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1화 승자 없는 전장 (1)
페가수스 연합 입장에서는 세 네임드와 혼령의 연합에게 밀리나 거점의 크리스탈이 박살 나나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병력을 전방의 부대로 다 집결시켰다.
어차피 최종 라인이 뚫려 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물론 혼령도 바보가 아닌 이상 후방으로 병력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 번에 여러 방위를 공략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니.
그런데 강력한 세 네임드 덕분에 굳이 그렇게까지 병력을 분산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정면을 뚫는 것이 훨씬 낫다는 판단을 했는지 혼령의 연합들은 줄기차게 정면의 라인을 노리게 되었다.
만약 세 네임드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결과가 나오진 않았을 터.
결국은 세 네임드가 이 공성의 핵심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페가수스 연합 역시 정면에 모든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이래 뚫리나 저래 뚫리나.
결과는 마찬가지.
그 덕분에 처음부터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방관하던 우리가 너무 쉽게 후방으로 돌아 들어갈 수 있었다.
연합 내에서 말단에 불과한 레스가 크리스탈의 막타를 칠 만한 거리까지 들어올 수 있게 된 것도 이런 이유였다.
그렇게 거점 페가수스의 크리스탈의 내구도가 다해 박살 나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 거점 페가수스가 파괴되었습니다! 》
《 페가수스 길드장 『 연 』 님이 더 이상 거점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
《 공성전 룰에 딸 거점 크리스탈을 파괴한 유저 『 레스 』 님과 적대적인 포지션 유저들은 외곽 지역으로 강제 송환됩니다. 』
《 페가수스 연합이 거점 외곽으로 강제 추방됩니다. 》
《 동맹 에인 연합이 거점 외곽으로 강제 추방됩니다. 》
《 동맹 펄스 연합이 거점 외곽으로 강제 추방됩니다. 》
.
.
공성의 룰.
참여한 유저들 중 한쪽이 승리했을 경우.
패배한 적대적인 포지션 유저들은 일제히 외곽으로 밀려나게 되어 있었다.
게다가 패배한 유저들은 바로 공성을 신청할 수도 없었다.
승리자 쪽에게 주는 일종의 이득이랄까.
거점을 재정비할 시간도 없이 다시 공성이 일어나면 그냥 평야에서 개싸움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
최소한의 장치 정도는 마련되어 있었고.
이건 우리가 견고한 준비를 할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시스템 메시지가 울리자마자 주변에 수도 없이 많던 적군들이 일제히 빛으로 변하며 공중에서 사라져갔다.
거의 악을 써 가며.
“안 돼!”
“젠장! 크리스탈이!”
“하, 거점이 무너질 줄이야……!”
“아씨! 완전 망했네.”
“이 새끼들! 목 씻고 딱 기다려라! 다시 온다!”
너무 어이없게 크리스탈이 날아가서일까.
욕을 하면서 사라지는 유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저 녀석들이 알지 못하는 한 가지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금속의 정령 너…… 이런 것도 가능했냐?”
“응. 너무 잘 먹었어.”
바로 금속의 정령의 숨겨진 능력.
거점의 크리스탈을 먹어치워 내구도를 깎아 버리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감추고 있었다.
솔직히 크리스탈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연합 대 연합이 붙는 만큼 그 내구도가 결코 적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원래라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강력한 스킬로 내구도를 깎을 생각이었는데.
금속의 정령이 나서서 내구도를 왕창 깎아 주는 덕분에 일을 수월하게 마쳤다.
“잘했다.”
“이 정도쯤이야!”
의기양양하게 주변을 나는 금속의 정령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그리고 곧장 레스를 보면서 물었다.
“거점 시스템 뜨죠?”
“어, 어.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일단 다른 사람들보다 거점을 파괴한 유저인 레스에게 우선권이 돌아간다.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거점 새로 만들어요.”
“흐음. 정말 해도 괜찮은 거냐? 혼령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아. 딱히 뭐라고 하진 않을 겁니다.”
성문을 연 것도.
세 네임드가 적들을 쓸어버린 것도.
크리스탈을 파괴한 것도 전부 이쪽이니까.
계획대로 혼령을 밀어주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얻을 이득을 전부 준다는 뜻은 아니었다.
넌 명예만 가져가라고.
실질적인 이득은 우리가 가질 테니.
그리고 이 일을 가능하게 한 또 하나의 이유.
“준남작이라고 했죠?”
“어, 말단의 단승 작위이긴 해도 어쨌든 귀족이긴 해. 전에 가르시아 제국에서 귀족 계승 이벤트할 때 운 좋게 추첨으로 걸렸거든.”
접속을 하지 못했을 때.
이런저런 이벤트가 많이 있었다고 했다.
그중에 하나.
귀족 작위가 많이 비어 버린 제국에서 기여도가 높은 유저들을 대상으로 이벤트를 했다고 한다.
여기 레스 또한 그때 용병단을 이끌다가 겨우 귀족 작위 중에 하나를 얻어낼 수 있었다.
우리가 거점을 레스에게 넘기기로 한 것도 이런 이유여서다.
애초에 귀족 작위가 없으면 거점을 생성하지 못하니까.
아마 그랬다면 조금 다른 방법을 써야 했을지도.
덕분에 일은 좀 편해졌다.
“휴, 알았다.”
레스가 잠시 시스템을 건드리더니 곧 시스템 메시지가 이어졌다.
《 마계 대륙에 가르시아 제국 준남작 『 레스 』 님의 새 거점이 설치됩니다. 》
《 거점 명은 길드 명으로 대체 됩니다. 》
《 거점 : 『 용아 』가 설치되었습니다. 》
레스의 용병단 길드 용아.
그리고 레스가 거점을 설치하자마자 바로 혼령에게서 귓속말이 날아왔다.
<혼령> 장난해?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지?
당황함이 가득한 혼령의 목소리.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자리는 혼령이 차지했어야 하는 자리였다.
<윈>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너 이 전쟁에서 이기고 싶은 건 맞지?
<혼령> 그게 거점을 차지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윈> 크게 봐. 여기는 그냥 지나치는 관문일 뿐이야. 그리고 지금 눈이 벌게진 페가수스 녀석들이 계속 노리게 될 곳이 어디겠어?
<혼령> 당연히…… 이 거점…….
<윈> 그래. 여긴 앞으로 계속 전투가 일어날 거야. 그것도 아무 의미 없이 적들의 공세를 견디기만 하는. 너 여기서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묶여 있을 생각은 아니지?
<혼령> 흐음…… 하지만…….
<윈> 당연히 넌 패황을 지원하기 위해 전 병력을 움직이겠지. 이 전쟁의 종지부를 찍어야 하니까. 그것도 네 이름으로.
<혼령> 아니라고 할 순 없군.
혼령의 지금까지의 모습을 볼 때.
앞으로 가장 빛나는 자리를 마다할 인물이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전쟁의 꽃은 바로.
지금 패황이 상주하는 거점 패황을 누가 차지하느냐의 싸움이지.
초월 연합 쪽에서는 어떻게든 되찾으려고 할 테고.
이대로 가면 패황은 아마 이걸 막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혼령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면.
또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여러모로 혼령에게 있어 이 거점은 보급을 위한 거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윈> 그리고 우리가 공짜로 널 도와주기만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우리도 받아가야 하는 게 있을 거 아냐.
<혼령> 그게 이 거점이라는 건가.
<윈> 거점을 동시에 몇 개나 먹게 해주었으면 말이야, 양심적으로 하나는 가져도 되지 않나? 지금쯤 전부 네가 압도적인 승리를 이끌었다고 생각할 텐데.
옆에서 파악한 혼령은 딱히 돈이 부족하거나 아쉬운 녀석은 절대 아니었다.
물론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야 하겠지만.
그것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큰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예.
연합 모두의 우러러봄.
절대적인 승리자의 위치.
오히려 이쪽이 이 녀석의 입맛에는 더 맞는 보상이 아닐까.
무려 적들이 가진 거점을 동시 탈환하는 일이다.
이제껏 그 누구도 해보지 못한.
아니 엄두도 못 낸.
지금 그런 성과를 내기 일보직전이었다.
만약 끝까지 이 거점을 놓지 않고 가지겠다고 하면.
이 녀석과 협약은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혼령> 하, 이거 참. 그래, 좋다. 이 거점은 잠시 너에게 주도록 하지. 하지만 임시다. 이 전쟁이 내 승리가 되도록 만들어줘야겠어. 그러면 그때 이 거점을 온전히 넘겨주겠다.
<윈> 꽤 비싼 매물이군.
<혼령> 할 수만 있다면. 그다지 비싸지는 않아.
<윈> 좋아. 후회없는 선택이 될 거다.
녀석에게 있어 승리라는 건.
패황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올라가는 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초월 연합을 비롯한 다른 연합을 전부 눌러줘야 한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지.
<혼령> 아, 그리고. 다른 거점들. 두 곳 모두 우리가 접수했다고 연락 왔다.
<윈> 호오. 생각보다 빠른데?
<혼령> 죄다 이곳으로 병력을 보내서겠지. 애초에 방어할 병력 자체가 부족했다는군. 적들이 아무리 잘 싸우더라도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는 역부족이었다.
<윈> 좋은 소식이네.
이로써 거점 패황으로 가는 세 곳의 거점을 모두 이쪽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번에 이런 식으로 거점 세 곳이 다 털리는 상황이라 게시판 역시 난리가 난 상태였다.
- 와, 실화냐. 초월 연합 애들 거점 한꺼번에 다 털림.
- 그러게. BJ 애들이 생중계하는데 진짜 미쳤다.
- 압도적인데?
- 패황 연합 쪽이 이렇게 강했어?
- 노노, 아님. 패황은 지금 갇혀서 나오지도 못함.
- 맞아. 초월 애들한테 포위당해서 꼼짝도 못 하는 중.
- 그럼 누가?
- 혼령이라고 있는데 얘가 지금 총군임.
- 아! 누군지 안다. 졸 부자. 돈질 제대로 하더라.
- 패황 빠지고 지금 혼령이 지휘하는데 이번에 제대로 털었음.
- 페가수스 거점에 적들 다 몰아놓고 다른 곳까지 다 털라고 지시한 게 혼령임.
- 진짜 미쳤네. 지략 봐라. 돈만 많은 게 맞는 거냐?
- 이거 패황이 아니라 혼령이 진짜 머리 아님?
- 그러게. 패황 한 것도 없이 두들겨 맞기만 하는데.
- 솔직히 패황이 차지한 거점도 주인 없는 곳에 무임승차한 거잖아.
- 맞아. 난 이 녀석이 왜 이렇게 고평가 받는지 모르겠음.
- 그래도 얘가 반통제 연합 만들었잖아.
- 그러면 뭐 하냐. 맨날 깨지던데. 난 차라리 혼령이 낫다. 시원하게 먹여주잖아.
- ㅇㅇ. 혼령이 오히려 패황 때문에 묻히는 느낌이 없잖아 있음.
- 처음부터 혼령이 잡았으면 벌써 이겼던 거 아냐?
- 맞아. 난 이제 혼령으로 갈아탄다.
압도적인 승리.
이제껏 한 번도 있지 않았던 승리에 다들 패황보다 혼령을 높게 쳐주는 분위기였다.
<윈> 게시판 봤어?
<혼령> 흠. 나쁘지 않군.
이 녀석 벌써 다 본 모양이네.
은근히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윈>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지.
<혼령> 그래. 다음은 뭘 하면 되냐?
혼령의 물음에 잠시 재중이 형과 눈을 맞췄다.
“그대로 가면 되겠죠?”
“어, 원하는 것도 얻었으니.”
<윈> 마음 같아서는 당장 패황을 꺼내주고 싶긴 한데…….
<혼령> 한데? 뭐가 문제인가.
세 거점을 모두 차지해서 적들의 보급이 끈긴 지금.
적들의 전력은 유례없을 정도로 약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최소한 죽었을 경우 바로 부활할 거점 하나 정도는 있어야 비벼볼 텐데.
지금은 전투를 하다 죽었을 경우에는 몇 시간 거리의 먼 곳까지 날아가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거기다.
각종 물약과 더불어 전투 장비를 수리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
만약 이대로 혼령이 병력을 모아 밀어붙인다면.
패황 역시 숨통이 트이면서 동시에 거점을 나와 포위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우리가 원하는 그림은 절대 아니지.
<윈> 너 패황을 끌어내리고 싶어 하잖아.
<혼령> 흠. 누가 꼭 그렇다고 하던가.
옆에 없다고 아닌 척하기는.
결국 저 녀석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려면 패황이 한 번은 박살이 나야 한다.
<윈> 혹시 패황에게 지원 요청을 오면…….
<혼령> 오면?
<윈> 씹어.
<혼령> 뭐?
<윈> 그냥 씹으라고.
이 전쟁을 아주, 아주 길게 끌고 가려면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