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화 폭주하는 네임드들 (13)
레이드를 방해하라고 보내놓은 녀석들이 전부 죽어 버리고 바리게이트에 구멍이 나자 결국 레이드를 하던 녀석들의 주의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누군가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
“레이드에 집중해!!”
주변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외침.
그 한 마디에 다소 동요하던 녀석들이 금세 안정을 찾고는 이내 다시 전형을 다잡아갔다.
흔들리던 기세를 한 번에 잡았어?
누구지?
그러자 재중이 형 쪽에서 휘파람을 불면서 기꺼운 눈으로 그 녀석을 바라보았다.
<심연> 호오, 저 녀석도 왔었나?
<윈> 누군지 알아요?
<심연> 어, 잘 알지. 전신만큼은 아니지만 저 녀석도 제법 한다고. 매번 프로 랭킹전에 들어가던 놈이니까. 굳이 실력으로 따지자면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
<윈> 그럼 꽤 거물이 왔네요.
심지어 녀석은 아예 초월 길드였다.
연합에 속한 수많은 녀석들과.
초월 길드에 들어가 있는 녀석은 엄연히 다르다.
저건 완전히 정예라는 뜻이다.
고르고 고른.
최정예.
아이디가.
데스.
꽤 균형 잡힌 날렵해 보이는 몸.
날카롭게 생긴 진청의 눈빛을 하고 손에는 정체모를 얇고 길쭉한 검을 한 자루 쥐고 있었다.
검신 전체로 하얀 기운이 맴도는.
물론 저 검이 얇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강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런 자리에 저런 실력을 지닌 자가 그냥 어설픈 무기를 들고 왔을 리는 없으니까.
저건 아마도 네임드 템이겠지?
슬쩍 재중이 형을 보면서 물었다.
“저 무기는 뭐예요?”
“어? 보면서도 모르나?”
“당연히 모르죠.”
“흐음, 저거랑 많이 닮았잖아. 앞에 있는 쟤하고.”
그러면서 재중이 형이 혹한의 얼음 여왕을 가리켰다.
“쟤는 마법산데요?”
“마법사형 네임드가 꼭 마법 아이템만 떨어뜨린다는 법이 없지. 아주 낮은 확률로 나오는 검이야. 미친 듯이 비싸기도 하고.”
“얼마…….”
“못해도 저거 하나에 건물 하나 값은 될걸?”
“……비싸네요.”
막상 가격을 듣고 나니 저 녀석이 들고 있는 무기가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검 주변에 하얗게 시린 기운은 아마도 저 무기의 특성이겠지.
스치듯 보면 그냥 하얀 안개에 녀석이 서 있는 것 같은 딱 그럼 모습이랄까.
“얼음 계열의……?”
“어, 근처만 가도 냉기에 몸이 서서히 굳어 버려. 유효타를 맞으면 그 자리에 바로 얼어 버리고. 직격을 맞으면…….”
“그냥 끝나겠군요.”
“그렇지. 거기다 현재 그 어떤 상태 이상 회복 스킬이나 아이템으로도 안 풀려. 걸리면 그냥 도망가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
“정말 굉장하네요.”
“쟤들이 이 난리를 피우면서도 혹한의 얼음 여왕을 붙들고 안 놓는 이유를 알겠지?”
솔직히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네임드 하나둘 정도는 그냥 놓쳐도 되지 않나.
당장 이걸 잡지 못한다고 휘청거릴 정도로 쌓아 둔 전력이 약한 것도 아닐 테고.
물론.
수익도 수익이지만.
평소에 잡아 오던 네임드 시장을 내어준다는 것 자체가 연합의 위신이 깎이는 일이기도 하다.
다른 유저들이 보기에 얕잡아 보일 수도 있는 노릇이고.
그런 것 있지 않나.
완전히 내 것이라 생각했던 걸 뺏기면 더 기분 나쁜.
초월이 딱 지금 그런 모양새였다.
안 잡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놔두기도 뭐한.
그런데 지금 혹한의 얼음 여왕을 잡기 위해서 지원한 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마치 이것을 잡지 않으면 오늘 자신들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재중이 형의 말을 듣자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제 이해가 되네.
저런 성능의 네임드 템이라면.
곧 죽어도 잡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희생이 얼마나 나오더라도.
“그러네요. 그런데 저런 게 잘 나와요?”
“흐음. 한 수백 번 잡으면 한 번 떨어뜨릴까 말까 일걸? 서버에 딱 두 자루밖에 없어.”
“확률이 좋진 않군요.”
“그랬으면 저게 싹 퍼졌게. 나도 저건 꽤 부담스러워. 내가 들고 있는 창하고도 완전 상극이니까.”
그러면서 자신의 허리춤을 툭툭 건드려보았다.
음.
재중이 형이 가진 것은 발록이 최초에 드랍한 창이다.
그렇다는 건 저 무기 역시도 그랬을 테고.
혹은 그 이후에 겨우 하나 더 나온 거던가.
“전신이 안 가지고 저 녀석이 가지고 있는 건 의외네요.”
“아, 그 녀석도 하나 가지고 있어.”
“역시 그런가요.”
저건 아무래도 두 번째 나온 아이템인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냉기를 뿜는 검을 가진 녀석을 바라보았다.
“흐음, 죽어서 드랍하면 좋겠는데…….”
“큭. 보자마자 그 생각이냐.”
“네, 아무래도 발록이나 뱀파이어 로드에게 죽으면 떨어질 확률이 높잖아요.”
내 말에 재중이 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쟤, 그렇게 쉽게 죽을 놈 아니다.”
“발록하고 뱀파이어 로드가 있는데도요?”
“일단 한번 지켜봐. 랭커인 애들의 생존력이 얼마나 지랄 같은지.”
음.
그렇단 말이지?
재중이 형이 판단하기에 저 녀석이 쉽게 죽진 않을 거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눈은 저 검에 가 있었다.
괜히 몇 개 없다니까 탐난단 말이야.
“저 무기 이름은요?”
“글래시어.”
고유 이름까지 있네.
그러고 보니 재중이 형의 저 발록 창 이름이…….
“형 꺼는 프로미넌스였죠?”
흔히들 발록의 창으로 알고 있는데 숨겨진 고유 이름은 따로 있었다.
“뭐, 그렇지. 딱 저거랑 상극이지.”
하나는 이글거리는 용암의 창.
다른 하나는 빙하를 닮은 설원의 검.
막상 그걸 듣고 나니 더욱 가지고 싶은 마음이 넘쳐났다.
“꼭 죽어줬으면 좋겠네요.”
“아아, 그건 뭐 나도 마찬가지지. 드랍되면 더 좋고.”
마침 녀석을 죽일 만한 최적의 상대가 눈앞에 있었다.
발록.
뱀파이어 로드.
그리고 혹한의 얼음 여왕까지.
흐음.
문제는 혹한의 얼음 여왕의 목숨이 간당간당하다는 점이었다.
당장 유저 몇을 죽이면 레벨이 오르긴 할 텐데…….
호락호락 바로 죽어 줄 녀석들도 아닌 모양이고.
주변을 지키던 애들하고는 기세 자체가 달라 보여.
“형, 저 잠시만 갔다 올게요.”
“응? 뭐하게?”
“아, 음…… 약간의 소소한 도움이랄까? 서포트죠, 뭐.”
그리고는 곧장 은신을 한 채로 레이드 장소 근처로 뛰어들었다.
보자.
발록은…….
저 녀석이 붙으려는 모양이고.
재중이 형이 말한 프로 녀석이 몇 명의 동료를 데리고 발록에게 붙었다.
확실히 글래시어라는 저 무기라면.
다른 유저들처럼 허무하게 튕겨 나오진 않을 터.
“여기서부터는 더 못 간다.”
그리고는 곧장 발록에게 달려들어서 글래시어를 세차게 휘둘렀다.
생각보다 꽤 공격일변도잖아?
발록이 워낙 강공이라 수비적으로 나설 줄 알았는데.
어지간히 실력에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상대가 강하면 반대로 제대로 공격을 못하도록 그걸 누르는 스타일인가.
거기다 저렇게 나서는 건 아마도 이전에 발록이 싸우는 모습을 다 관찰한 듯 했다.
아예 발록이 공격 자체를 못하도록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것을 보면.
그리고 뱀파이어 로드에게도 몇몇이 붙어서 더 이상 뱀파이어 로드가 속도를 내지 못하도록 가는 길목을 모두 차단했다.
장비도 모두 좋아.
이 녀석들은 하나같이 엘리트다.
물론 그렇게만 한다고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를 언제까지나 묶어 둘 수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콰앙!!
쾅!!
“큭, 무슨 힘이……!”
예상했듯 발록을 상대하던 데스의 눈이 바로 일그러졌다.
글래시어를 잡은 손아귀가 아픈 듯 인상을 쓰면서.
튕겨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가?
아마 저 글래시어라는 무기가 상당히 많은 대미지를 대신 받아 준 모양이었다.
보통은 발록에게 맞는 순간 저 세상인데.
이래서 무기빨이 좋은 거지.
발록의 두 주먹에는 어느덧 진하게 타오르는 화염이 일렁이고 있었다.
반대로 글래시어에는 그에 준하는 냉기가 퍼지고 있고.
재중이 형이 말한 딱 상극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네.
데스라는 녀석은 레벨도 상당히 높아서 그런지 발록에게 한 번에 밀리지도 않았고.
생각보다는 길어지겠어.
물론 발록이 제대로 힘을 내면.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발록이 최대 전력을 낼 수가 없으니 겨우 비등한 그림이 그려지는 거였다.
뱀파이어 로드는 성장하는 중이라 빠져나오는데 시간이 걸릴 듯 했고.
이 녀석들, 전력이 좋네.
재중이 형이 우습게 여기지 말라는 게 실감이 났다.
그렇게 일어나는 전투를 보면서 은신을 한 채로 레이드가 일어나고 있는 곳에 최대한 접근했다.
다행히 다들 혹한의 얼음 여왕의 움직임에 정신이 팔린지라 날 눈치챈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여기까지 누가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수도 있고.
거기다 따로 경계를 하기에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덕분에 쉽게 오기는 했네.
당연하게도 탱커 몇몇이 혹한의 얼음 여왕을 감싸는 형태로 진행이 되었다.
그중에 메인 탱커가 미친 듯이 몸을 날려 혹한의 얼음 여왕의 공격들을 받아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메인 탱커에게 모든 힐이 집중되어 겨우 버티는 모양새였고.
어떻게든 혹한의 얼음 여왕이 광역기를 쓰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딜러들도 연이어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면서 여왕의 흐름을 끊어놓았다.
딜러에게 시선이 끌리면 원거리들이 한 번씩 강력하게 공격해서 다시 시간을 벌어 주고.
디버프도 연이어서 꾸준하게 정확한 시점에 들어와 딱 0.1초라도 발목을 잡아 주었다.
그 아주 잠깐의 시간이 모두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이었고.
그러면 다시 탱커들이 교체되어 혹한의 여왕을 막아서는 모습.
“어떻게든 광역기만 쓰지 못하게 해!”
“여왕은 근접 공격이 약하니까 버틸 수 있어!”
“시선만 계속 돌리라고!”
“이 페이즈만 넘기면 된다! 좀만 더 힘내!”
아주 정갈하고도 연습이 잘 되어 있는.
실전에서 역시 실수 한 번 없는 최고로 좋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에게서 완전히 신경을 끄고 집중하고 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칭찬 받을만 했다.
그런 정신 상태 덕분인지 레이드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이 와중에 유효타를 계속 허용한 혹한의 얼음 여왕은 계속 체력이 깎여 나갔다.
보통 이때쯤 되면 트리플 템페스트를 쓸 텐데…….
그러면 지금 여기 있는 유저들은 거의 절반은 녹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잠깐을 주지 않았다.
지독하게 연습과 이미지 트레이닝. 실전을 겪어온 녀석들은 결코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혹한의 얼음 여왕도 이렇게 고전하는 것이고.
흐음.
진짜 죽겠네.
곧장 폭발이 일어나는 곳보다 약간 멀어진 곳으로 가서 인벤토리를 열었다.
흐음.
이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쓰지 뭐.
곧장 웨폰 복사를 한 테르타로스를 바로 탱커의 뒤에 집어던졌다.
완전히 목덜미를 노리고서.
쐐애액!
콰직!!
설마 아군이 잔뜩 있는 뒤쪽에서 공격이 들어올 것이라 생각 못 한 녀석은 내 공격을 허용하고는 바로 자세가 흐트러졌다.
“크윽! 뭐야!”
덕분에 아주 잠시이지만 레이드가 중단되면서 혹한의 얼음 여왕에게 쉴 틈이 생겨났다.
공격들도 끊겨 버렸고.
【 은신! 】
그리고는 바로 혹한의 얼음 여왕 옆으로 달려가서 인벤을 활짝 열어 수도 없이 많은 물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의 얼음 여왕을 보며 말했다.
“빨리 먹고 회복해. 먹기 싫으면 말고.”
공중에서 들어오던 내 말에 잠시 주저하던 혹한의 얼음 여왕이 주변의 적들을 보고는 이를 까득 씹더니 곧장 주변의 물약들을 전부 흡수했다.
큭.
그래.
그렇게 좀만 더 버티라고.
곧 여기서 풀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