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6화 폭주하는 네임드들 (8)
사방으로 비산하는 피의 향연.
그리고 그런 핏물의 장벽이 마치 돔 안에 가두듯이 도망가는 유저들을 모두 묶어 버렸다.
동시에 그들 전부에게서 빨려나오듯 핏물이 솟구쳐 나왔고.
그 핏물은 일제히 뱀파이어 로드의 신체로 날아들어와 한꺼번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범위 안에 들어있는 모든 유저들의 체력을 한 번에 흡수해서 뺏어오는 광역기.
저건 뱀파이어 로드라 불리는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딱 그런 스킬이었다.
“젠장! 체력이 너무 빨리 떨어져!!”
“힐 빨리!!”
“미친, 힐러들 다 누웠는데 무슨 힐이야!”
“망했…….”
“블러디 돔을 쓰게 두면 안 되는데……!”
다행히 녀석들보다 먼저 빠져나왔기에 망정이지.
가만히 버티고 있었다가는 저 범위 안에 포함되어 같이 피를 쭉 빨릴 뻔했잖아?
십년감수했다는 듯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고통스럽게 피를 빨리며 블러디 돔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보통 저 정도의 광역기를 쓰려면 쓰기 직전에 네임드가 뭔가의 징조를 보인다.
스킬 모션을 잡는다던가.
뭔가 멘트를 한다던가.
혹은 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나오기도 하고.
항상 유저가 광역기의 시전을 미리 알아채게끔 하는 무언가가 있단 말이지.
그래야 피하기도 하고 파훼하기도 하면서 레이드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몇 번이나 뱀파이어 로드를 잡았다면.
녀석들이 그 타이밍은 제일 잘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불구하고 녀석들은 전혀 파훼를 하지 못했다.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라면 어떻게든 스킬을 캔슬하던지 다른 방법을 내놓았을 텐데.
운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모두 한꺼번에 뱀파이어 로드를 등지면서 사실상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든 셈이었다.
누군가 혼자 남아서 잠시 시간이라도 벌어 주었으면 저렇게까진 되지 않았을지도.
하지만 굳이 서로를 위해 자신이 희생을 하는 그런 아름다운 그림은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아마 저건 서로 다른 길드에서 인력을 차출해서 그럴 수도 있을 테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그런 와중에 체력이 흡수되는 유저들의 가슴에 이상한 표식 같은 것이 보였다.
꼭 붉은빛의 장식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그리고 어느새 재중이 형과 발록이 내 옆에 와서 섰다.
“벌써 정리 끝났어요?”
“어, 여긴 능력이 출중한 녀석이 있잖냐.”
“하긴. 발록한테 저런 식으로 덤벼드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죠.”
적어도 발록을 상대하려면 탱딜힐 다 맞춰서 레이드하는 각오를 하고 덤벼야 한다.
그래도 잡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지만.
하지만 발록의 정체를 모르는 녀석들은 그저 좀 강한 랭커 마법사라고 생각해서 너무 안일하게 덤벼들었다.
상대를 모르고 덤볐으니 뭐.
그리고 슬쩍 재중이 형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형, 혹시 저 표식 뭔지 알아요?”
“흠, 저건 뱀파이어의 표식이네. 한 번 찍히면 스킬 대미지가 꽤 증폭되어서 들어갈걸? 가급적이면 탱커에게만 찍히도록 어글을 잘 조절해야 하는데 말이야.”
재중이 형 말대로라면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탱커에게만 표식을 받게끔 한다는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저들 모두가 표식이 찍혀 있었다.
광역으로 뭔가를 당한 게…….
“아! 아까의 그 하울링.”
“어, 아까 단체로 당해서 전부 찍혔을걸. 그럼 저 블러디 돔의 스킬로 대미지가 몇 배로 들어갔겠지.”
“지금 같은 경우는…… 체력이 많이 뺏긴 거겠군요.”
“아마? 흡혈 스킬 특성상 체력을 몇 배로 뺏어간다고 봐야겠네. 아무리 랭커라고 해도. 저런 식으로 당하면 물약이 못 따라가. 힐러도 없는 판에.”
만약 힐러가 있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깎이는 체력을 광역 회복기로 계속 채워졌다고 하면.
한 타임 정도는 버틸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럼 다시 탱커가 어글을 잡고 그사이에 회복을 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반대로 힐러가 없으면.
그건 재앙이지.
특히나 뱀파이어 로드의 특성이 문제였다.
체력 흡수.
단순히 체력을 깎는 수준이 아닌.
강탈 스킬이니.
어느새 블러디 돔 안에 갇힌 유저들이 모두 체력을 빼앗기면서 하나둘 죽음의 빛으로 변해 아이템을 드랍하고 그대로 사라져 갔다.
으음.
그런데 생각해 보다 숫자가 적네.
몇 명 더 있었던 걸로 봤는데.
“형, 몇 명이 비어요.”
“아, 눈치 빠른 녀석들이지. 그놈들은 아까부터 내뺐어.”
“형이 말한 그 프로 팀요?”
“어, 걔들은 이미 틀렸다는 걸 직감한 거지. 경험상. 힐러가 단체로 죽는 순간부터 벌써 몸을 빼더라고.”
“전 못 봤는데.”
힐러들을 죽이고 다닌다고 너무 신경을 썼나?
어떻게 도망가는 걸 몰랐지?
“몸 빼내는 기술 하나는 제일 먼저 배우는 거니. 뭐, 딱히 귀찮게 할 건 같진 않고.”
그러면서 재중이 형이 한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긴…….
곧장 감각으로 파악을 하자 누군가 커다란 나무 그늘의 어둠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뭔가 공격을 하려고 했으면 벌써 덤벼들었을 텐데.
딱히 우리에게 덤벼오려는 것 같진 않고…….
그런 녀석을 향해 재중이 형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죽고 싶으면 계속 거기 있고. 말리진 않겠어.”
재중이 형의 말을 듣자마자 녀석의 기척이 멀리 사라져 버렸다.
“사라졌나?”
“네, 그런 것 같아요. 계속 멀어지네요.”
아마 전투 지역에 묶여서 귀환은 안 될 테고.
딱히 순간이동 반지 같은 것이 없다면.
이 지역에서 도망을 못 가니까.
일단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을 택한 것 같았다.
“상황을 보고 있다가 뭔가 해볼 생각이었을려나.”
“형한테 바로 들키고는 좀 당황한 듯했죠. 추격할까요?”
그리고 고개를 돌려 멀리 있는 몇 곳을 내가 빤히 바라보자 그쪽에서도 기척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역시 한두 놈이 아니었네.
지금 블러디 돔에 죽은 녀석들은 저들 중에서도 2류.
하지만 방금 몸을 뺀 녀석들은 집중해서 느끼지 않으면 숨어 있는 것을 잡아채지 못할 정도로 실력이 좋아 보였다.
“거리는?”
“점점 멀어져요. 곧 포착하기 힘들 거예요.”
“귀환하려는 모양이네.”
일정 거리만 벗어나면 어떻게든 귀환할 수 있으니.
만약 뱀파이어 로드가 녀석들을 따라갔다면 귀환도 힘들었겠지만.
그사이 상대하던 유저들을 전부 학살한 뱀파이어 로드.
레벨도 증가한 듯 살이 토실토실 오른 것 같았다.
표현이 좀 그런가.
아무튼 활기가 넘쳐 보이는데.
그리고 그 넘치는 활기로 남아있는 나와 재중이 형, 발록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도 먹이로 보이는 거려나.
그런데 그때.
뱀파이어 로드가 발록을 바라보더니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호오, 발록을 알아보는 건가?”
“같은 네임드니까 알지 않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발록이 한 발 앞으로 나서자 뱀파이어 로드가 똑같이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우연인가?
하지만 우연은 아닌 듯 했다.
발록이 두 걸음 더 나가니 이번에도 뱀파이어 로드가 두 걸음 더 뒤로 뺐으니.
“본능적으로 아나 보네요.”
사실 두 네임드가 서로 마주칠 일 자체가 없었다.
둘이 포함된 사냥터들이 워낙에 떨어져 있기도 하고.
한쪽에서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어지간해서는 한 자리에 있기 힘든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어지간해서 힘든 상황이 이루어졌다.
보통 이런 경우는…….
싸웠었지?
예전에 네임드와 네임드를 서로 싸움 붙여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아주 신나서 싸우던데.
그런데 지금은 좀 달랐다.
뱀파이어 로드가 겁을 먹은 것처럼 자꾸 뒤로 몸을 뺐으니.
상식적으로 보면 저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둘의 레벨 차이를 보면 발록이 압도하는 상황이니까.
당장 붙으면 절대 발록이 지는 상황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슬쩍 발록에게 물어보았다.
“쟤 잡을 수 있어?”
“죽이라는 뜻인가?”
“음, 죽이면 아깝고.”
사실 뭐.
죽여도 상관은 없긴 했다.
어차피 네임드야 다시 리젠되니까.
그런데 계속 여기서 죽치면서 다른 녀석이 또 나오길 기다려야 한단 말이지.
그건 그것 나름대로 시간 낭비인 것 같고.
여기만 돌고 끝낼 것 같으면 아무 상관없겠지만.
“어차피 죽이진 못한다.”
“그래?”
왜 약한 소리를 하실까?
마왕과도 싸울 수 있는 저력을 가진 녀석이...
그러다 머리에 스치는 생각.
“전력을 쓸 수 없네.”
내 말에 발록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마왕들을 불러모을 게 아니라면.”
정말 곳곳에서 마왕이 귀찮게 하네.
언제 한번 날 잡고 싹 쓸어버리던가 해야지.
그런 상황이 이어지자 기묘한 대치 상태가 되어버렸다.
뱀파이어 로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멈춰서 있는.
저 녀석도 덤비고는 싶을 텐데.
덤볐다가는 바로 세상 하직할 것 같고.
그렇다고 도망가자니 여긴 자기 구역일 테니 도망가기도 애매하고.
흐음.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요즘 뭔가 계속 어긋나는 기분이 든단 말이야.
그렇다고 이 상황이 나쁘다는 것은 또 아니다.
환경이 변했다면.
그에 맞는 대처를 하면 되는 일이지.
“형, 혹시 저 녀석도 말이 좀 통할까요?”
보통 네임드와 유저가 한 자리에서 오순도순 대화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했다.
아니.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
네임드 자체가 유저를 보면 일단 죽이고 볼 테니까.
유저들도 마찬가지.
네임드는 그냥 아이템을 뱉어내는 몬스터의 정점 정도로 인식을 했다.
애초에 대화를 해보려는 시도를 하는 녀석도 없을 테고.
그런 면에서 지금의 상황은 많이 이상한 거다.
둘 다 인간형이라 그런가.
괜히 될 것 같기도 하고.
“저래 가만히 있는데 한번 해보던가? 밑져야 본전인데. 그리고 발록도 말은 통했잖아.”
그 말에 슬쩍 한 걸음 내딛으면서 뱀파이어 로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이, 거기. 내 말 알아듣나?”
“…….”
대답을 안 하네?
저러면 원래 말을 못하는 건지.
아니면 듣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데.
“대답을 안 하는데요?”
“흐음, 원래 못 하는 거려나?”
“하아, 할 수 없죠. 이렇게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리고는 곧장 뱀파이어 로드를 보면서 웃으며 선언했다.
“대답 안 하면 그냥 한판 뜨자는 걸로 알겠다.”
그 말에 뱀파이어 로드가 흠칫 하더니 마치 똥 씹은 표정으로 나와 발록을 바라보았다.
특히 발록 쪽을 더 오래 봤고.
“저거 다 알아듣는데요?”
“정말 그렇네.”
못 알아들었으면 저렇게 반응할 리가 없지.
곧 떨떠름한 표정으로 뱀파이어 로드가 입을 열었다.
그것도 꽤 가는 미성의 목소리로.
“정령의 검 주인이 여긴 무슨 일인가. 그것도 저런 녀석을 데리고.”
르아 카르테를 숨기고 있는데도 알아봐?
하긴 생각해 보면 발록 역시도 비슷한 반응이었으니.
이 녀석도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같은 네임드급이면 거의 다 알아본다고 봐야 하려나.
“아, 이쪽은 뜻을 같이 하는 동지랄까.”
“동지?”
“전략적인 동맹? 아무튼, 잘 알아들으니 하는 말인데…….”
의외로 내가 순한 멘트만 하니 뱀파이어 로드가 경계와 함께 의심스러워하면서도 일단 관심은 보이는 듯했다.
좋아.
이 정도면 됐지 뭐.
말만 알아들으면.
이성적으로 판단도 가능하다는 거고.
그런 녀석을 향해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한 가지를 제안했다.
“너, 나랑 같이 일 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