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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932화 (922/1,404)
  • #932화 승자 없는 전장 (2)

    지금은 딱히 어느 한 세력이 우세하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우리가 주요 거점 세 곳을 동시에 먹은 뒤로는 더더욱.

    초월 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져 있던 전쟁을 우리가 뒤엎어버린 셈이랄까.

    이제 겨우 평형을 이룬 셈.

    그리고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면.

    패황의 연합이 됐든.

    혼령의 연합이 됐든.

    초월 쪽 연합들을 이기는 그림이 나올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건 딱히 우리가 그리고자 하는 그림은 또 아니었다.

    아직은 적당히 니들끼리 치고 박아줘야 한다고.

    <혼령> 내가 지원을 안 해서 패황이 거점을 잃게 되면 상당히 리스크를 지게 될 텐데?

    혼령은 지원을 보내지 않았을 때의 부담을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윈> 넌 이미 할 만큼 했지 않나? 단독으로 거점을 세 개나 먹어줬으면. 단 이천의 병력으로 성 세 개를 먹은 셈인데 말이야. 누가 너한테 욕을 하겠냐.

    <혼령> 그렇긴 한데…….

    <윈> 그리고 지금 협곡을 넘으라고 보낸 녀석들만 팔천이 넘어. 이제부터는 그 녀석들이 하기 나름이지. 네가 신경 쓸 바는 아니다.

    솔직히 누가 봐도 혼령이 해낸 일은 로스트 스카이 역사에 기록될 만큼 대승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병력보다 네 배는 많은 인원을 협곡 넘어 지원 보내기도 했고.

    그런데 거기에 더해 지원까지 더 보내라고 하면 그게 양아치지.

    아무리 패황이 중요하다고는 해도.

    그런 요구까지 할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을 것이다.

    당연히 혼령 입장에서는 지금 가진 세 거점을 잘 정리하기만 해도 충분했다.

    <혼령> 후, 알았다. 어차피 패황이 더 크는 것도 부담이니. 적당히 둘러대도록 하지. 거점의 후방 세력 정리를 위해서 시간이 걸린다 정도면 될 것 같군. 그리고 이곳 거점을 노린 녀석들의 반격도 생각해야 하니까.

    그 말을 들은 재중이 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녀석, 아주 그럴 맘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네, 어떻게든 패황을 눌러 내릴 생각이에요.”

    “흐음, 협곡을 넘은 녀석들은 어떻게 됐지?”

    “글쎄요. 정보를 넘겨받지 못해서 잘 모르겠어요. 일단은 페가수스 연합 녀석들이 뒤쫓기는 했을 텐데. 얼마나 넘어갔을 지는 확실히 모르죠.”

    어차피 이전의 거점에 있던 페가수스 세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넘겨 보낸 떡밥 같은 녀석들이라…….

    죽어도 그만.

    살아있어도 그만이었다.

    녀석들이 온전히 살아서 거점 패황에 도착할 확률은…….

    애초에 제로에 가까우니까.

    “초월 애들이 거점 패황을 함락시키는 걸 좀 늦추더라도 지원이 온 애들을 먼저 죽일 수도 있어. 뒤에 적들을 달아둔 상태로 공성을 했다가는 오히려 포위가 될 수 있을 테니.”

    “네, 그 와중에 서로 좀 치고 박아주면서 숫자가 좀 줄어들면 더 고맙죠.”

    아무리 초월 쪽 연합들의 개개인이 강하다고 한들.

    협곡을 넘어간 지원 병력과 거점 패황에서 나오는 본진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재중이 형 말대로 앞뒤로 포위가 되는 최악의 상황이 나올 수도 있었으니까.

    거기다 지금 저들의 귀환지는 최소 몇 시간은 걸리는 아주 먼 지역이었다.

    우리가 거점을 모조리 차지한 덕분에.

    한 마디로 엄청난 부담을 등에 진 상태로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

    이런 상황에 추가 부담을 질 생각은 없을 테니 후방 지원 세력을 먼저 정리하려 들 것이다.

    “그런데 혹시 그 전에 거점 패황이 함락되면요?”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 오히려 전신은 그쪽을 선호할 거야.”

    “그런가요?”

    “전신 그 녀석이 부활지를 우선으로 둔다면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거점 패황을 먼저 함락하려고 할 거다. 앞뒤로 포위를 당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말이지.”

    “엄청나게 많이 죽겠네요.”

    “어, 아무래도 신경 쓸 전장이 너무 넓어지니 시선도 많이 분산되겠지. 병력도 분배해야 할 테고. 온전히 공성에만 신경 쓰긴 어려워.”

    앞뒤로 포위를 당한 상태로 공성을 계속 해도 문제.

    후방을 먼저 정리하면 그만큼 거점 패황의 공략이 늦어지니 더 문제였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또 있었다.

    거점 패황을 그대로 놔둘 경우에 생기는 최악의 문제.

    재중이 형도 그걸 잘 아는지 바로 짚어 주었다.

    “굳이 하나를 선택하자면 공성이지. 거점을 그대로 뒀다가는 이쪽 거점들에서 포탈로 바로 병력 지원을 갈 수 있거든.”

    여기서 또 거점을 차지한 이점이 드러났다.

    거리가 다소 멀긴 해도.

    어차피 거점을 여럿 가지고 있는 상황에선 그 먼 거리가 오히려 이점이 되니까.

    적들에게는 멀지만.

    아군에게는 그 거리가 결코 먼 게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네가 전신이면 어떻게 할 거 같아?”

    재중이 형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답을 내놓았다.

    “이곳을 포함해 세 거점을 다시 차지하려고 하겠네요.”

    “그렇지. 뒤가 찝찝한 상태로 전쟁을 계속 할 순 없으니. 거점 패황을 빠르게 점령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쪽 먼저 점령하려고 할 수도 있어. 그리고 우리가 했듯이. 세 거점을 동시에 탈환하려고 할 수도 있을 테지.”

    “앞으로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결정해야겠네요.”

    “그래, 그럼 일단은 이 거점부터 확실히 부활시켜 놓자고.”

    혼령과 대화가 끝난 후에 바로 레스를 불러들였다.

    “이젠 거점 주인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하하…… 말은. 이게 내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안다. 그래서 뭘 부탁하고 싶은 거지?”

    레스도 자신이 이 거점을 먹은 것이 아니기에 바로 내 의도를 물어 왔다.

    그 말을 들은 재중이 형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심연> 아주 눈치가 없진 않네.

    <윈> 괜찮죠.

    “흐음, 일단은 거점 방어를 좀 해줬으면 하는데요.”

    “알다시피 그러려면 거점을 활성화해야 할 텐데 내겐 그 정도 자본이 없어. 줘도 못 굴리는 거점이라 이거지. 갑자기 난데 없이 슈퍼카를 몰라고 하면 유지가 되게냐. 차라리 혼령에게 거점을 넘기지 그랬어?”

    “아뇨, 우린 레스가 딱 좋아요. 자금은 넉넉하니까 걱정 마시고요.”

    그리고는 바로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 혹한의 얼음 여왕을 불렀다.

    그런데 뱀파이어 로드와 혹한의 얼음 여왕에게서 이전과는 다른 기묘한 기운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발걸음의 무게 자체가 달라졌는데?

    이전의 둔탁한 느낌이 다소 존재했다면 지금은 발걸음이 너무 가벼운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마치 무게가 없는 듯.

    눈빛에서 느껴지는 광채 역시도 남달랐다.

    좀 더 강렬한.

    그리고 가만히 있어도 주변을 내리 누르는 것 같은 압력이 생기는 것 같았다.

    전에 발록에게서 보이던 딱 그런 기운이랄까.

    그래도 아직은 발록에 비해 부족했지만.

    어쨌든 꽤 성장한 건 확실한 모양이었다.

    이번에 먹이를 잔뜩 준 보람이 있는데?

    뱀파이어 로드와 혹한의 얼음 여왕도 지금의 상태가 만족스러운지 기분 좋은 미소를 감추지 못 했다.

    조금만 더 먹이면……!

    이 녀석들도 오버된 발록과 같은 완전체에 같은 단계에 올라갈 수 있을 터.

    “내 선물은 마음에 들었어?”

    그러자 뱀파이어 로드와 혹한의 얼음 여왕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괜찮았어.”

    “만족한다.”

    “그래, 앞으로도 줄 선물은 많으니까.”

    내 말에 둘 다 반기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한번 레벨업에 맛을 들이면 끊을 수가 없지.

    “그건 그렇고, 부탁한 건?”

    그러자 뱀파이어 로드가 떨떠름한 눈빛으로 바닥에 뭔가를 휙 던져주었다.

    “이거 말인가?”

    쿵.

    정확히는 아이템이 잔뜩 들어있는 거대한 주머니를.

    그렇게 계속 떨어지는 몇 개나 되는 주머니를 동시에 열어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알뜰하게 잘 주워 놨네.”

    이 녀석들은 네임드다.

    그리고 유저를 죽이면 엄청나게 아이템 드랍이 잘 되는 녀석들이기도 하지.

    재중이 형이 전에 떨어지는 아이템을 다 주우면 회사를 하나 차릴 수 있겠다고 말했는데.

    세 네임드에게 죽은 유저가 못 해도 수백은 된다.

    거기다 한 번만 죽은 것도 아니고 부활해서 다시 달려들어 또 죽고, 또 죽었으니.

    드랍템의 양이 이렇게 많을 수밖에.

    지금 그 엄청나게 많은 드랍템들이 전부 여기 몰려 있었다.

    내가 녀석들에게 다 주워 놓으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이 많은 아이템은 이제부터 전쟁 자금으로 쓸 예정이었다.

    옆에서 얼떨떨하게 그 아이템들을 바라보는 레스에게 웃으면서 물었다.

    “이거면 거점의 성벽 올리고도 남겠죠?”

    “하, 자네, 정말 미쳤군.”

    “그냥 쓸 곳에 쓰는 거죠. 일단 제게 거점의 권한을 전부 넘겨놓으세요. 나머지는 알아서 할 테니.”

    “하하, 난 이름만 빌려주면 된다는 거군.”

    “아, 그만큼 값은 지불할 테니 걱정 놓으셔도 됩니다.”

    “혹시라도 내가 다른 마음을 품으면?”

    “뭐 어차피 팔지도 못하는 거점인데 손해만 보시겠죠. 그리고 그런 생각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물어보지도 않아요.”

    “이거 참. 졌네. 좋아 한 번 마음대로 해봐. 나도 이참에 성주 한 번 해보지.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해보겠어.”

    그런 레스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사람은 잘 골랐다니까.

    “형, 사장님 좀 불러주세요.”

    “그래, 아이템 정리를 해야겠지.”

    이걸 일일이 내가 팔고 있기는 시간이 없으니.

    그렇게 얼마 뒤 도착한 사장님이 거점에 머물고 있는 유저들에게 빠르게 아이템을 경매해 자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적들이 쓰던 아이템은 다 고가의 아이템들이었다.

    그런 고강의 아이템들을 판다는데 마다할 유저들은 하나도 없겠지.

    경매에서 다들 가지고 있던 자금을 다 풀어내면서 우리 주머니를 화끈하게 채워주었다.

    그리고 나와 재중이 형은 그간 거점을 운영했던 노하우를 십분 발휘해 빠르게 거점에 성벽을 올리면서 원래의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자네, 이걸 전에도 해본 적이 있는 건가? 난 복잡해서 잘 모르겠던데. 많이 해본 사람처럼 거침이 없잖아.”

    “음, 하하…… 기업 비밀요.”

    거점 시스템을 만지는 일은 눈만 뜨면 하던 일이라.

    엄청난 자금을 먹은 거점 용아는 다른 거점들보다 훨씬 빠르게 원상복구가 되었다.

    다시 공성 시작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있지.

    예비 기간 동안 최대한 방어를 올려놓아야 한다.

    곧 정비 기간이 풀리는 순간.

    저 밖에서 미친듯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페가수스 연합 녀석들이 들이닥칠 테니까.

    “연 녀석, 지금쯤 발등에 불이 떨어졌겠네요.”

    “어, 멀쩡히 잘 가지고 있던 거점을 순식간에 빼앗겼으니까. 지금 방어가 올라가는 걸 보면 속에 불이 나고 있을 거다. 휘하 연합들에게 웃음거리로 전략하기도 했고. 속이 말이 아닐걸?”

    재중이 형 말대로 지금 연의 페가수스 연합은 그야말로 여기저기 치이면서 웃음거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제 집 비우고 나갔다가 털린 멍청한 녀석이라고.

    당연히 연 입장에서 천불이 나지 않겠는가.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녀석들에게 털린 것도 그렇다.

    겉으로 보이는 자존심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재정에도 큰 타격을 입은 셈이었다.

    거점이 통째로 날아갔으니.

    녀석에게 이걸 만회할 방법은.

    지금은 용아가 된 이 거점을 다시 뺏어오는 방법뿐이었다.

    그런데 한시가 바쁘게 거점의 방어가 튼튼하게 올라가고 있으니 당황할 수밖에.

    솔직히 여기에 내 돈은 하나도 들어가지도 않았다.

    이게 다 니들에게 뺏은 돈으로 세우는 거란다.

    연이 이걸 들으면 또 천불이 나려나?

    “어디 녀석의 주머니를 한 번 더 털어 볼까요?”

    이번엔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아주 바닥까지 긁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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