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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933화 (923/1,404)

#933화 승자 없는 전장 (3)

사람을 엿 먹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좋은 것은 역시 본인 돈으로 본인을 엿 먹이는 게 가장 크지 않을까.

드랍템 수입으로 가득 채운 거점 용아가 위풍당당하게 성벽을 올리자 채팅창에는 연을 비웃는 글들이 연신 올라왔다.

- 와, 성벽 올라가는 속도 보소.

- 용아? 저긴 어디 길드냐? 돈 많은가 본데?

- 몰라. 처음 들음.

- 상위 랭크된 길드도 아닌 것 같고.

- 숨겨진 비밀 길드라도 되는가 보지.

- 하긴 패황 연합이 하도 많은 길드들이 붙어서 누가 누군지도 잘 모름.

- 연은 완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네. 저거 다시 무슨 수로 뺏어올 거야?

아직 예전의 난공불락 상태로 돌아갔다고 하기는 몇 프로 부족했지만 지금의 투자만으로도 충분히 공성을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혼령과 함께하는 연합들도 방어에 한몫할 테니.

더군다나 우리는 딱히 병력을 밖으로 내보낼 생각도 하지 않는 중이었다.

패황이 지원을 요청하더라도.

이곳 방어에 집중해야 한다는 핑계로.

지금은 용아가 된 거점의 성벽 위에 올라와 바깥을 바라보니 저 멀리서 다수의 병력들이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꽤 많이 모였네요.”

“그래, 이곳을 뺏지 못하면 아주 웃음거리가 될 테니까.”

재중이 형이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나도 역시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똥줄 타겠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채팅창에는 우리를 욕하는 글들이 연신 올라오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혼령에게 하는 욕들이었지만.

우리야 애초에 정면에 나선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연은 우리가 뒤에 있는 것조차도 아예 모를 것이다.

혼령이 전면에 나서서 싸워 주는 데다가 거점은 레스의 소유.

겉으로 우리가 드러날 일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혼령도 어느새 성벽에 올라서서는 내게 말했다.

“저것들 도발이 꽤 센데?”

“아, 왔어?”

“그래, 하도 욕을 들어서 나도 한마디 해주려고 올라왔다.”

“참으라고. 앞으로 갚아 줄 기회는 많으니까.”

그렇게 거점 주변으로 몰려드는 병력들을 바라보다가 혼령에게 물었다.

“패황은?”

아주 짧지만 핵심이 담겨 있는 물음.

그리고 혼령은 그에 맞는 대답을 해 주었다.

“지원을 보내라더군. 거점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라고.”

“그래서?”

내 물음에 혼령이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고는 다시 말했다.

“휴, 이거 참. 부담 가득하게 만드는군.”

“어차피 한 번은 해야 할 일이잖아.”

“그렇긴 하지. 아무튼 지원은 거절했다. 보다시피 우리도 코앞에 적들이 가득해서 말이야.”

“그래, 저들이 좋은 변명 거리가 되어 주겠지.”

현재 거점 용아를 탈환하러 저렇게 많은 병력들이 포진해 있는데 여길 비우고 지원을 간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무리였다.

만약 패황이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억지로 혼령의 휘하 병력을 자신에게 불러들였다가 이곳 거점을 털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패황은 돌아오는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대로 하기에는 혼령이 너무 컸지.

“그리고 아예 지원을 보내지 않은 것도 아니니까.”

“아, 그렇지. 걔들 다 어떻게 됐어?”

그러자 혼령이 날 보면서 미소 지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물어보는 건가?”

“어, 궁금하네.”

“안 그래도 이야기하려고 했다. 지금 중간에서 고립되어 있다더군.”

“역시 그런가…….”

“예측한 거냐?”

“아니 뭐…… 걔들이 갈 곳이 따로 있어야지.”

혼령의 연합이 거점을 치는 동안 협곡을 넘어갔던 팔천의 병력들.

그들 중 꽤 다수가 협곡을 넘어간 것으로 확인되었다.

문제는 그렇게 협곡을 넘어가긴 했는데…….

정작 넘어가서가 문제였다.

뒤로는 페가수스 연합.

그리고 정면에는 초월과 그들의 연합들이 앞뒤로 포위한 형국이랄까.

그 말을 듣고는 재중이 형에게 말했다.

“전신이 지원군을 끊어버리는 걸 택했네요.”

“흐음, 역시 뒤가 신경 쓰이는 거려나.”

지원군에 전신이 어떻게 반응할지가 제일 궁금했는데 지금 그 궁금증이 풀린 셈이었다.

거점 패황을 그냥 뚫을 수도 있었음에도 확실히 뒤가 안전하게 하는 데 초점을 둔 것 같았다.

“덕분에 패황은 시간을 좀 더 벌었겠네요.”

“지원을 안 보낸 것도 아니니 패황도 이젠 할 말이 없겠지.”

결국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이 거점 용아만 잘 지키면 된다는 뜻이었다.

그때 혼령이 나와 재중이 형을 보면서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글쎄. 저들이 여기로 계속 덤벼주는 게 가장 좋긴 한데…….”

우리가 공성을 할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지금은 오히려 수성을 하는 상황.

이 성벽과 방어 무기들이 있으니 전과 달리 전력은 오히려 우리가 우세하다고 봐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적들이 계속 헤딩을 해주면 그것만큼 좋은 건 없으니까.

그런데 적들이 마구잡이로 덤비게 하려면 뭘 해야 하려나…….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곧 혼령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건 오직 혼령만이 할 수 있는.

딱 그런 일이다.

“음, 혼령. 너 혹시 연기 좀 하냐?”

“뭐?”

* * * * *

상황은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다.

우선 협곡을 넘어갔던 팔천의 병력들.

이들은 중간에 고립되어 거점 패황으로 가지 못하고 다시 협곡을 넘어오지도 못한 채로 적들의 포위를 받아 점점 괴멸되어 갔다.

그렇게 상대편 진영의 방송에 나온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앞뒤로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에서 죽어 나가는 모습이 방송에 나가는 건 그만큼 쪽팔리는 일이기도 했고.

“완전히 포위됐습니다!”

“젠장.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야!”

“저 새끼들 지금 패황에게 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쳇, 오히려 우리가 포위당하다니…….”

“하아, 이러면 힘들게 추격을 따돌리고 협곡을 넘어온 이유가 없잖아.”

“모두 검을 들어라! 끝까지 하나라도 더 죽이고 간다!”

“씨발, 우리 다 죽게 생겼는데.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무작정 밀어넣기만 하면 해결되냐고!”

연합장들의 외침에도 아래의 연합원들은 그다지 호응을 해주지 않았다.

당연히 거점 패황을 공성하는 적들의 뒤를 쳐서 당당히 입성할 생각이었을 텐데.

오히려 포위를 당했으니.

적들을 욕하는 녀석들과 아군들의 무능함을 욕하는 녀석들로 갈라진 상태에서 그렇게까지 좋은 결과가 나오진 않을 것이다.

그 결과, 당연하게도 무려 팔천에 달하는 유저들이 아무런 반항도 해보지 못한 채 짧은 시간 동안 모조리 필드에 누워 죽음의 빛으로 변해 버렸다.

거기다 적들에게 죽으면서 수도 없이 많은 아이템을 드랍해서 적들의 배를 불려 주기도 했다.

이 광경은 방송을 통해 전부 나갔고, 쪽팔린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네요.”

“어, 전신이 주도하니 금방 이렇게 되는군.”

만약 부활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패로 사실상 전쟁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여긴 부활이 있으니.

“곧 우르르 몰려오겠는데요?”

“가 볼까?”

저들이 죽으면 당연히 원래 부활 지점으로 해놓은 거점에서 부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부활을 한 녀석들이 전부 우리 거점으로 포탈을 이용해 돌아왔다.

갑자기 부활석 주변이 환하게 변하며 몇 천의 달하는 유저들이 동시에 들어오자 금세 거점은 북적북적하게 변해 버렸다.

“아씨, 다 죽었네.”

“미치겠다. 검 떨어뜨렸어.”

“난 갑옷. 이거 대체 어디서 복구하냐.”

“망했네.”

애초에 뭔가의 사명감을 가지고 연합에 온 것이 아닌 이상은 저런 반응들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호기 있게 협곡을 넘겠다던 연합장들은 인상을 확 쓰면서 주변을 보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빨리 정비 못 해!? 전쟁 안 할 거야?”

“젠장, 복수할 거다! 이 새끼들!”

“어디 두고 보자고!”

개중에는 차분하게 병력을 정비하는 연합장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저런 모습들이었다.

자신들이 잘못한 건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의욕만 앞서는 딱 그런 모습.

휴.

이런 녀석들을 데리고 무슨 전쟁을 하냐.

슬쩍 혼령을 보니까 혼령도 한숨을 푹 쉬고 있었다.

“너, 쟤들 데리고 정말 이길 수 있겠냐?”

“위로하는 거면 안 하는 편이 좋겠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싸워야 하니까.”

“뭐, 그렇다면야.”

그리고 성벽 위에 올라와 있는 우리를 보고는 연합장들이 부리나케 올라와서 따지기 시작했다.

“아니, 우리가 협곡을 넘으면서 개고생하는 동안 혼령은 뭐 한 겁니까?!”

“포위를 당할 것 같으면 바로 지원을 왔어야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방송을 보면 위기라는 걸 알았을 텐데……!”

“대체 우리가 아군이기는 한…….”

이번엔 오히려 혼령에게 와서 따지는 모습에 재중이 형도 혀를 내둘렀다.

<심연> 와, 얘들 진짜 심각하네.

<윈> 제 말이요.

포위를 당해 죽은 건 지들인데 잘못은 혼령에게 따지는 모습이라.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면 이렇게 나올 수 있는지 오히려 더 궁금해진다.

그렇게 연합장들의 말을 듣던 혼령의 이마에 혈관 마크가 생기는 것 같더니 곧 표정을 내리깔은 혼령이 그들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하, 난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고작 이천의 병력으로 이 거점을 탈환했다. 거기다 다른 두 개의 거점도 내 지시로 탈환할 수 있었지. 그동안 너희들은 대체 뭘 한 거지? 팔천이나 되는 병력으로 멍청하게 적들의 포위를 당해서 전멸한 거? 만약 그게 전부라면 지금 전부 입을 닫는 편이 좋겠군.”

자신들을 노려보면서 서리가 내릴 듯 싸늘한 말에 연합장들의 표정이 싹 죽어 버렸다.

솔직히 입에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지.

훨씬 적은 병력으로 수십 배에 달하는 공적을 낸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오히려 혼령에게 따지고 들다니.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할 수가 없었다.

다들 그걸 아는지 서로 눈치를 보면서 고개를 돌리기 바빴다.

솔직히 이들도 할 말은 있는 것은.

협곡을 넘으라고 한 것은 다름 아닌 혼령이었으니까.

따지고 들면 할 말이 많긴 하겠지만.

결국 결과는 혼령이 다 냈다.

저들은 욕심을 내다가 일을 다 망친 셈이지.

“내게 따진 것에 대해서는 이번에는 참고 넘어가 주겠다. 하지만 다음에도 이런 식이라면 연합에서 자리를 내놓아도 할 말이 없을 거야.”

“하지만…….”

“흠흠.”

“거참. 사람들이 좀 조심하지.”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하하.”

“다 잘해 보자고 그런 것이죠.”

따지러 성벽에 올라왔다가 이제는 혼령의 한 마디에 완전히 주눅 들어 보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이로써 이 연합들의 대세가 완전히 혼령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앞으로 어지간한 일에는 혼령의 명령을 거스르지 못할 테지.

그렇게 주도권을 가져오자 혼령이 나를 바라보았다.

<혼령> 일단 주도권은 내가 가져왔는데. 이제 저들을 어떻게 할 생각이냐?

<윈> 네 생각은?

<혼령> 흠, 난 총알받이로 쓰고 싶긴 한데.

호오.

이 녀석 봐라.

총알받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면 이 녀석도 보통이 아니긴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연합도 아닌데.

<윈> 뭐 좋을 대로. 네 연합이니 알아서 해.

녀석이 알아서 해주면 나야 더 고맙다.

우리야 뒤에서 떨어지는 것만 걷어 들이면 그만.

표면에 나서는 건 결국 혼령이 해야 할 테니까.

그리고 얼마 뒤.

《 거점 용아의 안전지대 설정이 곧 풀립니다. 》

《 거점 용아의 안전지대 해제까지 5초. 4초. 3초. 2초. 1초. 》

《 거점 용아의 안전지대가 해제됩니다. 》

《 공성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

이 시스템 메시지는 페가수스 연합에서도 확인했는지 성벽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녀석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그런데 다들 진형을 잡고 꼼짝 않는 것을 보니 연 그 녀석이 중간에서 오더를 내리고 있는 듯했다.

“역시나 돌다리네요.”

“어, 저 녀석은 저게 문제라니까? 뭐 저 녀석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지금 같이 안정적인 공성을 하려면 확실히 저런 자세가 좋아.”

그때 혼령을 보면서 말했다.

“무거운 녀석의 엉덩이를 들어 올리려면 네가 필요한데?”

“하아.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해보지.”

그러더니 혼령이 대놓고 연에게 들리도록 외쳤다.

“멍청하게 집 비우고 거점을 뺏긴 호구 얼굴이나 한번 보자. 어디 있냐? 연?!”

본인 스스로 지략가라고 생각하는 연에게 멍청이라는 말과 호구라는 말은…….

듣기 힘든 모욕에 가까운 말이지.

거기다 자기 실책으로 거점을 뺏긴 이 시점에서 듣는 이 두 단어는 연을 도발하기에는 충분했다.

“야이! 개새끼야! 너 딱 기다려! 당장 죽여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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