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화 폭주하는 네임드들 (12)
재중이 형의 말에 따르면 혹한의 얼음 여왕이 버틸 수 있는 건 이제 단 몇 분.
정말 아슬아슬할 정도의 타이밍.
그사이에 얼음 여왕을 둘러싸고 있는 저 두터운 유저의 벽을 뚫어내야 한다.
이렇게 빠듯하게 하는 건.
얼음 여왕 때문이지.
어설프게 중간에 도와줬다가는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을 만들 수가 있었다.
누가 봐도 완벽한 위기.
딱 그 순간에 등장해야 해.
그리고 그 타이밍을 재 신호를 주자마자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가 손목을 우드득 꺾으면서 앞으로 나섰다.
“기다리기 지루했는데 잘 됐군.”
“죽이는 건 내가 한다.”
“한다?”
“……합니다.”
음.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 사이에 나름 서열이 생긴 것 같기도.
뭐 둘이 붙으면 당장 뱀파이어 로드가 찍소리도 못하고 죽을 테니.
그래도 용케 붙어 있는 것 보면.
지금의 관계가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딱히 발록도 뱀파이어 로드를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라서.
눈치껏.
뱀파이어 로드도 알아서 잘 하는 편이고.
두 부랑자들이 한참 혹한의 얼음 여왕을 레이드하고 있던 유저들에게 다가가자 곧장 몇몇의 유저들이 뛰쳐나왔다.
“이 새끼들, 아직도 있었어?”
“하, 진짜 지겹게도 달려드는구만.”
“빨리 죽이고 합류하자.”
“어, 괜히 늦장 부리면 전에처럼 된통 깨져.”
음.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에 대해서 따로 들은 게 없는 건가?
지금 반응을 봐선 워낙 많은 패황 연합의 유저들과 붙다보니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도 그냥 그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뭐 우리 입장에서는 잘 된 건가.
방심해 주면 좋은 거니까.
그리고 그런 방심은.
발록의 펀치 한 방에 바로 무너져 내렸다.
퍼억!!
정말 단순하고도 단순한 한 방.
그런데 팔을 휘두르는 속도가 너무 빨라 채 인식하지도 못하고 유저의 면상이 터져나갔다.
“크억!”
거기다 연이어지는 원투 펀치에 옆에 있던 다른 유저들도 동시에 얼굴을 감싸 쥐고 그 자리에서 뻗었다.
“컥!”
“케엑!”
한 방에 한 명.
심지어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쓰러지고는 아예 일어나지도 못 했다.
저건 그냥 급소를 맞은 것 마냥 한 방에 경직이 된 거다.
정면을 맞았음에도.
그렇게 세 명의 유저가 동시에 무너지자 저들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들 놀라는 딱 그런 분위기이려나.
여기서 이상함을 못 느끼면 그건 바보지.
“어떻게 한 방에……?”
“쟤들이 랭커는 아니라 해도 레벨이 얼만데 한 방에 나가 떨어져?”
“발록……?”
“넌 뭐냐?”
“저런 괴물 같은 녀석이 패황에 있었어?”
그런데 그런 분위기를 싹 무시하듯 뱀파이어 로드는 경직되어 쓰러져 있는 유저들에게 다가가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 뱀파이어릭 터치! 】
그러자 그 순간.
목이 잡힌 유저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면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거기다 목에서 마치 피가 솟구치듯 혈액이 끌어당겨져 뱀파이어 로드의 손바닥과 손등을 타고 모조리 빨려나왔다.
“끄어어억!”
그렇게 순식간에 피가 빨린 녀석이 바로 죽음의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한 놈 끝.”
그리고는 뱀파이어 로드가 다시 자리를 옮겨 다음 녀석들의 목을 움켜쥐었다.
당연하게도 그 녀석들 역시 피가 빨려서 죽어 버렸고.
세 명의 유저가 죽는데 걸린 시간이 고작 10초 남짓.
그것도 힘겨운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닌 그냥 주먹 한 방과 터치 한 번뿐이었다.
“대체…… 저게 뭐야?”
“죽었어?”
“말이 돼?”
좀 전의 발록의 펀치가 놀라움 정도였다면 지금은 경악 수준이었다.
같은 유저끼리 이런 식으로 죽이려면.
거의 극과 극으로 실력이나 레벨 차이가 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했다.
뭐 랭커들과 일반 유저들은 좀 다르긴 하겠지만.
그들 사이에는 분명히 넘지 못하는 선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빠르지.
그리고 이어지는 발록의 패기 넘치는 한 마디.
“시간 없다. 한꺼번에 다 덤벼라.”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진 것처럼 한 번에 압력이 걸렸다.
사방을 내리누르는 묵직함.
“크윽, 몸이 무거워.”
“뭐냐. 이 기술은…….”
“디버프 마법?”
마법은 아니지.
저건 특수한 네임드만이 쓸 수 있는 거다.
혹은 마왕이나.
이미 몇 번 겪어봐서 잘 알지.
그리고 저들의 움직임이 둔해진 사이.
뱀파이어 로드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갑자기 그들 뒤에 나타나 뒷목을 움켜쥐었다.
【 뱀파이어릭 터치! 】
“크으윽!”
또 한 번의 죽음.
흐음.
사냥을 너무 쉽게 하네.
생각해보면 발록이나 뱀파이어 로드 입장에서는 유저들이 반대로 몬스터나 다름없었다.
죽이면 경험치를 주는.
그러니까.
저들에게 있어 지금 이곳은.
자동으로 몹몰이가 되어 있는.
경험치 밭이다.
오늘 뱀파이어 로드 레벨 많이 올리겠네.
그리고 의식하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발록이 일부러 큰 기술은 쓰지 않는 듯 했다.
재중이 형도 그걸 아는지 말을 꺼냈고.
“플레어 버스터 같은 거 쓰면 싹 녹을 건데 말이야. 뱀파이어 로드를 신경 써 주는 건가.”
“어차피 자기는 잡아도 경험치가 없잖아요. 쩔이죠, 뭐.”
“아. 부럽다. 나도 저런 버스 좀 타고 싶은데.”
마냥 부러운 듯 버스 사냥을 보고 있는 재중이 형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전장을 보자 이번에는 꽤 많은 유저들이 달려 나와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에게 공격을 가했다.
음.
저게 위험하냐고 물어 본다면…….
콰앙!
콰아앙!
발록이 어느새 그들 사이로 달려 나가더니 아예 손바닥으로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잡아채고 땅 바닥에 그대로 메다 꽂아버렸다.
“커억!”
“크윽!”
“케엑!”
또다시 손짓 한 번에 한 명씩 바닥에 얼굴이 통째로 갈려나가며 본의 아니겠지만 친절하게 바닥과 인사를 하고 있었다.
“젠장, 뭐가 이렇게 빨라……!”
“집중해! 한순간이라도 놓치면 안 돼!”
잔상이 남을 정도로 달리는 발록의 모습은 이전에도 본적 있었다.
제일 처음에 녀석의 용암 지역에서 붙었을 때.
그때의 다소 낮은 레벨과 민첩 스탯으로 힘겹게 반응해서 레벨이 높은 이 녀석들은 좀 반응하려나 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걸리는 족족 땅바닥에 박히면서 차례대로 눕어 가는 녀석들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감탄을 내었다.
저 높은 민첩 수준에서 저런 세세한 컨트롤이라.
네임드가 아니면 꿈도 꾸지 못할 능력이지.
그리고 그 뒤를 따라붙는 더 빠른 녀석이 하나 있지.
뱀파이어 로드가 나무 심듯 박혀 있는 녀석들을 죄다 쓸어가면서 딱딱 손발을 맞추었다.
“휘유, 둘이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하겠는데?”
“나설 생각이었어요?”
“아니, 전혀. 어차피 우리가 나서 봐야 얻을 것도 없잖아.”
맞다.
심지어 유저를 죽이는 것도 뱀파이어 로드가 죽이는 게 훨씬 좋았다.
지금도 드랍템들이 바닥에 쌓여가는데.
“우린 저거나 쓸러 가죠.”
“크큭,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리고 은신한 채로 둘 다 편안하게 쓸려진 전투 지역을 따라갔다.
워낙 빨리 죽어 나가는 탓에 녀석들도 아이템을 회수도 못 해보고 죽기 일쑤였다.
뒤늦게 눈치채더라도.
이미 아이템은 사라진 후겠지만.
<심연> 오, 아이템 밭이다.
여전히 즐거운 듯 아이템을 넙죽넙죽 주워드는 재중이 형과 마찬가지고 나 역시 흥얼거리며 아이템을 주워 올렸다.
인벤은 넉넉하게 비웠으니.
다시 한 번 꽉 채워 볼까나.
이전에 얻은 아이템들은 사장님의 손을 통해 하나씩 정리가 될 것이다.
안 그래도 저들끼리 전쟁 중이라.
쓸 만한 고가의 아이템들이 이미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어서.
거기다 아이템에 유저 이름이 달린 것도 아니니.
장사를 시작하면 불티나게 팔릴 건 뻔했다.
이 자금들은 다시 길드를 일으켜 세우는데 필요한 자금도 되어 줄 것이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알아서 손에 보석들을 올려주는 격이려나?
그리고 피해가 심해지자 결국 패황 연합을 경계하던 사방의 유저들이 모두 우리에게 몰려들었다.
그런데 그때.
그들 중 누군가는 발록을 알아본 듯 깜짝 놀라 외쳤다.
“발록!! 저 새끼 랭커야! 뱀파이어 로드 레이드를 망친 놈이라고!”
“뭐? 그게 저놈이었어?”
“그래, 내가 그쪽에 있다가 이리로 파견돼서 잘 알아. 어찌나 강력하던지 싹 녹았…….”
그러다가 발록을 알아본 녀석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런데…… 저놈. 마법사 아니었나?”
“마법사?”
“어, 우리하고 붙었을 때 광역 마법으로 다 죽었거든. 미친 위력이었는데.”
“야! 네 눈엔 저게 마법사로 보이냐?”
“……아니.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지금 발록은 혈혈단신으로 수많은 유저들의 적진 사이를 펀치 하나로 밀고 나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저게 마법사는 아니지.
아주 고렙 유저가 무기 빼고 주먹으로 장난치러 온 것 같은 느낌이려나.
그렇게 놀랄 사이도 없이 몰려 있던 유저들의 머리 위로 강렬한 피의 비가 떨어져 내렸다.
【 블러디 레인! 】
그리고 그 피의 비가 닫자마자 유저들의 피부가 시뻘겋게 변하더니 이내 폭탄이라도 터진 듯 안에서부터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크아악!”
“으악!”
“젠장! 피해! 다 죽는다!”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악몽 같은 피의 비바람.
그게 유저들의 신체를 완전히 좀 먹어갔다.
심지어 그렇게 터진 피들이 뱀파이어 로드의 신체로 동시에 날아들어 흡수되었다.
햐.
저것도 너무 좋은데?
블러디 돔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스킬이다.
만약 저 둘을 동시에 쓴다고 하면?
바닥까지 내려갔던 체력도 순식간에 차오르겠네.
그러니 이제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대체 저 뱀파이어 로드를 전에 무슨 수로 잡은 거야?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뱀파이어 로드의 레벨이 다시 올라갔다.
죽어나가는 녀석들의 레벨이 높으니 레벨업도 더 가속이 붙는 듯 했고.
녀석들은 당장 피의 비를 피한다고 신경도 못 쓰는 것 같지만.
발록의 전진을 피하랴.
광역기도 피하랴.
정신없는 와중에 저것까지 유심히 보고 있는 녀석도 없었다.
로브에 가려져서 잘 안 보이는 면도 있었고.
세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이 녀석들이 네임드라는 걸 눈치 채겠지만.
아직은 좀 이르다.
숨길 수 있는 한 최대한 숨길 필요가 있어.
그렇게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가 쭉 밀고 나가자 결국 레이드를 하는 본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쓸려나간 유저만 벌써 백 단위가 넘어갔다.
“……그걸 뚫고 왔다고?”
“단둘이서?”
문제는 이미 혹한의 얼음 여왕의 레이드가 너무 진행이 되어 있다는 거였다.
여기서 더 이상 발을 빼기도 어렵지.
결국 초월 연합의 길드들은 앞으로는 혹한의 얼음 여왕.
뒤로는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에게 포위가 된 셈이었다.
하나도 버거운 네임드가.
무려 셋.
엄청나다는 말도 부족한 전력이었다.
자…….
과연 저 무시무시한 세 네임드 사이에서 얼마나 살아남을지.
정말 기대 되는데?
한번 끝까지 발악해 봐.
중간에 입고 있는 것들 전부 떨어뜨려주고 가면 더 고맙고.
그리고 제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고 싸워 주길 바란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