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927화 (917/1,404)

#927화 격전의 거점 쟁탈전 (14)

성문을 통과하는 도중 타르포에 많은 유저들이 죽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표시가 날 정도로 많은 유저가 죽어나간 것은 또 아니었다.

아마 오랜 시간동안 성문 앞에서 막혀 있었다면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테지.

지금처럼 온전히 숫자를 유지하고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나와 재중이 형의 힘이 컸다.

그렇게 거의 이천에 달하는 패황 연합의 유저들이 성문으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더니 어느새 성문 안팎으로 모두 패황 연합의 유저들로만 가득 차게 되었다.

“빨리 중앙으로 밀고 들어가!”

“미적거릴 시간 없어! 곧 지원이 올 거다!”

“이번에 다시 밀려나면 기회가 없어! 달려!”

“오오!! 가자!!”

“페가수스 애들 싹 밀어 버려!!”

아주 멍청이들은 아니네.

성문이 돌파당한 시점에서 지원이 올 거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그리고 이 녀석들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성문을 돌파했다는 기쁨을 누릴 시간도 없이 바로 중앙의 시가지를 향해 유저들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정신없네요.”

워낙 많은 유저들이 시장통처럼 몰려다니는지라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쓸려나갈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내 모습에 재중이 형이 피식 웃더니 곧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찾아냈다.

“저기다.”

유저들이 우르르 지나가는 와중에도 유독 눈에 띄는 녀석들.

발록, 뱀파이어 로드, 얼음 여왕.

왜 눈에 띄는가 하면…….

화려한 갑옷들을 입은 녀석들과 달리 녀석들은 정말 딱 기본 로브만 걸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소소한 장비가 오히려 다른 유저들보다 훨씬 더 눈에 들어왔다.

반대로 녀석들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곧장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이 난리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긴.

이 녀석들이 유저들처럼 달려 다닐 필요는 없지.

그리고 그 옆에는 레스와 그의 부대원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중이었다.

눈에는 깜짝 놀란 표정을 가득한 채로.

“허! 정말 성문을 열다니……!”

미리 말은 해두었지만 정말 성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연다고 했잖아요.”

“하하하하……. 자네 정말로 놀라운 사람이야.”

뒤에 따라온 그의 부대원들도 마찬가지.

놀라움을 감출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이게 말이 돼?”

“정말 둘이서 했다고?”

“우리가 그동안 죽 쓴 건 다 뭐냐. 진짜.”

“야야, 내기 돈 내놔.”

“칫, 정말 열 줄 누가 알았나.”

그러면서 서로 한 사람에게 돈을 몰아주는 것을 봐서는 대부분 우리가 실패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이런.

너무 신용을 못 얻었는데?

딱히 그럴 마음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모두 모이자 재중이 형이 그들에게 말했다.

“알겠지만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이제 다른 거점에서 포탈을 타고 넘어올 겁니다.”

“흠, 그렇지. 자네들은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야?”

계획을 물어보는 것을 보면 레스는 이미 우리가 하는 방법대로 따라갈 생각인 듯했다.

그리고 부대원들도 딱히 다르진 않았다.

하나같이 우리의 명을 기다리는 모습.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잠시 그들을 한 번씩 바라본 뒤.

곧장 레스를 보면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할 말은 레스 입장에서는 꽤 당황할 만한 말들일 수도 있겠다.

“혹시 거점 먹어본 적 있나요?”

“뭐? 그게 무슨…….”

아니나 다를까.

레스가 당황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아, 그리니까 지금 거점을 먹어야 하는데 우리는 거점을 못 먹거든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거점을 먹는다는 말을 하자 레스 뿐만 아니라 부대원들 전체가 웅성거렸다.

“지금 거점을 먹는다고 했나?”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야야, 이거 좀 문제 있는 거 아냐?”

저들 입장에서는 당황할 만했다.

거점이라는 게 정말 날고 긴다는 길드나 연합에서만 먹는 거니까.

한 장소에 거점을 설치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데 다른 연합의 거점을 가져오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설령 가진다고 해도 유지하기도 힘들뿐더러 수많은 유저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으니.

이제껏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거점을 먹으라고 하는 거야?”

“네, 정확하게 알아들으셨네요.”

“이런, 미친…… 아 미안. 자네에게 한 말이…… 아, 맞긴 한데. 아이씨,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횡설수설.

레스도 이제껏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마구잡이로 말이 나오는 듯했다.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임시적으로 가지고만 있으면 되니까요.”

“허…….”

잠시 멍한 눈으로 날 보던 레스가 결국 포기했는지 두 손을 들어버렸다.

“아이고,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래, 살면서 한 번쯤은 거점을 차지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해볼까.”

“아주 탁월한 선택입니다.”

어차피 거점은 우리가 먹지 못한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줄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아는 사람이 좋지.

여러 가지 면에서.

혼령도 있긴 하지만.

막상 혼령에게 넘겨놓으면 주도권이 혼령에게 그냥 넘어가 버리게 된다.

이건 딱히 좋은 선택은 아니니까.

힘을 실어주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혼령에게 모든 것을 맡겨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거기다 혼령은 해야 할 일이 더 있기도 했으니.

“자, 그럼 이제부터는 바싹 따라오세요. 길은 저 셋이 뚫습니다.”

“어?! 저 셋이서?”

누가 봐도 그냥 평범한 로브를 걸치고 있는 세 사람이었다.

그리고 전에 설명하기로 길드에 등록을 아직 하지 못해서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했었다.

놀라는 레스를 보면서 다시 웃음 지었다.

“그냥 따라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혹시 뒤처지면 그냥 버리고 갈 거니까 늦으면 안 돼요.”

“……설마.”

곧장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 혹한의 얼음 여왕을 보면서 말했다.

“쭉 밀고 가자. 이젠 눈치 볼 것 없어.”

“알았다.”

“이제 시작인가?”

“다 죽여도 된다는 말이지?”

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손을 푸는 셋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렀다.

아마 가만히 참고 있는다고 더 힘들었을지도?

“어, 앞을 막는 것들은 그냥 모조리 죽여 버려.”

어차피 이천이나 되는 유저들이 밀고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떤 식으로 죽이든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뭐 일단은 시간이 없기도 했으니.

거점 중앙의 크리스탈에 도달하려면.

이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허락을 하자마자 곧 발록, 뱀파이어 로드, 혹한의 얼음 여왕에게서 각자 다른 색의 오라가 피어올랐다.

화려하게 타오르는 붉은 기운.

짙게 눌려지는 검은 기운.

그리고 사방을 얼려 버리는 푸른 기운까지.

마왕을 부를 정도로 힘을 모두 개방하지는 않겠지만.

아마 이 정도만으로도 유저들을 상대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럼, 간다.”

먼저 발록이 앞으로 쇄도해 나갔고.

그 뒤를 이어 뱀파이어 로드와 혹한의 얼음 여왕이 좌우에 뒤쳐져서 따라 달려 나갔다.

정확히는 한 번 발을 박찰 때마다 수 미터씩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고 해야 하나?

순식간에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셋의 잔상을 본 레스의 눈이 더없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입은 이미 쩍 벌려져 있는 상태였다.

“저게 대체…….”

그래.

이 정도의 도약력은 어딜 가도 본 적도 없겠지.

사실 셋 다 시야에서 한순간만 놓치면 쫓아갈 수도 없는 정도로 빠른 이동이 가능한 녀석들이라.

“자, 그럼 우리도 바쁘게 움직이죠. 아차 하면 놓쳐요.”

그리고 바로 헤이스트를 걸었다.

【 헤이스트! 】

그때 부대원 중에 한 마법사가 내게 또 다른 스킬을 걸어 주었다.

【 더블 헤이스트! 】

【 윈드 워크! 】

헤이스트에 이어 중복으로 걸리는 또 다른 이속 스킬들.

“이번에 비싸게 주고 산 스킬입니다.”

“어? 고맙습니다.”

생각보다 쓸모가 있네.

주변 사람들 전부에게 이속 스킬을 걸자 생각 이상으로 이동 속도가 올라갔다.

아마 이전보다 대략 세 배 이상의 속도쯤 되려나.

이래서 아군이 있으면 좋다.

괜히 우리 파티원들이 보고 싶어지네.

이번 일만 끝나면 다 불러들여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빠르게 달려 나가자 부대원들 모두 우리 뒤를 따라 쫓아왔다.

이미 시가지 쪽에서는 전투가 한창인지 연이어 광역 스킬들이 터지는 소리가 화려하게 나고 있었다.

크리스탈까지 어떻게든 뚫고 가야 하는 이천의 패황 연합.

그리고 그걸 저지하기 위해 시가지 곳곳에 숨어서 건물을 방패 삼아 방어를 하고 있는 페가수스 연합의 격돌.

하늘을 빼곡히 채우는 화살비가 떨어지는 와중에 광역 마법이 수도 없이 터지고, 그 중앙에서 탱커 수십이 동시에 부딪히면서 근접 딜러들이 눈이 시뻘게진 채로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란…….

그 가운데서 죽어 나가는 유저들이 수도 없이 많아졌다.

콰앙!

콰콰광!!

퍼엉!!

콰르륵!!

투앙!!

강력한 광역 스킬들이 터지는 소리만큼이나 건물들 역시 동시에 박살 나면서 무너지기도 하고 그 안에 있던 유저들도 깔려서 같이 사망했다.

“끄악!”

“밀리지 마!”

“여기서 더 밀리면 안 된다!”

“자리를 사수해!”

“절대 보내주지 마라!”

“조금만 버티면 아군이 지원 온다고!”

“그때까지만 버텨!”

“우린 이긴다!”

시가지 쪽에서는 어떻게든 패황 연합의 발목을 붙들기 위해 스킬이란 스킬은 모조리 쏟아부었다.

“저항이 너무 거셉니다!”

“칫, 시가지는 불리해!”

“외곽으로 돌까요?!”

“그럴 시간 없어! 무조건 일자로 돌파해!”

“피해가 너무 클 텐데요?!”

“어차피 시간 끌리면 우리가 진다. 여기서 무조건 뚫어야 해!”

달려가면서 살펴보니 패황 연합에서도 어지간한 피해는 그냥 무시하고 밀어붙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유저 몇 백 죽는 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차피 몇 백이 죽든 몇 천이 죽든.

거점만 먹을 수 있으면 그게 남는 장사였다.

패황 연합에서 거점을 먹을 수만 있다면.

단 한 가지 이점이 바로 이 전쟁의 양상을 뒤엎어버릴 테니까.

결국 부진한 돌파에 최고 명령자인 혼령이 나섰다.

“몇이 죽더라도 좋다! 피해가 얼마나 나든 전부 보상해 줄 테니 무조건 뚫어!!”

그 한 마디 외침에 연합장들의 눈빛이 전부 달라졌다.

손실 보장.

이것만큼 매력적인 단어가 어딧겠는가.

혼령도 이번 한 판에 정말 모든 것을 건 셈이다.

확실히 혼령이 나쁜 패는 아니네.

시류를 읽는 결단력도 있었고 깡도 있다.

어디 가서 대장 노릇하기에는 저만한 녀석도 없지.

곧장 그런 혼령에게 귓속말을 넣었다.

아직은 네 모든 걸 내버리면 안 되지.

앞으로 있을 더 큰 전투를 위해서도.

<윈> 혼령, 우리가 우측을 흔들 테니 바로 중앙 밀고 들어가.

<혼령> 좋은 수가 있나?

<윈> 아니, 이쪽도 정면 돌파다.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화르르륵!!

스아아악!!

쩌저정!!

멀리서도 보일 정도의 거대한.

건물 몇 개는 덮어버릴 세 가지 속성의 거대한 파동이 터지며 순식간에 페가수스 연합의 좌측 부대들을 싹 녹여 버렸다.

정확하게는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태워지고 체력이 흡수되며 얼어버린.

지옥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려나.

셋이 달려 나가는 모든 순간, 모든 장소가 동시에 박살 나면서 순식간에 한쪽 진영을 무너뜨렸다.

<윈> 먼저 도착하는 쪽이 거점을 먹도록 하지.

<혼령> 젠장, 그걸 왜 이제 말하는……!

<윈> 아무튼 미리 난 말했다? 꼬우면 능력껏 뚫어 봐.

나중에 다른 소리를 하면 안 되니까.

그리고 우리가 저 녀석들보다 늦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그렇게 미친 듯이 밀고 들어가면서 페가수스 연합 유저들을 녹이는 세 네임드를 뒤따라가던 레스가 어안이 벙벙해진 채 감탄을 흘렸다.

“정말 미쳤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