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4화 승자 없는 전장 (4)
혹시 반응이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연은 혼령이 도발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 반응을 해주었다.
“저 녀석. 자존심이 남다르거든. 거기다 자기 밑이라 생각하는 녀석에게 당하면 잠도 못 자는 성격이야.”
“확실히 그래 보이네요.”
“어, 예전에 예선에서 이름 모를 신인에게 한 번 잡힌 적이 있는데 그때 정말 장난 아니었다니까. 심지어 그 신인이 대놓고 녀석을 도발하자 방송이고 뭐고 뒤집어 엎어버렸어.”
“저 돌다리를 두들기는 신중한 성격이 말이죠.”
그러자 재중이 형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웃어 버렸다.
“조심성이 좋은 것과 성질머리는 또 다른 문제라……. 준비하는 스타일이 그렇다는 거지, 그게 녀석의 자존심을 대신해 주진 않아.”
그렇게 재중이 형이 미리 알려준 덕분에 혼령을 통해서 녀석을 도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보란 듯이 연이 발끈하는 반응도 보여 주었다.
“바로 쳐들어올까요?”
“으음, 그건 아니고. 욕을 좀 들어먹더라도 아예 이성이 뒤집힐 정도의 멍청이는 아니니까.”
“그러면 도발이 크게 의미가 없는 것 아니에요?”
“아니, 의미는 있어. 녀석이 혼령에게 집착하게 된다는 것.”
“흐음, 그런가요.”
“만약 녀석이 다른 생각으로 움직이면 곤란할 수도 있는데. 이곳에만 집중해주면 녀석의 행동을 제한하기가 좋으니까.”
재중이 형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만약 연이 이곳을 포기하고 다른 연합들과 힘을 모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옮겨가면 녀석의 행동을 예측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면 결국은 마이너스라는 거지.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덤벼주는 편이 우리가 예측하기에는 훨씬 편했다.
<심연> 혼령은 뭐…… 미끼라는 거지.
<윈> 하하. 혼령이 알면 슬퍼하겠군요.
<심연> 아니, 녀석도 연이 이곳 거점에 집착해 주면 더 좋을 거다.
<윈> 그래요?
<심연> 좋은 핑계잖아. 패황의 요청을 거절하기에는.
<윈> 하긴. 패황이 계속 지원을 보내라고 하면 거절할 명분으로는 최적이긴 하네요.
만약 아무런 위협도 없는 상황에서 계속해서 혼령이 지원을 거절한다면 누구나 다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혼령이 다른 마음을 품었을 지도 모른다고.
그런 의심이 싹트면 그때부터는 조금씩 거리를 두다가 결국 지금의 관계도 어그러지겠지.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다.
적어도 적들의 세력을 확실히 깎아먹은 다음에야…….
<심연> 아직 패황을 버리기에는 아까운 패기도 하니까.
재중이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혼령을 밀어주는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패황을 아예 버리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패황과 혼령이 당장 분리가 되면 상황이 또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모르니까.
아주 적당히 둘을 구슬려서 전신과 그들이 포함된 다른 연합들을 부수는데 쓰면 되는 일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혼령은 몇 번의 도발을 더 한 뒤에야 후련하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 시원하군. 이것도 한 번씩 해볼 만은 하겠어.”
“만족했나?”
“나름?”
“이제 연이 널 잡아먹으려고 기를 쓸 텐데?”
“그동안 당한 걸 생각하면 아직 약해.”
이 녀석도 나름 뒤끝이 있단 말이지.
전에 연이 거점 페가수스를 가지고 있을 때 당했던 걸 지금 전부 털어버린 모양이었다.
혼령이 곧장 내게 물었다.
“그래서 계획은?”
“일단은 녀석이 이 거점에 달려 들어주면 제일 좋아. 이쪽은 꽤 준비를 잘해 놨으니까.”
그러면서 주변 성벽을 가리켰다.
전에 연이 준비했듯이.
성벽을 따라 쭉 나열되어 있는 수많은 타르포들의 진열을 본 혼령이 흡족한 표정과 약간의 놀라움을 담아 물었다.
“너, 돈이 꽤 많은데? 이걸 한 번에 하려면 자금이 장난 아닐 텐데 말이야.”
“아, 그냥 용돈 좀 풀었지.”
“흐음, 너 혹시 이쪽 사람이냐?”
그러자 혼령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내게 묻자 이번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면서 넘어갔다.
“글쎄. 알아서 생각해.”
“흠, 하긴 상관없으려나.”
이쪽 사람이라…….
역시 확실히 뒤가 있는 녀석이네.
“혹시 자금이 부족하면 말해라. 저 녀석을 엿 먹이는데 쓴다면 나 역시 투자할 의향이 없진 않으니.”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지. 아직은 아쉬운 게 없어서 말이야.”
혼령이 부담해 주면 좋긴 한데.
그러면 사사건건 간섭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
우리 관계는 딱 이 정도가 좋지.
그렇게 거점의 공성이 가능해지고 난 뒤에는 계속해서 연과 우리의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특히 연 쪽은 전 인원을 거점의 후문에 포진해 놓고 기다리는 듯이 가만히 대기만 했다.
당장이라도 연이 쳐들어올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
그리고 그런 대치가 계속되자 슬슬 거점 안에서도 지친다는 말들이 나왔다.
“아, 이제 접속 끊어야 하는데…….”
“저 새끼들은 싸우려면 싸우지. 뭘 저렇게 기다리고만 있어?”
“답답하네.”
“몰라, 너무 오래 있어서 나가야 함.”
“일 갔다 왔을 때 털려 있진 않겠지?”
아군의 약점 중 하나.
그건 바로 결집성이 적들에 비해 상당히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거기다 하루 종일 접속해 있을 수 없는 사람도 다수 포함되어 있지.
반면에 적들은 달랐다.
밥 먹고 이것만 하는 녀석들이니까.
당장에야 주말이 섞여서 접속 시간이 최대치였지만.
평일로 넘어가게 되면 그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어 버린다.
“아까 바로 들어와 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어, 녀석도 이대로 기다리면 자기들이 유리한 걸 너무 잘 알고 있어.”
모래알 같은 아군과 한데 뭉친 적군이라.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 쪽은 거점 안에서 방어하는 입장이라는 거다.
그것도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거점에서.
“생각보다 더 돌다리를 두들기네요. 도발이 별 의미가 없었으려나.”
“아니, 속으로 이를 갈고 있을걸. 그런데도 안 들어온다는 건…… 기다리는데 다른 이유도 있다는 거야.”
“접속 시간요?”
“그것도 그런데. 그보다는 더 중요한 뭔가가…….”
재중이 형이 그렇게 말하더니 잠시 뭔가 생각을 하고는 곧장 전사 형에게 연락을 넣었다.
<심연> 거점 패황 쪽 상황 지금 알 수 있어?
<최강쉴더> 흠, 잠시만요.
그러더니 얼마 뒤 전사 형이 알려준 내용을 듣고는 재중이 형이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지었다.
“왜 그래요?”
“아, 이거 참. 한 방 먹었는데?”
“네?”
“저 앞에 저 녀석들. 죄다 위장이다.”
“음…… 설마.”
그리고 재중이 형의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대로 거점 패황을 치겠다?”
“어, 1군 녀석들을 죄다 빼갔어. 지금 저기 있는 건 전부 껍데기뿐이야.”
“하…… 제대로 한 방 먹었네요.”
당연히 연이 이 거점을 탈환하기 위해 자신의 연합 전 병력을 퍼부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실제로는 싸울 것처럼 위장만 한 상태로 주력 병력을 빼돌린 것이었다.
“이거 참, 못 보던 사이에 다들 대가리 굴리는 게 좋아졌단 말이지.”
재중이 형도 피식 웃으면서 옆에 있던 타르포 하나를 장전해 적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곳을 조준했다.
그리고 그대로 타르포를 발사하자 적들이 화들짝 놀라 혼비백산하며 흩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마치 준비가 덜 된 딱 그런 군대를 보는 느낌이랄까.
“저 봐. 제대로 반응도 못한다니까?”
“그럼, 지금 연은…….”
“아마 전신의 연합과 연계하기 위해 붙었을 거야.”
“연은 전신을 싫어하지 않았어요?”
“공은 공이고. 사는 사겠지. 하기 싫다고 할 일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지금 녀석들에게는 가까운 부활 지점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았을 거야.”
나름 녀석들 안에서도 사정이 있다는 거려나.
“그런데 그럴 거면 거점 패황보다는 다른 세 거점이 더 차지하기 좋지 않아요?”
“아니, 당장 차지하기는 수월할지는 몰라도. 그러면 결국 앞뒤로 포위당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니까. 썩 좋은 선택지는 아니지. 거점 패황을 먹게 되면 적어도 정면만 방어하면 돼. 후방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확실히 거점 패황의 후문은 곧장 산맥과 이어지니까 방어하기에는 훨씬 수월하겠네요.”
산맥 초입에 막혀 있어서 유저가 돌아갈 수 있는 지형이 아니었다.
일단 차지할 수만 있다면.
앞뒤가 다 열려 있는 다른 거점들보다는 거점 패황이 훨씬 방어하기가 유리해진다.
“그게 지금 패황의 세력이 열세이면서도 전신에게서 거점을 계속 방어해낼 수 있는 이점이지.”
“정면만 방어하면 되니까.”
그리고 둘의 세력이 팽팽한 상황에서.
이젠 오갈 곳이 없어진 연의 페가수스 연합이 합세하면…….
“이번엔 뚫리겠네요.”
“어, 패황은 이거 못 막아. 심지어 연뿐만 아니라 우리가 뺏은 다른 세 거점의 연합 유저들까지 전부 한 곳에 모여 있어. 패황 혼자서는 무리다.”
우리가 차지한 거점마다 각 연합들이 다 포진되어 있었다.
그런데 연이 거점을 방어하기 위해 그들을 전부 불러들였고.
지금 그들은 전부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튕겨나간 상태였다.
그런 병력들을 다 이끌고 거점 패황으로 향했다면.
당연히 막기 힘들 테지.
거기다 거점 패황을 차지하면 좋은 점은 또 있었다.
산맥으로 이어지는 고렙 사냥터를 전부 차지할 수 있다는 점.
가만히 두면 적들의 세력이 커지는 걸 막을 수 없을 거야.
“지원을 가야 할까요?”
내 물음에 잠시 고민을 하던 재중이 형이 말했다.
“혼령을 밀어주려면 안 가는 게 맞긴 해. 어차피 거점 패황이 밀리더라도 녀석들은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되는 일이라. 조금 상황이 복잡해지기는 해도 오히려 이쪽이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을 테니. 장기적으로 봐서는 나쁘진 않아.”
“장기적으로 봐서는 말이죠.”
“하지만 당장 거점 패황이 밀리고 다른 거점이 하나라도 더 밀리면 상황은 달라지겠지.”
“결국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거네요.”
잠시 기다리다가 혼령이 오자 물어보았다.
“상황은 들었지?”
“흠, 우리가 한 방 먹었다는 것만. 그리고 확인해 보니 다른 거점들 역시도 마찬가지라는군.”
그 말에 재중이 형을 보자 재중이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연> 확실히 병력을 다 뺐네. 거점 패황을 치러.
<윈> 네, 이곳만 그런게 아니었어요.
혼령의 말은 우리의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혼령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지원 말인가?”
“어, 너도 그렇지만 너 말고도 다른 거점들을 차지한 연합장들도 생각이 있을 거 아냐.”
어차피 이 녀석들은 우리의 연합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결국에 결정은 이 녀석들이 한다는 거지.
우리가 그 결정을 막을 방법은 딱히 없다.
대놓고 반대를 하면 나중에 분명히 말이 나온다.
과연 이 녀석들은 어떻게 판단을 했을지 궁금하네.
당장의 세력 보존을 원하면 지원을 안 가는 게 맞아.
하지만 패황이 대패하고 돌아오면 또 전체 병력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중요한 거점 하나를 날리는 것도 포함해.
그리고 가장 큰 단점은 패황이 대패했다는 사실 자체랄까.
이건 앞으로도 치명적인 문제로 남을 것이다.
이 단체를 이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
한참을 고민하던 혼령이 결국 입을 열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