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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922화 (912/1,404)

#922화 격전의 거점 쟁탈전 (9)

혼령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사실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녀석이 던진 단 한 마디의 말 덕분에.

딱히 초월 연합이 무너지던.

무너지지 않던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

<윈> 형, 아무래도 이 녀석…… 이기고 지는 데는 관심이 없는 것 같죠?

재중이 형 역시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심연> 어, 애초에 목적 자체가 다른 놈이야.

패황은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으나.

혼령에게 자신의 뒤를 맡긴 것은…….

그리고 돌아오는 재중이 형의 대답도 내 생각과 똑같았다.

<심연>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지. 이 녀석은 패황의 밑에 있고 싶은 게 아니라.

<윈> 네, 이 거대 연합을 통째로 먹고 싶은 거겠죠.

그동안 몇몇 유저들을 지켜본 결과.

누구 밑에 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예전에 천상 연합의 해원 같은 녀석.

차라리 로스트 스카이를 접으면 접었지.

녀석이 다른 유저 밑에 들어가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아.

요즘은 뭐하는지 모르겠다만.

어쩌면 이미 초월 연합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내어주고는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접었을지도 모르겠다.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테니.

같은 이유로.

이 혼령이라는 녀석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위에 있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향이랄까.

거기다 예전에 페가수스 연합의 연을 돈으로 포섭하려고 했던 것을 봐서는 실력자에 대한 욕심도 상당해 보였다.

이 두 가지를 합치면.

답은 바로 나오지.

자신만의 거대 연합.

그것도 본인이 주가 되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거대 연합을 원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패황이 주가 되는 연합이 아닌.

녀석에게 문제는.

본인에게 주도권이 없는 지금의 연합 구조였다.

그런 와중에 우리가 끼어든 상황.

아마 녀석에게는 이것도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손수 나와 이야기를 들어본다는 것도 그런 생각들이 일치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녀석과 우리의 이해관계의 일치.

세세하게 파고들면 전혀 다른 이해관계이긴 한데.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가 원하는 관계이긴 하다.

결국 우리가 녀석의 의도를 파악하자 녀석도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었다.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하던 혼령이 곧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우리 정체 모를 유저께서는 어떻게 내게 그 쓸모를 증명해 주시려나?”

쓸모의 증명이라…….

한마디로 자신에게 쓸모가 없으면 지금의 자리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었다.

재중이 형 역시도 맞다는 듯 말했다.

<심연> 우리 실력은 보여 주었지만 모자라다는 거겠지. 녀석 입장에서는 충분히 나올 만한 말이야.

<윈> 뭔가를 더 보여 달라는 거군요?

<심연> 그래야 녀석도 배팅할 수 있을 테니.

아무것도 없는데.

그것도 정체까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재중이 형 말대로 혼령이 저렇게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당장 우리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봤을 테니까.

이 자리에 나온 것만으로는 부족해.

<심연> 이러면 혹할 만한 걸 던져 줘야지.

<윈> 그럼 예정대로?

<심연> 그래, 심플하게 가자. 괜히 말만 길어져 봐야 의심만 할 뿐이야. 차라리 이렇게 원하는 것이 확실한 녀석이 다루기는 훨씬 좋아.

잠시 재중이 형과 눈을 맞추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녀석을 끌어낼 생각이었으나.

녀석이 바라는 게 너무 명확하니 그 과정은 생략해도 좋을 것 같았다.

“답하기 곤란한 건 답하지 않아도 좋아. 어차피 그쪽도 녹화를 하고 있을 테고.”

내 말에 혼령이 입을 꾹 다물었다.

여차하면 빠져나갈 궁리는 다 해놓았다는 거려나.

우리 정체를 모르는 이상.

이렇게 따로 만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정말 자칫 잘못하면 초월 연합의 끄나풀들과 따로 만난다고 생각할 테니.

“피차 시간 없는 사람들끼리 복잡한 건 됐고.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 중 하나를 미리 말해 주지.”

“그게 뭐냐?”

나름 기대가 된다는 듯 녀석이 귀를 기울였다.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상당히 기대하고 있잖아?

“일단은 저 거점 페가수스의 성문을 우리가 강제로 열어 줄 수 있다고 할까?”

“뭐?!”

솔직히 그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닌데.

하지만 혼령에게는 꽤 놀랄 만한 제안인 모양이었다.

“네가 원하면 지금 당장에라도 열어 줄 수 있고.”

“정말인가?”

“잊었어? 아까 우리 꽤 찐하게 검을 마주 댄 것 같은데? 그것도 아무도 몰래?”

정확하게는 너의 목에 나의 검을 가져다 댄 것이지만.

그때의 생각이 나는지 녀석이 섬뜩한 표정을 짓더니 반사적으로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흠, 확실히. 그런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가능한 게 아니라 무조건 된다.”

이런 건 확실하게 못을 박아줘야 한다.

녀석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러자 이번에는 녀석이 주판을 튕기기 시작했다.

“저 거점 페가수스의 정문을 열려면 못 해도 수천 단위의 유저들이 죽어 나가야겠지.”

“잘 알고 있네.”

아무리 공성에 무지한 녀석이라고 하더라도.

저런 난공불락의 거점을 뚫기 위해서 얼마나 큰 손실을 각오해야 하는지는 어림잡아 잘 알 것이다.

그것도 한 연합을 이끄는 이 녀석이라면.

더욱 잘 알 테고.

옆에 있던 재중이 형이 조금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죽어나간 병력이 멀리 있는 다른 거점에서 지원을 오는 시간 동안 상대적으로 병력비가 뒤집어진다. 이쪽의 우세에서 수성의 우세로.”

공성을 하는 패황 쪽 연합들의 숫자는 대략 8천에서 1만.

성문 하나 열자고 수천이 죽어나 가는 동안 공성 측의 숫자가 계속 줄어들게 된다.

절반 혹은 그 이상.

반대로 수성 측은 2천이지만.

죽은 유저가 고스란히 다시 부활해 수성에 복귀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건 숫자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말과 동일하니까.

거기다 다른 거점에서 순식간에 포탈로 추가 지원을 보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공성을 했을 경우.

패황 쪽 연합에서 성문 하나 뚫는 사이.

이미 게임은 져 있다.

왜 그런 경우 있지 않는가.

시작도 안 했는데 지는 게 뻔히 보이는.

재중이 형의 말에 혼령도 이마에 손을 짚으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누구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왜 지금 저 바깥으로 진만 치고 관망만 하는지.”

“싸워 봐야 결과가 뻔하니까.”

지금 말을 들어보면 아까 봉우리에 모여 있던 연합장들이 죄다 머저리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질 게 뻔한 싸움이라…….

패황 역시 당장 전면전을 하지 못하게 한 건 어쩌면 같은 이유일 지도.

그런 혼령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걸 뒤집을 수 있다면…… 당신은 이 전장의 영웅이 되겠죠. 두고두고 유저들의 입에 오르내릴.”

“흠흠.”

녀석도 아주 싫은 건 아닌 모양이네.

그런데 잠시 고민하던 녀석이 조금은 의외의 말을 해왔다.

“하지만 말이야…… 이쪽이 압도적으로 이겨서는 곤란한데.”

그 혼령의 말에 재중이 형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심연> 역시 꿍꿍이가 있네.

<윈> 네, 확실히 그렇게 보이네요.

“이기는 건 되는데. 너무 크게 이기면 안 된다는 건가?”

“곤란하다는 거지. 안 된다는 건 아니고.”

그러면서 다시 말을 슬쩍 넘기는 혼령의 모습.

어지간히 녹화되는 걸 꺼려하는 것 같네.

하긴 지금의 내용들이 퍼져 나가면 녀석에게는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대화가 답답해지지.

재중이 형이 손을 휘두르면서 혼령에게 말했다.

“아, 녹화는 서로 끄도록 하지.”

“흠, 좋아.”

녀석도 내심 원했는지 서로 시스템을 끄는 걸 확인시켜 준 뒤에야 제대로 된 대화가 오갔다.

“성문을 열어주는 건 확실하겠지?”

혼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시간대에 언제라도 가능하다.”

“아주 마음에 든다. 그런데 하나를 더 처리해 줄 수 있나?”

“무슨?”

우리가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혼령이 눈빛이 싸늘하게 깔고는 말했다.

“다른 연합장들의 목.”

그러자 재중이 형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호오, 압도적으로 이기는 건 안 된다는 게 이거였나?”

“그렇지. 그 녀석들이 남아 있으면 시선이 꽤 분산되거든.”

한마디로 이번 공성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본인이 받고 싶다는 말이었다.

“아예 적장의 목도 네가 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

“흠, 그것도 가능한가?”

“아니, 그건 불가.”

재중이 형도 안 되는 건 바로 선을 그어 버렸다.

페가수스 연합장인 연을 이 녀석이 죽인다?

내가 보기엔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레스에게 듣기로 혼령 이 녀석도 꽤 실력은 있어 보이긴 하는데.

연을 상대할 정도의 실력자는 아닌 것 같으니까.

아예 다 잡아놓고 막타를 치라고 하면 또 모르겠지만.

프로게이머인 연이 그렇게 호락호락 당해줄 만큼 약한 게 아니었다.

특히 활을 다루는 민첩 계열의 프로 유저를 잡아다 바친다?

이건 성문을 열어 재끼는 것과는 난이도 자체가 다르다.

애초에 미리 고려한 계획도 아니었고.

“아쉽군. 그 건방진 녀석 면상을 한 번쯤 밟아 주고 싶었거늘.”

아, 그러고 보니 전에 연을 포섭하려다가 망했다고 했던가.

본인 성격을 못 이기고 박차고 나왔다고 하니 아마도 그 자리에서 상당히 당한 모양이었다.

그런 혼령의 바람은 내가 다시 끊어놓았다.

“나중에 본인이 직접 해보던가 하고. 요점은 거점 쟁탈하는 한 가운데 네가 있으면 된다는 거잖아. 다른 연합장들은 전부 죽거나 불능 상태가 되고.”

“할 수 있겠나?”

어쩌면 이적 행위가 될 수도 있는 걸 잘도 부탁하네.

그런데 이게 또 구미에 당긴단 말이지.

우리도 한쪽이 너무 이겨 버리는 건 곤란한 입장이었다.

좀 더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파먹어가면서 싸워 줘야지.

잠시 재중이 형과 눈을 맞췄다.

<윈> 형, 생각난 게 있는데 해봐도 될까요?

<심연> 좋을 대로.

<윈> 어떻게든 서로 전력이 낮아지면 되는 거잖아요.

<심연> 그러면 우리에겐 최선의 결과지. 하지만 어떻게 하려고? 당장 죽을 자리로 밀어넣어 봐야 녀석들은 움직이지 않아.

<윈> 음, 생각해봤는데 지금 같은 생각은 이 놈만 하고 있을까요?

<심연> 호오? 욕심을 부추겨 보겠다?

<윈> 네, 분산 효과도 있을 테고요.

몇 가지를 말하자 재중이 형도 흡족한 듯 미소지었다.

<심연> 오케이, 가능하겠어.

<윈> 그럼. 해보죠.

그때 우리의 의논이 다소 기다리기 힘들었는지 혼령이 물어왔다.

“더 기다려야 하나?”

“요구 사항이 늘어난 만큼 우리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지?”

“아니, 우리가 할 건 없다.”

“뭐?”

“대신 네가 할 게 있지.”

“……뭘 하면 되는 거냐?”

그런 혼령의 물음에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간단해. 다른 연합장들의 세력을 전부 외곽으로 돌려. 협곡을 따로 타고 넘어가도록.”

내 말에 혼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불가능해. 이미 실패하기도 했고. 죽을 자리를 뻔히 알면서도 넘어갈 멍청이들은 없다.”

“아니. 이건 양동작전이다.”

“양동작전?”

“그래, 그것도 네가 미끼가 되는 양동작전. 너 정도는 목숨을 걸어 줘야 다른 녀석들이 움직일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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