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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925화 (915/1,404)

#925화 격전의 거점 쟁탈전 (12)

단조롭던 공성전이 순식간에 이상한 그림으로 변해 버렸다.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갑자기 상황이 급변하자 거점 페가수스의 성벽에서도 잠시 혼란에 빠진 듯했으나 곧 상황을 정리하면서 수습하는 모습이었다.

“이대로 넘어가게 두면 안 돼!”

“차라리 잘 됐네. 이번에도 협곡 안에서 싹 죽여 버려!”

“부대 편성해서 빨리 뒤쫓아!”

확실히 저 녀석들이 대처가 빠르긴 해.

녀석들이 그간 협곡을 넘어간다는 선택지를 배제한 건 이미 한 번 2천이 싹 죽어 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같은 방법을 쓸 거라 생각하진 않았을 텐데.

이번에는 아예 6천이 넘어가는 거니.

여기서 두 가지 선택지.

하나는 협곡 속으로 흩어지는 패황 연합들의 유저들을 따라 추격대를 보내는 일.

이건 정석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재중이 형이 말했듯이 거점 페가수스에서 나오는 추격대를 노리고 패황 연합 유저들이 협곡에서 반전해 포위를 하는 그림이 문제였다.

이러면 꼼짝 없이 넓은 필드에서 6천과 1천 오백의 유저들이 맞닥뜨리게 된다.

연이 가장 꺼려하는 그림이 바로 이거일 테지.

페가수스 연합의 유저들이 개인별로는 강하다고는 하지만 일정 수준의 유저 숫자가 넘어가면 결국은 쪽수의 싸움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것도 4대1 비율의 전투는 굉장히 비효율적인 싸움이 될 테고.

혹여라도 이 싸움에서 대패라도 하게 된다면.

바로 거점 페가수스가 가시권에 들어온다.

연으로선 이 상황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협곡으로 간 유저들이 반전하려는 낌새가 있었다면 페가수스 연합은 그대로 버티면서 나오지도 않았을 터.

2천의 병력이 지키는 거점 페가수스는 일단 난공불락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건 더 명확해질 테고.

가만히 지키고만 있으면 연이 무조건 이기는 게임이라는 거지.

그런데 거기에 작은 돌을 던져 놓았다.

반드시 협곡을 통과할 거라는 정보.

이러면 연의 선택지는 바로 하나로 좁혀지게 된다.

대규모의 추격.

이대로 적들이 협곡을 통과하게 두면 이건 바로 연의 실책이 될 테니까.

거점 페가수스를 지키고 있음에도 고스란히 적의 병력을 다 넘어가게 만든 연은 다른 연합장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것이다.

연 입장에서는 이게 보통 짜증 나는 일이 아니겠지.

안 그래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리고 이런 식으로 실수를 크게 하게 되면.

전체 연합 내에서의 입지가 확 줄어들게 될 수도 있었다.

“연은 반드시 추격하게 될 거야.”

재중이 형의 장담.

아니나 다를까.

급하게 꾸린 1천 오백의 추격대가 거점 페가수스를 빠져나와 협곡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포착됐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넌다는 녀석인데.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대처한 걸 보면 협곡을 넘는다는 확실한 판단이 선 모양이었다.

“혼령이 일을 잘 하네요.”

“그래, 일부러 정보를 흘리다니. 녀석도 꽤 한다니까.”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 페가수스 쪽에서도 이쪽의 정보를 파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혼령이 정보를 흘렸다.

이건 대놓고 쫓아가라는 거지 뭐.

그럼 이제 거점 페가수스에 남은 병력은 대략 500 정도.

길드로 치면 대략 10개 안팎의 녀석들만 남아 있는 셈이었다.

거점을 지키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이는 숫자랄까.

“2천은 확실히 많아 보이지만. 5백은 체감상 완전히 다르지.”

“네, 반면에 우린 2천을 고스란히 유지 중이죠.”

이쪽은 혼령 휘하의 길드 40개 정도의 병력을 남겨놓았다.

거점 페가수스의 정면 성문 앞에.

아직까지는 대놓고 공격은 하지 않고 있어도.

이 2천의 숫자를 앞에 대기시켜놓은 것만 해도 압박감이 상당할 것이다.

고작 5백이 지키는 거점으로는.

지금 공성을 하지 않는 걸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고 있지 않을까.

당연히 2천이 지키다 5백으로 줄어든 거점이다 보니 곳곳에 이전과 달리 허점이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수비 공백.

이건 기존 수비형 NPC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지.

병력이 비었다고 갑자기 몇 천에 달하는 수비형 NPC를 추가로 늘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돈을 엄청나게 들인다고 해도 마찬가지.

NPC가 생성되는데 걸리는 시간도 있으니.

결국 저 넓은 거점 성벽을 5백만으로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이상한 그림이 나오게 되었다.

“자, 우리도 이제 갑시다.”

곧장 나와 재중이 형이 앞장서고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 혹한의 얼음 여왕이 뒤를 따랐다.

틈이 쫙 벌어진 성벽을 향해.

【 은신! 】

【 은신! 】

성벽 근처까지 무사히 접근한 나와 재중이 형은 바로 은신을 하고는 발록을 보면서 말했다.

“나와 형을 저기 성벽 위로 던져줄 수 있어?”

“알았다.”

발록은 그냥 뛰어넘을 수도 있긴 한데.

뱀파이어 로드도 마찬가지.

퀸은 날아가면 되는 일이라.

물론 그랬다가 너무 눈에 띄니까 일단은 거리를 두고 대기만 시켰다.

나와 재중이 형을 잡고는 아주 가볍게 휘둘러 성벽 위로 날려주자 마치 플라이라도 쓴 듯 너무 쉽게 성벽 위로 날아올랐다.

<심연> 큭, 이건 너무 쉽네.

<윈> 네, 감지도 안 걸릴 거고요.

아무것도 없는 성벽 위의 공중에다가 디텍트 에어리어를 쓰는 유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겠지만.

혹시나 해서 살펴봤는데 역시 그 정도로 마력을 낭비하는 유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득이나 정면에서 대기하는 2천의 적을 상대해야 할 판에 쓸데 없이 마력을 낭비할 마법사가 어딧겠는가.

그렇게 안락하게 성벽 위로 날아든 나와 재중이 형이 가뿐하게 착지를 했는데 둘 다 착지 소리가 아예 나지도 않았다.

기본적으로 둘 다 신체 능력을 잘 활용하는 것도 있긴 한데.

여긴 유령보의 스킬도 한몫해 주었다.

기척을 최대한으로 줄여주는 스킬이라 착지 소리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성벽 위는 아래쪽을 향해 활을 든 궁수 유저들과 투석용 수성 병기, 그리고 마력을 내뿜을 수 있는 수성용 포들이 대기되어 있었다.

<윈> 저건 하르포와 모양이 좀 다르네요?

<심연> 어, 하르와 달리 타르를 쓰거든. 위력은 이쪽이 월등히 좋아. 안정성이나 재충전 능력은 좀 떨어져도.

그렇게 보이는 타르포만 최소 수십 여대.

5백이라는 적은 숫자로 2천에 대항할 수 있게 도와주는 최상의 도구였다.

이것만 부숴 버리면…….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당장 저거 하나 부순다고 모습을 드러내는 건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는 일이니.

<윈> 바로 내려가죠.

성벽 위는 적 유저들이 많기에 우리가 행동을 조금 많이 하다가는 어떻게든 들키게 되어 있었다.

반면에 성벽 아래는 유저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일단 성문이 멀쩡한 상황에서는 굳이 아래쪽을 지킬 필요가 없으니까.

기껏 있는 유저들이야 교대를 위해 기다리는 유저들 정도랄까.

그것도 지금은 비상사태라 그런지 대부분의 유저들이 성벽 위로 죄다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다.

정말 최소한의 유저만 남겨놓고.

그 남은 유저들이 하는 일은 바로 성문의 도개교를 내릴 수 있는 레버를 지키는 일이었다.

이런 건 꽤 수동적으로 한단 말이야.

현실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해놓은 장치인데.

만약 이런 식이 아니라 길드 마스터가 시스템으로 내리는 종류라면 애초에 잠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윈> 형, 그냥 안쪽으로 들어가서 크리스탈을 깨버리는 건 어때요?

<심연>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수성 병력이 죄다 성벽에 있으니 거점 중앙에 있는 크리스탈을 보호하는 유저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됐다.

있어도 최소한만 있겠지.

거점을 파괴하는 데는 거점 전체를 부숴 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중앙의 탑만 부숴 버려도 된다.

거점 전체를 박살 내려면 드래곤 같은 거대 네임드가 와야 가능할 테고.

생각해 보면 발록이나 뱀파이어 로드, 혹한의 얼음 여왕도 충분히 할 수 있겠네.

<심연> 그런데 그렇게 하면 이 거점이 우리 것이 되어 버리니 안 돼.

<윈> 하긴 그렇네요.

남들은 가지지 못해 안달 난 거점을 필요가 없어서 가지지 않는다니.

다른 유저들이 들으면 기절할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나누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윈> 레버를 지키는 유저가 열 명이에요.

<심연> 흠, 생각보다 많이 남겨뒀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이려나?

아직은 굳이 지킬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 숫자라.

아마도 연은 내부의 적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돌다리 두들기는 녀석 답네.

물론 그게 상황을 바꾼다거나 하진 않았다.

이미 성벽을 넘어온 순간부터 성문이 열리는 건 정해진 수순이라.

나와 재중이 형이 다가가 한 명씩 붙어서 조용히 멱을 따자 녀석들이 죽어 나가는 소리조차 새어 나가지 않았다.

“끄륵!”

“어억!”

숨넘어가는 소리 정도가 전부랄까.

은밀히 다가가 목을 따는데 걸리는 시간은 한 명당 2~3초.

재중이 형과 동시에 열 명의 목을 갈라놓으니 모든 유저를 죽이는데 채 20초가 넘지도 않았다.

<심연> 서둘러! 곧 죽은 녀석들이 연합 말로 상황을 알릴 거다.

<윈> 네, 최대한 빨리 끝내죠.

만약 부활이라는 게 없다면 유유자적하게 여기서 시간을 보내도 되겠지만.

죽어도 녀석들은 곧장 살아난다.

그리고 전체 채팅이라는 아주 좋은 전달 수단이 있으니까.

누구에게 죽은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죽은 녀석들이 지키고 있던 이곳.

도개교 레버 장치가 적들의 손에 들어갔다는 게 알려지는 건 순식간일 테다.

아니나 다를까.

위쪽 성벽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벌써 알린 건가.

어차피 도개교를 내리는 일 자체는 너무 시간이 걸린다.

그럴 바에는 아예 부숴 버리는 게 훨씬 빠르지.

곧장 테르타로스와 르아 카르테를 들어 도개교의 레버 장치에 박아 넣었다.

<윈> 최대치로 갑니다!

【 팬텀 익스플로전! 】

【 칠성격! 】

한 점에 최대한 집중해 쓸 수 있는 스킬 중에서는 이 녀석들이 최고였다.

키아아악!

콰드드득!

팬텀 익스플로전의 폭발력과 칠성격의 모든 타격이 한 점에 모여 터지자 눈이 부실 정도의 화려한 폭발이 일어났다.

쿠아아앙!

콰아아앙!

콰르르릉!!

연속된 스킬들의 압축과 파괴가 이어지자 도개교와 성벽이 동시에 크게 흔들렸다.

《 거점 페가수스 도개교의 레버가 대미지를 받았습니다! 》

《 거점 페가수스 도개교의 레버의 내구도가 15% 하락합니다! 》

《 거점 페가수스 도개교의 레버가 대미지를 받았습니다! 》

《 거점 페가수스 도개교의 레버의 내구도가 20% 하락합니다! 》

《 거점 페가수스 도개교의 레버가 대미지를 받았습니다! 》

.

.

그리고 연이어 시스템 메시지가 쭉 올라왔다.

《 거점 페가수스 도개교의 레버의 내구도가 17% 하락합니다! 》

《 거점 페가수스 도개교의 레버의 내구도가 바닥나 파괴됩니다! 》

좋아.

<윈> 형, 파괴했어요.

그르르릉!

레버가 꽉 잡고 있어야 하는데 레버가 파괴되어 버리니 성문의 도개교가 일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문 쪽은 재중이 형이 프로미넌스로 이미 걸쇠를 박살 내놓은 상태였다.

아니.

아주 녹여 버렸다고 해야 하나.

이젠 더 이상 성문의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다.

<심연> 오케이. 여기도 끝났다. 이제 빠지자. 이제 곧 녀석들이 몰려온다.

그렇게 위를 보자 어느새 성벽 위에서 유저들이 급하게 뛰어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미친! 안 돼!”

“젠장! 레베 지키는 새끼들은 대체 뭐한 거야!”

“어떻게든 복구시켜!!”

“어어?! 도개교가 내려간다!!”

“야! 성문도 박살 났어!!”

“당장 무거운 물건이라도 가져와! 어떻게든 성문을 막아야 해!”

“성문 뚫리면 개싸움이야! 빨리 막아!”

전체 페가수스 연합의 유저들이 전부 프로게이머인 건 아니었다.

대부분은 일반 유저들이라는 거지.

그리고 지금 협곡을 통과하려는 상대를 빠르게 추적한다고 꽤 많은 정예 녀석들이 바깥으로 나갔다.

거점의 성문이 이렇게 뚫릴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을 테니.

방어 병력에 굳이 정예를 둘 필요가 있나.

어차피 수성 병기로 방어하는데.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성벽이라는 보호가 없다면.

4대1의 비율은 순식간에 쓸려버릴 정도의 병력 차이였다.

“성문이 열렸다!! 전부 전진!!”

“다 죽여 버렷!!!”

“우와아아!! 밀고 들어가자!!”

우르르릉!

수도 없이 많은 유저들의 발 구름이 진동을 일으키며 전장의 느낌을 확실히 전달해 주었다.

이건 생각 이상으로 짜릿한데?

그렇게 아주 물 만난 고기들처럼 신나게 달려오는 아군들을 보고는 씨익 웃어 보였다.

“그래, 아주 다 쓸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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