겨놓고 가면 거점에서도 함부로 나서지 못할 거라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지.
그리고 그런 녀석들을 보면서 네임드들에게 말했다.
“저것들, 싹 쓸어 와.”
널려 있는 경험치와 아이템들이라면.
먼저 줍는 게 임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