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2화 폭주하는 네임드들 (14)
물약을 던져주면서도 반신반의 했다.
이게 과연 통할까하는 물음.
현재 혹한의 얼음 여왕 주변에는 온통 적들뿐인데 그런 그들과 전투 중이던 이 상황에 불쑥 나타나서 도움을 준다라…….
정체도 알 수 없는데.
심지어 은신을 하고 옆에 나타나서는 대뜸 물약을 먹으라고 하니.
나라도 좀 의심스럽긴 하겠다.
그래서 혹한의 얼음 여왕이 물약을 거절했을 시에도 몇 가지 패턴을 만들어두긴 했었다.
플랜A가 안 통한다고 넋 놓고 있다간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긴장을 하며 혹한의 얼음 여왕을 바라봤는데.
내 우려와 달리 그녀는 생각 이상으로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달갑지 않는 모양이었다.
의심스러울 만도 한데 주변에 포진한 적들을 한 차례 노려보고는 곧장 이를 갈며 물약을 들이키는 걸 보면.
솔직히 이 물약이 가짜거나 잘못된 거라면 혹한의 얼음 여왕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버티고 있으면 죽는 건 매한가지.
그리고 혹한의 얼음 여왕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내 손을 잡는.
그렇게 물약을 흡수하자마자 혹한의 얼음 여왕의 상태가 점점 좋아지는 것이 보였다.
크게 찢겨지고 벌어진 상처가 났던 부위들도 하나둘씩 아물어가는 것을 보면.
물약이 효과가 있긴 하네.
하지만 완전히 그녀의 상태를 회복시켜 주지는 못했다.
거의 말라가는 우물에 양동이 몇 번 부어준 격이랄까.
원래 네임드의 체력 자체가 유저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니…….
물약을 아무리 부어줘 봐야 임시방편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효율의 문제.
평소에 네임드가 물약을 먹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일 테고.
물론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그 한 방울이 혹한의 얼음 여왕에게 생명수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최저치까지 돌던 체력을 어느 정도 회복시키자 다시 굳건한 상태의 네임드로 돌아왔다.
이젠 어지간히 공격당해도 쓰러지지 않겠어.
그렇게 안정을 찾은 혹한의 얼음 여왕이 곧장 내가 서 있는 공간을 향해 물었다.
아마 대충 이쯤에 있으리라 생각한 것 같은데.
“넌 누구냐.”
“음, 일단은 아군이라고 해두지?”
너무 멀지도 않은.
그렇다고 의심을 살 정도로 들이대는 것도 아닌 딱 애매한 답변.
그리고 이 정도의 접근은 혹한의 얼음 여왕에게는 꽤 괜찮은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이어지는 전투로 긴장되고 차가웠던 표정이 살짝 풀어지면서 내게 말했다.
“……이 빚은 잊지 않겠다.”
“좋을 대로.”
역시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예전에 뱀파이어 로드는 일일이 다 설명을 해 줘서야 겨우 설득이 가능했었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끌고 온 보람이 느껴지네.
“조금만 더 버텨. 최대한 방어적으로. 굳이 네가 저 녀석들을 전부 죽일 필요는 없어.”
내 제안에 혹한의 얼음 여왕이 다소 거부의 늬앙스의 답변을 내놓았다.
“버티기만 해서는 적들을 이길 수 없다.”
“아니, 버티기만 하면이기는 거다. 이놈들을 죽이는 건 다른 녀석들이 할 테니까.”
그러자 혹한의 얼음 여왕이 멀리 있는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를 시선에 담았다.
“저들인가?”
“어, 이제 너도 알겠지?”
“강하군.”
전에 뱀파이어 로드 때도 그랬지만.
이 녀석들은 스스로 다른 존재의 강함 유무를 파악할 수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지금은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를 살피고는 내 말에 납득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최대한 버텨 보도록 하지.”
발록보다 오히려 더 과묵하다고 해야 하나?
오히려 뱀파이어 로드가 이들보다 더 텐션이 높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딱 할 말만 하고 말을 끊었다.
뭐 나야 이게 편하지만.
쓸데없이 말을 늘어놓는 스타일보다는 이쪽이 백배 나았다.
선택을 잘 한 것 같기도 하고.
【 트리플 템페스트! 】
그리고는 곧장 자신이 쓸 수 있는 최선의 패를 꺼내들었다.
세 개의 폭풍이 동시에 돌아가는.
혹한의 얼음 여왕의 최고의 광역 스킬이자 방어를 겸하는 스킬.
거기다 스킬 자체를 자신 주변에만 한정해서 압축시켰는지 밀도가 평소의 그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트리플 템페스트를 이렇게 쓸 수도 있던 거였어?
확실히 유저들과 네임드의 스킬 운용 능력은 차이가 나는 듯했다.
거기에 일단 스킬 자체가 열화되어 스킬북으로 떨어지는 거니.
아무래도 이쪽이 원조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유저들 측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트리플 템페스트?!”
“범위가 완전히 다른데?”
“몰라. 나도 처음 봐.”
“젠장, 하필 지금.”
“방금 누가 공격한 거야?!”
“은신으로 바로 숨었어.”
“디텍딩 스킬 풀어서 찾아내!”
【 디텍트 하이딩 유저! 】
【 디텍트 하이딩 유저! 】
어차피 디텍트 에어리어는 쓸 필요도 없었다.
주변에 은신을 하고 있는 유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렇게 곧장 디텍트 하이딩 유저를 써서 주변을 훑었다.
역시 이 녀석들 중 꽤 다수가 스킬을 지니고 있네.
한두 명만 데리고 있던 길드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하지만.
이 스킬은.
내겐 전혀 먹히지 않는다.
파장이 들어오는 순서대로 일일이 몸을 피해 파장을 피해버리자 결국 녀석들에게 걸리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안 걸리는데?”
“뭐?”
“아무도 없다고.”
“그게 말이 돼? 방금 전까지 주변에 있었잖아.”
“몰라. 전혀 안 걸리는 걸 어떻게 해.”
당황.
이 녀석들도 전반적인 실력이 좋긴 했다.
그런데 이건 실력을 떠나 스킬의 맹점을 뚫은 거라.
직접적으로 내 움직임을 느낄 수준이 아니라면.
은신한 나를 찾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이 녀석들과 전투를 벌이는 건…….
흐음.
이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한 번이라도 크리티컬을 넣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은신을 유지하지 못해 이 많은 유저들과 동시에 대치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
그건 내가 바라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이 모험을 걸 필요도 없었다.
일단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가 잘해 줘야 할 텐데.
그런 생각으로 둘을 보니 데스라는 유저와 발록은 치열한 격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불의 기운과 얼음의 기운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얽히면서 서로를 밀어내고 밀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 녀석.
예상 이상으로 버티잖아?
발록에게는 다소 강하게 나가지 말라는 말을 해 두긴 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버틸 수 있다는 건 유저 자체의 기량이 굉장히 좋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재중이 형이 인정할 만하네.
반면.
뱀파이어 로드 쪽은 상황이 좀 달랐다.
“커억!!”
“크윽!!”
녀석을 포위하던 두 녀석들이 차례대로 쓰러지면서 결국 포위망에 균열이 났다.
“고작 너희들로 날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냐?”
오.
확실히 네임드는 네임드네.
글래시어를 들고 있는 데스와 달리 이쪽은 뱀파이어 로드의 연이은 흡혈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솔직히 네임드를 상대하는데 겨우 저 소수 인원이 이때까지 잡아둔 것만 해도 충분히 박수쳐줄 만했다.
하지만 결국 레이드를 하던 본대가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차피 혹한의 얼음 여왕은 트리플 템페스트로 몸을 숨긴 상태.
그 안을 파고들 수 있나 하면.
또 그건 어렵지.
결국 레이드 자체가 엉망이 되어 멈춰 버린 상황이라 다들 손이 비어버렸다.
당연히 부글부글 끓는 화를 참지 못해 고함을 질러 댔다.
“저 새끼들 당장 잡아!”
“레이드는 다시 하면 돼. 저것들부터 조져!”
“감히 우리 초월 연합을 건들다니.”
음.
이건 왠지.
또 데자뷰 같은 장면이네.
발록에게도 똑같이 덤볐지 않았나?
물론 이번에는 질과 양이 모두 다르긴 해도.
이쪽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네임드가 무려 둘.
혹한의 얼음 여왕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최소한의 인원만을 남겨 둔 채 곧장 본대의 인원들이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에게 달려 나왔다.
그 모습에 발록의 눈썹이 확 치켜 올라갔고.
발록이 데스를 보면서 흥이 식었다는 듯 말했다.
“놀아주는 건 여기까지다.”
“뭐?”
데스 역시 눈을 찡그리며 뒤에 우르르 달려오는 녀석들을 보고는 놀란 눈을 했다.
거기다 멀리 펼쳐져 있는 트리플 템페스트도 발견했고.
“설마 못 잡았어?”
워낙 발록과의 접전으로 신경이 몰려서 그런지 이제야 상황 파악을 한 것 같았다.
당연히 자기가 발록을 잡고 있는 동안 혹한의 얼음 여왕을 처리할 거라 생각한 모양인데?
그 예상은 보란 듯이 깨고 레이드는 엉망이 되어 버렸다.
“다음에 보지. 연습 상태로는 괜찮았다.”
“……젠장.”
데스도 아마 가슴으로는 알지 않았을까.
발록이 상당히 힘을 세이브한 채로 싸웠다는 걸.
전력을 다하는 자신과 달리 발록은 시종일관 여유가 있었으니.
“넌, 대체 뭐냐?”
“알 것 없다.”
그리고 이젠 발록도 거칠 것이 없는 듯 한 손에 크게 기운을 끌어 모았다.
“날파리들을 잡는 데는 이게 최고지.”
발록의 팔과 손 전체를 아우르면서 아주 강력하게 압축되어지는 극한의 이글거리는 기운들.
그런데 그걸 본 순간.
데스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설마 당신…… 불멸입니까?”
응?
아…….
지금 발록이 쓰려는 기술은.
발록을 잡아야만 쓸 수 있는 스킬 중에 하나였다.
외형상 완전히 똑같을 테니.
그리고 지금까지 발록을 잡은 건.
재중이 형이 유일했다.
모습이나 아이디는 요즘 다 숨기면 그만이고.
그런 상황을 은신을 하고 있던 재중이 형이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어져서.
<심연> 이거 참…… 난감하게 됐네.
<윈> 네, 이건 좀 생각 외네요.
설마 발록을 보고 재중이 형이라 생각할 줄이야.
하긴.
그렇게 오해할 만도 하네.
유저들 중 저런 실력에 저런 스펙을 가진 부랑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것도 데스를 상대로 압도할 수 있는.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이없군. 난 그 녀석이 아니다.”
발록은 재중이 형을 잘 알고 있으니 저렇게 답변이 가능한 건 맞다.
그리고 그런 답변은 데스에게 혼란을 주기 충분했다.
“그럼 누구……?”
그때 내가 발록 옆에 바로 은신을 풀고 나타나서 손으로 데스를 제지했다.
“아, 거기까지.”
“넌……?”
“처음 뵙겠습니다. 윈이라고 합니다. 뭐 소속은 일단 패황 연합이겠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역시 패황 녀석이군.”
미안.
패황.
일단 좀 묻어가자.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
“불멸 님은 따로 적을 두진 않으셔서. 오해는 없으셨으면 합니다.”
“뭐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이렇게 정체를 숨기고 움직일만한 분도 아니고.”
“크흠.”
음.
이건 또 나름 뜨끔하네.
그 불멸이 지금 당신 주변에서 은신을 하고 지켜보고 있는데요?
차마 이 말은 하지 못 하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여긴 우리가 접수하겠습니다.”
“그렇게는 못 하지.”
그러자 곧장 발록에게 신호를 했다.
“발록. 쓸어버려.”
이미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었거든.
그러니까.
마무리만 확실히 하면 된다.
그건 여기 옆에 있는 발록 전문이기도 하고.
그러자 발록의 팔에 모여 있던 기운이 일제히 정면을 향해 폭사했다.
【 플레어 버스터! 】
발록의 최강 광역 스킬.
그 기술에 달려들던 유저들의 반수 이상이 한 번에 쓸려나가 그 자리에서 죽음의 빛으로 변해 버렸다.
눈치가 빠른 데스는 겨우 광역기 반경을 빠져나가다가 기겁을 하면서 자리를 이탈했고.
남은 유저들은 뱀파이어 로드가 아쉽다는 듯 역시 광역기를 써서 쓸어버렸다.
이 녀석들이 제대로 하면 뭐…….
이런 거지.
얼마 뒤.
더 이상 방해하는 유저들을 보기 힘들어지자 한껏 웃으면서 말했다.
“자, 그럼. 우리 여동생님을 맞이하러 가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