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918화 (908/1,404)

#917화 격전의 거점 쟁탈전 (4)

거대한 협곡 사이를 두고 지나는 딱 하나의 길.

바로 그 좁은 통로를 완전히 틀어막고 있는 저 거점이 페가수스 연합의 소유의 거점이었다.

교통 요충지에 완전히 알을 박고 있는 형세랄까.

그리고 그런 협곡 사이에 만들어진 거점이다 보니 한 가지 무서운 점이 존재했다.

정면의 높디높게 쌓아올린 튼튼한 성벽.

일단 저곳만 틀어막으면…….

통과하기가 정말 힘들어진다.

그게 혹 네임드라 할지라도.

앞의 성벽을 따라 쭉 배치되어 있는 저 수많은 수성용 포격포가 한꺼번에 불을 뿜을 테니까.

거기다 공중은…….

잠시 고개를 들어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마계에서 제대로 된 공중 지원은 무리다.

비공정도 똑바로 날아다니지 못하는 판국에.

물론 아주 돌아다니지 못하는 건 또 아니다.

이전에 마계 상인들이 그러했듯 정해진 코스를 따라서 몬스터나 마족 약탈 세력이 없는 곳으로만 날면 어떻게든 안전하게 도착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도 아니란 말이지.

내가 없는 시간동안 수많은 업데이트를 하면서 지금은 기존의 경로들마저도 꽤 위험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오히려 약탈자들이 더 많아진 느낌이랄까.

거기다 유저가 건들지도 못하는 마룡들도 꾸준히 늘어나 이젠 공중으로 올라가는 시도도 하기 힘들어진 상황이랄까.

아마 지금쯤 마계 상인들도 곡소리를 내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당연히 마왕들은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만 정리를 해놨을 테고.

아니, 오히려 마왕들이 굳이 나서서 공중을 정리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멀리 페가수스의 거점을 바라보았다.

공중이 막히는 순간부터.

현재의 저 페가수스의 거점은 난공불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견고한 방어에서 오는 자신감이랄까.

숫자에서 부족해 수성을 해야 하는 페가수스 연합 유저들이 오히려 성벽을 열고 나와 패황 연합 유저들을 공격하는 괴상한 광경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개판이네요.”

거기다 더 문제는.

페가수스 연합에서 절대 공격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던지 패황 연합의 진형이 다소 엉망으로 배치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병력 배치가 너무 제멋대로야.

통일성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나마 후방에 있는 본진 쪽에서는 어느 정도 배치가 되어 있긴 한데.

그것도 딱히 상황이 좋아보이진 않았다.

문제는.

누군가 이걸 탓할 수도 없다는데 있었다.

재중이 형이 계속 달려가면서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이거 참. 저 수많은 병력을 가지고 이런 운용이라니…….”

얼마나 기가 차면 이런 말을 할까.

재중이 형 말도 이해가 가는 게 아무리 봐도 지휘 계통이라는 것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억지로 막 모아둔 초년 징집병 수준?

차라리 거기서 끝나면 더 좋긴 한데…….

더 큰 문제는 유저들의 통일됨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워낙 로스트 스카이를 즐기는 유저들이 많고 특색 다양한 길드가 포진해 있다 보니 어떤 길드는 자기들끼리 단독 행동을.

몇몇 길드는 우왕좌왕 정리가 안 되고.

또 어떤 길드는 관망하면서 구경만 하는 곳도 있었다.

그나마 단체 행동이 가능한 길드들에서도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서인지 이도저도 아닌 움직임을 보여 주었고.

“좀 잘 하는 녀석들이 있어도, 주변 수백 명의 유저들을 한꺼번에 통제할 능력이 안 되면 순식간에 저렇게 되어 버려. 멀쩡히 명령이 퍼지다가도 중간에 중구난방으로 다른 명령이 들어오거든.”

“하, 오히려 숫자가 많은 게 더 문제네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던가.

그리고 지금 그 사공 숫자가 최소 수백이다.

“당장 단순하게 기습당한 것만으로도 저렇게 난린데. 급박한 상황이 되면 명령이고 뭐고 싹 무시한 채 자기들 멋대로 움직일 거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지만 내 설마는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페가수스 연합에서 나온 기습 공격에 외곽 길드들부터 피해가 급격히 늘어나자 그 녀석들이 진형 안쪽으로 도망 친다고 밀고 들어와 순식간에 개판이 되어 버렸다.

한쪽에서 밀리니 다른 쪽에서는 무슨 일인지 파악도 못하고 같이 밀려 버리는 상황인 것이다.

거기에 페가수스 연합에서 나온 녀석들이 한 방향만 치는 게 아니었다.

곳곳에서 나타나 패황 연합의 라인을 흔들고 빠지자 패황 연합 전체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패황이 이거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겠네요.”

“그 녀석 아마 지금쯤 초월 연합의 공세를 막아 내는 것도 벅찰걸?”

“거기도 공격했대요?”

“좀 전에 전사에게서 소식 들어왔다. 이곳뿐만 아니라 그쪽에서도 공성을 시작한 걸로.”

“양쪽 다 나눠서 박살 내겠다는 거네요.”

전신이 생각 외로 준비가 빠르네.

상당히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정비를 해서 나설 거라 생각했는데 모든 것들이 생각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이루어졌다.

그만큼 연합의 정비가 잘 되어 있다는 뜻이려나.

오합지졸인 패황 연합과는 달리.

물론 패황이 차지한 거점에는 1군 격인 애들이 갔을 테니 저 앞에 보이는 녀석들처럼 개판 치지는 않겠지만.

“뭐 그래도 이걸로는 끝나진 않을 거야. 안에서 나올 병력은 한정되어 있으니. 아마 좀 흔드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까.”

재중이 형 말처럼 페가수스 연합도 거점에서 아예 병력을 다 빼올 수가 없는 것은 혹시나 모를 위협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거점을 홀라당 비웠다가 통째로 넘겨준 짓을 또 한다는 건 뭐…….

이미 한 번 당해 봤는데 또 그럴 정도로 멍청이들은 아니니.

그 덕분인지 패왕 연합은 개판으로 흔들리면서도 최악의 상황만은 면하는 수준이었다.

남은 정예 병력이 제일 많이 몰린 이곳이 이럴진데…….

다른 곳은 안 봐도 뻔하겠네.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덜한 다른 두 곳의 거점.

아니.

그냥 셋 중에 하나를 찍어서 온 느낌이 더 강하달까.

그리고 굳이 이렇게 난공불락인 거점을 콕 집어서 온 것도 정상은 아니고.

“대체 누가 여기 대장이에요?”

패황 연합의 본대야 이미 대천사의 무덤 쪽 거점을 차지하고 있으니 뺀다고 치더라도.

그래도 좀 머리가 돌아가는 놈 한둘 정도는 남겨 놨을 텐데.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다고 의사전달이 안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당장 연락만 취해도 금방 오더를 전달할 수 있었다.

슬쩍 우리 대화를 든던 레스를 바라보자 레스가 바로 쓴웃음을 지었다.

“좀 많이 답답하지?”

“일단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요.”

“흐음, 어디서부터 이야기 해야 하나. 지금 이곳 거점을 지휘하는 게 패황 연합 산하의 혼령 연합이거든.”

혼령 연합?

재중이 형을 보자 재중이 형이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도 꽤 규모가 크지. 문제는 패황 연합하고 그다지 안 친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어이구, 안 친하기만 하면 다행일까. 맨날 칼부림 하던 곳인데…….”

둘의 대화를 듣는 순간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음.

그러니까 둘 다 원래 치고받던 사이인데 지금은 아군이라는 뜻인가?

뭐 이런 관계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서 놀랄 일은 아니긴 한데…….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언제든 전략적 관계에 따라 손을 잡을 수 있는 곳이 이 바닥이다.

“그런데 말이야. 이 혼령 연합의 장인 혼령의 고집이 장난 아니거든.”

“그래요?”

“오직하면 독불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겠어. 자기 멋대로 하는 건 기본이고. 자기 기분 따라서 매번 길드와 연합을 들었다 놨다 하거든.”

“흠, 잘도 그런 길마에게 유저들이 붙어 있네요. 거기다가 패황이 자기 다음으로 큰 분대를 맡기다니.”

패황의 안목이 잘못 된 건지.

아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건지.

아무튼 둘 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 눈에 보이는 걸로만 확인해보면.

그때 레스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휴, 그 혼령 길드 길마가 이게 좀 많아.”

그러면서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아, 돈이요?”

“그렇지. 자기 멋대로 하기는 하는데. 쓸 때는 팍팍 써 주거든.”

하, 왜 이렇게 돈 많은 녀석들이 많은지 모르겠네.

“형, 생각보다 우리나라 사람들 잘 사나 봐요.”

내 말에 재중이 형이 피식 웃어버렸다.

“잘 사는 놈들만. 아무튼 연합을 굴릴 정도로 재력이 있다는 거군요.”

“음, 듣기로는 어디 기업 3세라고 소문이 돌던데…….”

레스의 그 말에 재중이 형을 보면서 물었다.

“혹시 패황하고 둘이 서로 아는 사이 아닐까요?”

“뭐 그럴 수도 있고.”

단순히 돈 좀 쓴다고 이 거대한 연합을 맡겨 놓았을 리는 없을 테고.

애초에 서로 아는 사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아, 그리고 예전에 혼령이 저 페가수스를 돈으로 사려고 했다는 소문도 있었던가…….”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보다시피?”

“하긴 포섭됐으면 지금쯤 아군이겠죠.”

“듣기로 혼령이 제 성질을 못 이겨서 밥상을 걷어차고 나왔다고…….”

큭.

이 사람 어디서 들은 소문은 굉장히 많네.

가쉽거리를 이렇게나 많이 아는 사람도 있구나.

혹시나 해서 한 번 물어보았다.

“저기, 예전에 랭킹 1위 했던 유저 있잖아요. 그…… 주 뭐라더라…….”

“거참, 신입이 이래서 안 돼. 전설적인 유저잖아. 지금은 은퇴한.”

“그래요?”

“흙수저들의 빛이었지. 최강의 프로게이머였던 불멸과 함께 서버를 제패한. 당대 내놓으라던 길드들 전부 실력으로 개박살내고 당당히 1위에 올랐잖아.”

“아…… 은퇴했군요.”

“돌연 사라져서 아쉽지. 그 사람만 있었어도 지금 이 정도로 서버가 개판은 아닐 텐데. 듣기로 이쁜 연예인 와이프가 임신해서 칩거 중이라던가…….”

레스의 그 말에 순간 뜨끔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려서.

아니.

사실상 틀린 말이긴 한데…….

웃고 넘길 수만은 없는 가쉽이라.

“하하, 꽤 가정적인 분이네요.”

“에이, 애 키우려면 더 바싹 벌었어야지. 은퇴는 왜 해?”

음.

이미 이분 머릿속에는 내가 강제로 은퇴 당해 있었다.

옆에서 재중이 형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잡고 있었고.

<윈> 아, 너무 웃지 마요.

<심연> 크큭, 저놈 하는 말 듣다 보니 안 웃을 수가 있나.

하아.

강제 은퇴도 서러운데.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농담은 여기까지.

이미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장소에 바싹 다가왔다.

내가 물어보자 레스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본대에 합류한다고 연락을 넣어놨거든.”

“답변은요?”

“지금 챙길 여력이 없으니 자체적으로 판단해서 적당한 부대에 합류하라고……. 보고는 나중에 해도 된다 하네.”

“미친.”

순간 욕이 나올 법한 걸 꾹 참았다.

“사실 우리가 그다지 중요한 부대는 아니니까.”

“아, 자사…….”

일명 자살 부대.

혹한의 얼음 여왕을 어떻게든 잡지 못하게 몸으로 때워서 저지하는.

어떻게 보면 연합에서 전력상 버린 부대나 마찬가지였다.

각 길드에서 마지못해 억지로 차출한.

그다지 쓸모가 없는 딱 그런 정도의 존재감.

레스도 그걸 잘 아는지 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서버 내의 가쉽을 좋아하고 게임을 즐기는 사람인데.

정작 중요한 시점에서는 한참 밖에서 나도는.

작은 조연도 아닌.

그냥 스쳐지나가는 NPC 같은 존재감이랄까.

오는 내내 나름 내게 즐거움을 주었던 레스의 의욕 없는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속에서 뭔가가 울컥했다.

“하, 이거 참 안 되겠네.”

“응? 뭐가 안 된다는 건가?”

“음…… 뭐랄까. 엑스트라가 엑스트라로만 있으면 재미없잖아요. 반전도 좀 있고.”

“에이, 그런 세상이 어딧나. 다 정해진 자기 자리가 있는 걸세.”

그런 포기하는 듯한 레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늘. 이 부대는 영웅이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신도 이 무대의 한가운데서 빛날 거예요.”

내가 강제로 그렇게 되게 만들 거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