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7화 폭주하는 네임드들 (9)
예전에 전사 형이 우스갯소리로 지나가듯 말을 흘린 적이 있었다.
네임드를 부린다고.
뭐 그때는 그냥 우스갯소리로 지나치긴 했지만.
막상 눈앞에 이 녀석을 두고 있으니 그때의 그 말이 계속 떠오르는 건 왜일까.
“일?”
내 제안에 뱀파이어 로드가 약간은 얼빠진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유저가 네임드를 앞에 두고 제안을 한다?
원래 정해져 있는 시나리오가 아닌 이상은 사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
네임드도 그렇고.
유저도 그렇고.
“어, 그리고 듣고 나면 너도 마냥 나쁘기만 한 건 아닐 거다.”
곧장 감각을 퍼트려서 주변에 누군가가 있는지 확인부터 했다.
지금의 이 관계는 들키면 꽤 곤란하지.
네임드가 가만히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란.
누가 봐도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거기다 녹화라는 시스템이 아주 잘 되어 있는 세상에.
무수히 많은 파파라치 같은 존재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여긴 좀 전까지 레이드를 펼쳤던 지역이라.
작은 실수 하나까지도 남아 있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한 번 주변을 전부 살피고는 재차 확인을 위해 재중이 형을 보았다.
“어때요? 주변에 아무도 없겠죠?”
확인차 물어보는 말에 재중이 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해도 돼.”
재중이 형도 지금의 상황을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았다.
발록이야 본인이 스스로 우리와 엮인 면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뱀파이어 로드는 상황이 달랐다.
거의 반 강제로 우리가 묶어놓았다고 해야 하나?
그것도 발록의 영향력으로.
자신보다 강한 발록이 옆에 머무르니 뱀파이어 로드도 신중하게 나왔다.
“흠, 들어나 보지.”
그러면서 한 번씩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게 언제라도 틈이 있으면 빠져나갈 생각인 듯 했다.
뭐 그래도 발록이 곧 잡아올 테지만.
일단은 우리의 말을 들어보겠다는 제스처를 해오자 나 역시 환하게 녀석을 반겨주었다.
그래.
이러는 편이 너도 좋고 우리도 좋지.
괜히 쓸데없이 서로 힘 안 빼고 얼마나 좋냐.
“너도 태어나서 계속 죽는 건 싫겠지?”
이건 일종의 금기다.
네임드는 리젠되어 유저들에게 사냥되어진다.
보통은.
그런데 네임드가 그 위기를 이겨 내고 반대로 유저들을 죽이기 시작하면 전세가 역전되지.
오히려 레벨이 올라 유저들이 건드릴 수가 없는 상태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역시 시간이 지나면 유저들이 강해져서 결국은 네임드가 잡힌다.
돌고 도는 순환의 끝은 결국 네임드의 죽음.
그리고 이 녀석은.
이미 여러 번 죽었다.
유저들에게.
“……모르겠다.”
하지만 이 녀석은 전에 리젠된 녀석에 대한 데이터는 없을 것이다.
죽고 나면 기록이 싹 지워지니까.
가끔 뭔가의 퀘스트 때문에 기억이 남아있는 녀석들도 있긴 한데.
운영자가 의도하지 않고서야 전의 기록이 남는 건 불가능했다.
“왜 저 녀석들이 여기로 널 공격하러 왔겠어? 그것도 매번 같은 방법으로?”
내 질문에 녀석이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없는 기억을 억지로 짜내라고 하는 것부터가 모순.
그런데 난 하나쯤 녀석이 의심을 할 만한 것을 잘 알고 있지.
“그 녀석들 묘하게 네 공격을 잘 피하지 않았나?”
“……그렇긴 했다.”
“무슨 공격을 해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다 피했지?”
그제야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낀 뱀파이어 로드가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아니라고 할 순 없군. 내 최종 기술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산개해서 피했으니.”
NPC들에게 유저가 평소에 밖에서 쓰는 단어들은 먹히질 않는다.
하지만 이런 종류는 달랐다.
교묘하게 틈을 파고들었다고 해야 하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특별한 단어의 인식이 아니라.
그냥 상황 그 자체를 인식시키는 거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면.
딱히 오류가 날 일도 없지.
“그러니까. 녀석들은 이미 이전에 와서 널 많이 죽였다고. 아니면 어떻게 네 공격 패턴을 다 알겠어?”
“……흠.”
“널 죽이고 네가 가진 것들을 뺏으려고 매번 와서 죽이기만 하는 녀석들이라니까?”
정말 아주 많이 고민하는 듯한 표정의 뱀파이어 로드를 보면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고민을 많이 할수록 좋다.
가급적이면 안 좋은 쪽으로 해주면 더 좋고.
“흠, 이해했다.”
뱀파이어 로드의 그 말에 재중이 형과 마주보고 바로 웃음을 지었다.
<윈> 된 것 같죠?
<심연> 어, 반쯤은? 아니지. 거의 다 된 듯한데?
그리고 뱀파이어 로드를 보면서도 미소를 보였다.
“우린 딱히 널 어쩌기 위해 온 건 아니다.”
“그런가?”
그러면서도 흘깃 발록을 바라보는 뱀파이어 로드의 모습.
역시 계속 신경 쓰나 본데.
다음 말을 들으면 조금 경계가 더 풀리려나?
“오히려 널 도와주러 온 쪽이지.”
당연하게도.
이 도와준다는 말에는 굉장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와준다고?”
“어, 사실 네가 더 죽는 게 안타까워서는 아니야. 어차피 너와 우리 사이에 그 정도 친목을 다질 사이는 아니지.”
여기까지는 뱀파이어 로드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럼 왜?”
“네가 그만 죽었으면 좋겠거든.”
역시 벙찐 얼굴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보였다.
“아, 간단히 말할게. 네가 죽으면…….”
“죽으면?”
“우리 적들이 강해져. 짜증날 정도로.”
“흠. 그런 건가.”
어.
그런 거다.
난 진짜 숨김없이 말해 준 거야.
그리고 이런 내 말뜻은 녀석에게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 듯 했다.
“그래서 내가 죽지 않게 네가 돕겠다는 거군.”
《 흐르는 밤의 왕, 네임드 뱀파이어 로드와의 호감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
오.
반응이 오네.
지금껏 한 번도 울리지 않았던 호감도 시스템이 이제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녀석을 구워삶아 볼까?
“어,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제부터 내가 널 키워 줄 거야.”
발록은 이미 자기 혼자서 너무 커 버려서 안 되지만.
너 정도는 내가 한 번 키워볼 만하지.
“키워 준다? 어떻게?”
“음, 이를 테면…… 사냥감을 몰아준다던지? 혹은 사냥감이 많은 곳으로 널 데려갈 수도 있고? 괜찮은 아이템을 쥐어줄 수도 있겠지.”
그때 옆에서 재중이 형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심연> 아주 작정을 했구나?
<윈> 네, 괜찮지 않아요?
<심연> 확실히 나쁘진 않지.
전통적으로 빠르게 세력을 불리려면.
키울 유저에게 아이템도 지원을 하고.
사냥터도 제공하고.
여러 가지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시간도 제법 걸리는 편이지.
하지만 네임드는 다르다.
그냥 놔두면 알아서 잘 크잖아.
그것도 폭발적으로.
유저가 1레벨 올라가는 것과.
네임드가 1레벨이 올라가는 건.
체감상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유저 백 명을 지원해서 키우느니.
네임드 하나를 키우고 말지.
그리고 그 지원 목록 1호에.
뱀파이어 로드가 딱 선정되었다.
영광인 줄 알라고.
“일단. 이거부터 받고.”
그리고 녀석에게 발록에게 했던 것처럼 로브를 던져 주었다.
“모습을 줄일 수 있을까?”
내 말에 뱀파이어 로드가 발록을 흘깃 바라보았다.
“저렇게 말인가?”
“어, 가능하다면. 아니어도 크게 상관은 없다만.”
작으면 눈에 안 띄니 좋긴 하겠지만.
크면 큰 대로 그것도 나쁘진 않다.
그러자 뱀파이어 로드의 몸 전체가 환하게 변하더니 이내 발록이 그랬던 것처럼 체격을 줄여 갔다.
그 모습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뱀파이어 로드를 바라보았다.
역시 이건 발록만 가능한 게 아니었네.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말이야.
“그리고 넌 이름도 좀 바꿀 필요가 있겠어.”
발록이야 그냥 써도 되지만.
뱀파이어 로드는 다르다.
유저들 이름은 띄어쓰기가 안 되니까.
저 상태로 나갔다가는 누가 봐도 그냥 뱀파이어 로드다.
네임 변경은 아이템으로 해결하고.
“음, 줄여서 뱀이 좋겠어.”
“뱀?”
“싫어?”
“딱히.”
그다지 이름에는 관심이 없는지 그대로 뱀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고 로브를 뒤집어쓰자 완전히 발록 2탄이 만들어졌다.
옆에서는 여전히 재중이 형이 피식거리며 웃고 있었다.
딱 한 마디를 남기고.
“하, 미친. 퀼리티 보소.”
부랑자 두 명을 세워둔 딱 그런 모양새인데.
그 속은 네임드가 두 마리다.
“자, 그럼 일단 이 구역부터 한번 쓸어 보죠.”
* * * * *
현재 뱀파이어 로드의 영역 안은 한참 두 세력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도망가는 패황 연합의 유저들과 그걸 쫓는 초월 연합의 유저들의 추격.
이미 뱀파이어 로드 레이드가 파토 나서 그만 쫓아도 될 터인데 녀석들은 화풀이라도 하는 듯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꿩 대신 닭이라도 잡으려는 걸까.
그리고 그런 추격적은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저쪽. 다섯이 쫓기고 있고 셋이 따라가는 중이다.”
훌륭하다고 해도 모자란 우리 레이더들.
발록과 뱀파이어 로드가 영역 안에 들어오는 유저들을 파악하고 알려 주자 곧장 그쪽으로 이동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확하게 유저 여덟의 추격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발록은 양념만 쳐 주고. 마무리는 뱀이 해.”
“귀찮은데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이 녀석이 커야 너도 좀 수월해지지 않겠어?”
시선 분산 효과.
혹은 같은 아군의 전력 상승.
어느 쪽으로 생각해 봐도 발록이 도와주는 게 좋았다.
그걸 아는지 발록도 투덜거리면서 일을 도왔고.
발록이 손가락을 튕기자 일정 범위가 전부 화염의 벽이 올라오면서 앞을 틀어막아 버렸다.
화르르륵!!
“휘유. 범위만 거의 파이어월의 열 배는 되겠네.”
워낙 예전 스킬이라 비할 건 아니지만.
아마 위력은 그보다도 몇 십 배는 강할지도.
범위가 저렇게 넓다는 건.
유저는 어지간해서는 못 지나간다는 거지.
그리고 그런 불의 벽에 막힌 유저들이 전부 안에 갇히고 말았다.
적이고 아군이고 할 것 없이.
거기다 발록이 다시 한 번 힘을 쓰자 화염 기둥들이 수도 없이 올라와 불의 벽 안에서 몰아치기 시작했다.
저건 흡사 화염 지옥이랄까.
“으아악!”
“이게 뭐야?!”
“젠장, 네임드 스킬이잖아!”
“랭커다!”
타오르고 타오르는 화염 지옥 속에서 유저들이 힘을 잃고 쓰러지자 뱀파이어 로드에게 신호했다.
“가서 싹 쓸어 와.”
“알았다.”
불의 벽 속으로 유유히 들어간 뱀파이어 로드는 유저들의 목을 전부 따 버렸다.
“크악!”
“젠장. 이 녀석들!”
“죽여 버릴 거야!”
그렇게 모두의 목숨을 거둬들인 뱀파이어 로드가 다시 한 번 환하게 빛을 내면서 레벨을 올렸다.
그 상태로 바깥으로 나온 뱀파이어 로드가 흡족한 듯 웃음을 지었다.
레벨이 오르는데 좋아하지 않을 몬스터가 어디 있을까.
그것도 오버된 네임드가 차려 주는 최고의 밥상.
이것이야 말로 최고의 몹 몰이 아니던가.
아마 이 이상의 몹 몰이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자, 그럼. 남은 것들을 싹쓸이 하러 가볼까?”
아직 우리에게는.
수도 없이 많은 유저들이 남아 있었다.
뱀파이어 로드의 양분이 되어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