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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919화 (909/1,404)

#918화 격전의 거점 쟁탈전 (5)

거점 페가수스의 성벽은 상당히 높았다.

이건 단순히 이 거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거점 역시도 마찬가지.

초기 때에는 이렇게까지 성벽이 높진 않았지만.

어지간한 성벽 정도야 그냥 뛰어넘을 정도로 유저들의 스펙이 좋아졌으니까.

당장 여기 옆에 있는 레스만 해도 마음만 먹으면 도움닫기로 2~3 미터는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유저들보다 더 강한 네임드는 말할 것도 없었고.

아니 그보다는 성벽을 그냥 때려 부술 정도로 강한 게 더 문제겠지.

거기다 고작 하나의 광역 스킬로 성벽 전체를 날려버리는 녀석들도 즐비했다.

사실상 거대한 성벽 자체가 가져다주는 위엄이라던가 하는 게 예전보다는 꽤 감소했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성벽은 아직까지는 공성전에서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었다.

유저에 한해서.

물론 우린 유저로만 구성된 파티는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슬쩍 발록을 보며 물었다.

높디높은 성벽을 가리키며.

“발록, 어때? 저거 넘을 수 있겠어?”

내 그런 물음에 발록이 한숨 쉬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건 거의 어이가 없다는 정도의 딱 그 표정이려나.

“그걸 질문이라고…….”

“아아, 미안. 그냥 확인차.”

아무래도 내가 네임드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싶기도 하고.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려 뱀파이어 로드를 보자 역시 마찬가지인 표정이었고.

다만 얼음 여왕은 조금 태도가 달랐다.

“넘어가면 저것들을 죽일 수 있나?”

흠.

이쪽은 생각 이상으로 다혈질 같아 보여…….

겉으로는 차가운 성격에 별로 감정의 동요가 없어 보이는데 속에서는 활활 타오르는 감정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음, 퀸은 조금 진정하고.”

퀸을 말리지 않고 가만히 뒀다가는 그냥 넘어가서 다 죽여 버릴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도 우리에게 나쁜 결과는 아니지만.

단독으로 넘어가서 죄다 죽여 버리기라도 하면 정체가 탄로 난단 말이지.

아직까지는 네임드라는 걸 들키지 않았으면 했다.

결정적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일단 죽이기는 할 거야.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냐.”

당장 네임드 중에 하나를 성벽으로 넘겨서 안쪽에서부터 죽이고 성벽을 열어 버리면 그만이긴 하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백병전으로 전투가 이뤄질 테니까.

그런데 문제는…….

앞에서 몸빵을 해줄 저놈의 부대가 너무 오합지졸 부대란 말이지.

“형, 저대로는 못 이기겠죠?”

내 물음에 잠시 패황 연합.

정확히는 그 산하의 혼령 연합을 본 재중이 형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마도 차려준 밥상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확률이 높지.”

저 개떼처럼 모여 있는 연합에는 단순히 혼령 연합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장 많은 숫자가 혼령 연합이라는 거지.

실상 그보다 수 배는 많은 다른 연합 유저들이 곳곳에 포진되어 있었다.

각자 자신들의 명령 체계를 가지며.

“당장 봐도 따로 노는 머리만 몇 명이야. 부대의 진형도 다 각자 알아서 하자는 느낌에다가…… 옆에서 싸우고 있어도 본체만체하는 놈들도 있네.”

재중이 형도 이건 도저히 각이 안 서는지 한심하다는 듯 저 대규모 군대를 바라봤다.

옆에서 우리 대화를 듣던 레스가 역시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급조한 부대라 어쩔 수가 없어. 심지어 그 연합장들끼리도 서로 멱살을 잡던 사이라.”

“뜻을 모으긴 했는데…… 대장은 없다 이거네요.”

패황이 좋은 능력을 가진 건 알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몇 개의 연합을 통괄할 정도의 능력은 또 아닌 모양이었다.

시간이 부족했다고 하면 뭐 할 말은 없긴 한데.

애초에 반 통제 연합이 아니면 한 자리에 있을 녀석들도 아닌지라.

결국 저 오합지졸 부대를 이끌고 저 단단한 페가수스 연합, 그리고 그 산하의 여러 개 연합들과 부딪혀야 한다.

그것도 거점을 공성하면서.

“숫자는 그래도 이쪽이 앞서죠?”

사실상 우린 외부인이라 패황 연합 전체의 전력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바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흡수된 길드의 숫자 정도.

그 외에 자잘하게 붙어 있는 숫자는 더욱 알기 힘들고.

이건 전사 형도 정확하게는 파악하지 못 했다.

그러자 레스가 대략적인 추정치를 내놓았다.

“음, 알려지기로 대략 네다섯 배 정도는 많아. 우리도 정확히 파악은 못 했지만.”

“꽤 많네요.”

그 말에 재중이 형도 다소 놀란 눈빛을 했다.

“휘유, 벌써 그렇게 불었어?”

생각 이상의 숫자.

“지금 저 거점에 있는 페가수스 연합들 전부 합치면 몇 명이죠? 아래 있는 연합들 다 합쳐서요.”

내 물음에 레스가 다시 답해 주었다.

“아마 2천 정도는 될걸?”

사실 2천도 적은 숫자는 절대 아니었다.

한 자리에 그 정도의 접속자를 모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지.

다들 평소 자신들의 할 일도 있는데 그걸 제외하고도 이런 숫자가 모였다는 거니까.

아마 주말이나 다른 때였다면 이보다 훨씬 많은 유저들이 모였을 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쪽도 비슷한 숫자여도 놀라울 건데.

그보다 네 배가 더 많다면.

“그럼 이쪽은 대략 8천에서 1만 사이겠네요.”

이 쟁탈전에 이만큼의 숫자가 모였다는 것 역시도 놀라웠다.

그리고 숫자를 듣고 나니 왜 이렇게 바깥에서만 치고받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냥 대놓고 치고 들어가면 안 되나요? 이 숫자면 어느 정도 죽어도 해볼만 하겠는데.”

“음, 이미 해봤지.”

“네? 해봤어요?”

이건 또 의외네.

지금 모여 있는 병력들이 그냥 대기만 하고 있던 게 아니라 이미 한 번 치고 박았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왔을 때 몇몇 곳에서 격한 격투가 치러진 흔적이 보이긴 했었다.

단순히 적들이 습격을 한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말이야.

사실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레스가 주변을 싹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말한 숫자보다 지금은 좀 적어 보이지 않아?”

“음, 너무 많아서 헤아리긴 쉽지 않네요.”

“좀 많이 줄었어. 아마 이천 명 정도는 그냥 죽었을 거야.”

“거의 전체 병력의 5분의 1이군요.”

내 대답에 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을 위해 우리까지 부른 게 이런 이유에서였던가.

안 그래도 한 방 붙었는데 심하게 깨졌으니 흩어져 있는 아군들을 전부 불러 모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깨진 거죠?”

분명히 패황은 전면전을 꺼려하지 않았던가?

그럼 이렇게 붙을 이유는 없었을 텐데.

거기다 기습이라고 해도 저 피해 숫자는 좀 의외였다.

너무 많이 당했어.

“함정에 당했지.”

“함정요?”

“아, 정확하게는 혼령하고 다른 연합장이 서로 의견이 갈라지더니 혼령하고 싸운 연합장이 단독으로 협곡을 넘어가다 연합이 완전히 괴멸됐어. 그다음에 기세를 탄 녀석들이 본대도 좀 건들고 간 게 지금 이 모양이고.”

“……개판이네요.”

서로 불협화음이 난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건 상상 그 이상의 개판이었다.

“패황이 여기 대기하라고 하지 않았나요?”

“하하…… 어디 말을 들을 위인들이던가, 연합장이라는 녀석들이. 자기 잘난 줄만 알지.”

“끄응.”

레스의 말에 재중이 형도 두 손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더니.

아니다.

이건 사공이 너무 많아서 배가 정말 산으로 간 거였다.

상징적인 산도 아닌 협곡 너머로.

그렇게 따로 개별 행동을 하다가 요격당해 전멸한 거다.

그리고 아마 지금쯤 각 연합장들이 핏대를 세워가면서 서로 쌍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생각해요?”

재중이 형에게 물어보자 역시 난색을 표했다.

“이거 연합장들 대가리를 전부 깨놓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겠는데?”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좋은 방법이긴 하다.

그럴 능력도 충분하고.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한다고 해도.

자기들 멋대로 할 건 뻔하다는 거였다.

상대인 적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꼴이라니.

이건 당장 패황이 달려와서 지휘를 해도 될까 말까다.

재중이 형도 그냥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지 실제로 저렇게 하진 않을 생각 같았다.

그럼 결국 병력 대 병력이 붙긴 해야 할 텐데.

가급적이면 최선의 상황에서.

“그 죽었다던 2천의 병력은 지금 어디죠?”

“음, 부활해서 가장 멀리 있는 아군의 거점에서부터 달려오는 중일 거다.”

“도착 시간은?”

“대략 두 시간 정도?”

“지나치게 머네요.”

거점 사이의 거리가 먼 건 익히 알고 있지만.

실제로 이렇게 체감상 다가오니 얼마나 공성 측이 불리한 건지 뼈저리게 다가온다.

일단 죽고 나면.

바로 자신들의 거점에서 부활하는 녀석들과 달리 이쪽은 추가 수급이 어려웠다.

이건 말이 다섯 배의 병력이지.

성벽을 끼고 부활하는 수성 측이 오히려 더 유리해 보여.

한 번의 전투로 이쪽은 몇 시간의 공백이 있는 반면에.

저쪽은 반대로 금방 회복되어 숫자를 맞출 수 있다.

거기다 더 큰 문제는.

“녀석들은 필요하면 다른 거점에서 바로 텔레포트해서 추가 병력이 올 수 있죠?”

“그렇지. 조금만 밀린다 싶으면 바로 날아올걸? 전에도 그것 때문에 도저히 뚫을 수가 없었어. 숫자가 비등해지면 전력은 월등히 이쪽이 모자라니까.”

레스도 현 상황이 어느 정도 파악은 되는 모양이었다.

패황 연합의 실력이 대체적으로 딸린다는 사실을.

같은 쪽수로 붙으면.

무조건 발린다.

이건 무조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는데…….

단순히 저 전투에 우리가 추가로 끼어든다고 답이 나올 만한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물론 이쪽은 네임드 셋이 있으니 대단위 전투를 하더라도 충분히 압도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 쪽의 전력이 확 드러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아직은 주목 받아선 안 돼.

패황 연합에 끼어든 것도 그런 이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몸을 숨기기 좋으니까.

좋든 싫든.

이 오합지졸 연합을 가지고 어떻게든 해봐야 한다는 건데…….

“형, 좋은 생각 있어요?”

“흐음, 적이 너무 강하면 전력을 좀 깎아 두거나. 혹은 분산시켜야겠지.”

이건 전쟁의 기본 중에 기본.

그리고 재중이 형은 따로 생각을 해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것 같던 재중이 형이 곧 시선을 돌려 레스를 보며 물었다.

“어차피 연합장들이 다들 따로 논다면서요?”

“아, 그렇지.”

“그럼 단시간 내에는 어차피 단합도 안 될 테고. 우리가 그놈들을 다 때려눕힐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음.

재중이 형이 아까 한 말이 농담이 아니었나?

정말 때려눕힐 것 같은 기세에 레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이, 그런 말 어디 가서 막 하면 큰일 나. 연합에서…….”

“아, 됐고요. 그럼 어차피 다 따로 노는 거. 정말 따로 놀라고 합시다.”

“응?”

그러더니 재중이 형이 한 가지 말을 꺼내들었다.

“그 혼령이라는 양반. 지금 어디 있죠?”

“연합장을 왜……?”

레스의 떨떠름한 질문에 재중이 형이 환하게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아주 날카로운 웃음을 속에 품고.

“이 싸움 이겨 보려면 최소한 대가리 중에 하나는 억지로 끌고 가야 할 것 같아서.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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