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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899화 (889/1,404)

#898화 대천사의 무덤 (16)

이 거래는 처음부터 고려한 일은 아니었다.

대천사의 무덤이라는 장소가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전혀 알 수 없었기도 하고.

실상 안에 들어와 보니 예상과는 다르게 정말 괴물 같은 녀석이 존재하기는 했다.

대천사 루스.

뭐 이 녀석이 대천사가 맞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이 무덤에서 소환되어지는 몬스터들의 능력만 봐도 대략적으로 이 녀석의 강력함을 엿볼 수 있었다.

대천사 루스와 정면으로 승부?

솔직히 이건 아직 무리였다.

당장 네임드인 발록을 붙여놔도 될까 말까인데 정상적으로는 잡기 힘들겠지.

그래서 생각한 건.

굳이 대천사 루스를 잡을 필요가 있나?

재중이 형과 이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역시 같은 판단을 내렸다.

우리의 목적에 집중하라고.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결국 돌고 돌아 하나의 결론으로 돌아왔다.

녀석이 원하는 것은 명확하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 역시 명확했고.

그럼 싸울 필요 없이 그걸 서로 맞바꾸는 것만으로 진행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뭐 그 뒤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한다고 해도.

어차피 이대로 물러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로 빈손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역시 모험을 걸 수밖에.

대천사 루스가 정령의 검으로 알고 있는 르아 카르테를 들어 올리자마자 녀석이 흡족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이 녀석, 표정 관리 안 되네.

어떻게 보면 그만큼 이 정령의 검을 원한다는 반증일 수도 있고.

그래서 더욱 이 거래가 성사될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네가 원하는 건 이거였지? 내가 아니라.”

“음.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다.”

그래.

정령의 후손이고 뭐고.

애초에 이 녀석은 그쪽으로는 관심도 없었다.

오직 하나.

르아 카르테.

대체 이걸 왜 이렇게까지 원하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녀석의 행동과 대화를 보면 이것 하나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난 이걸 넘겨주고. 넌 그걸 내게 주고. 어때? 깔끔하지?”

반대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저 대천사의 무구.

그것도 검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아이템이었다.

힘들게 여기까지 온 이유이기도 하고.

“좋군.”

녀석이 의심을 할 법도 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르아 카르테는 원래 하나뿐인 물건이니까.

그렇게 대천사 루스가 우리에게 손을 뻗어서 르아 카르테를 잡으려는 순간.

손을 잡아당겨 르아 카르테를 다시 회수했다.

“뭐냐?”

“아, 주는 건 맞는데. 우린 그쪽보다 약하다고.”

“흠.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이 녀석도 영 감이 없네.

대충 말하면 좀 알아들어라.

르아 카르테와 대천사의 검을 거래하는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만약 녀석이 다른 생각을 품는다면?

그때는 우리가 녀석을 제어할 방법이 없어진다.

일단 이 대천사의 무덤이란 장소 자체가 녀석에게 너무 유리한 장소니까.

교환 후에 녀석이 대천사의 무기의 회수를 위해 우리를 죽이고자 한다면 그땐 답이 없지.

“네가 다른 마음을 품으면 우리가 곤란하다고.”

“지금 감히 대천사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버럭하는 녀석의 반응에 속으로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니.

대천사라는 존재는 믿어.

그런데 넌 아무리 봐도 우리가 생각할 법한 정상적인 대천사는 아닌 것 같거든.

뭔가 일그러진 대천사랄까.

아니지.

숨기는 것이 많고 욕망 가득한 대천사가 오히려 맞는 표현일 지도.

그래서 더욱 믿을 수 없었다.

특히 이 공간에서는 더욱더.

“거래는 동등해야지. 막말로 난 그냥 이 대천사의 무덤을 나가 버리면 그만이야.”

이건 틀린 말이 아니다.

난 금속의 정령의 도움을 받아 이 무덤을 나갈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뭐 그 과정이 쉽진 않겠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지.

대천사 루스도 이걸 잘 아는지 순간 표정이 확 굳어졌다.

부하들을 소환시켜 억지로 묶어 둘 정도인데.

녀석이 이걸 모를 리가 없어.

“……원하는 게 뭐냐?”

좋아.

녀석도 더 이상 날로 먹을 생각을 버리고 제대로 된 자세로 협상에 임했다.

“일단은 우리 쪽의 안전이지.”

뭐 재중이 형이야 어떻게 한 번 죽고 부활하면 끝난다고 쳐도.

발록은 또 그게 아니라서.

아직은 써먹을 곳이 많은 녀석이다.

이곳에서 허무하게 잃어버리긴 좀 아깝지.

정 안된다면 발록을 버리면 되기는 하겠지만.

이 이후의 일을 생각해보면.

가급적 안고 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죽으면 안 되니까.

녀석이 미친 척하고 죽이려고 들면 그것도 곤란하다.

최소한.

이곳에서는 안 돼.

“거래는 바깥에서 하지.”

“뭐?”

“솔직히 여기는 네게 너무 유리하잖아. 그래서야 공평한 거래가 될 수가 있나.”

“귀찮게 구는군.”

아니다.

귀찮은 게.

불가능한 거다.

내가 알기로 녀석은 이곳 하얀 결계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만약 그게 가능했더라면.

애초에 녀석이 직접 나서서 우리를 따라왔을 터.

하지만 결국 녀석은 부하들을 시켜서 우리를 공격하게 했지.

“우리도 확실하게 하고 싶거든. 그래서 말인데. 네 부하들 중 하나와 거래를 하고 싶다. 바깥에서.”

내가 새로운 제안을 하자 녀석이 순간 고민에 빠졌다.

우리를 내보내는 것이 그렇게 좋은 선택은 아닌 모양이라.

그렇지만 녀석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없었다.

이게 아니면 거래를 안 하면 끝이니까.

곧 생각을 마친 듯 녀석이 내게 말했다.

“좋다. 허락하지.”

빙고.

재중이 형을 보자 재중이 형 역시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심연> 잘 넘어갔네.

<윈> 네, 여기까지는요.

사실 이 부분이 제일 어려운 부분이라.

대천사 루스가 내 제안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직접 해 보기전에는 알 수 없었다.

“그럼, 바깥 경계에서 보자.”

“혹시 그냥 도망가진 않겠지?”

녀석의 물음에 곧장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아아,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우리도 그 무기를 너무 가지고 싶거든.”

미쳤다고 그냥 가냐.

고지가 눈 앞인데.

그렇게 녀석이 길을 열어 주자 바로 하얀 결계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번에는 학살의 천사들이 우리를 막지 않고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역시 녀석은 나오지 못한다.

<윈> 맞죠?

<심연> 어, 확실하네.

우리가 하얀 결계로 들어간 사이 계속 기다리고 있던 발록은 나오자마자 바로 우리에게 붙었다.

어째 이러고 보니 이 녀석이 우리 파티 같은 느낌도 들고 그러네.

“일은 잘 풀렸나?”

“어, 이제 나가도 돼.”

안에서 우리가 뭘 했는지 발록은 알 수 없는 노릇이라.

녀석이 관심 있는 건 따로 있었다.

“물건은?”

“일단 기다려. 조만간 손에 들어올 거야.”

“알았다.”

참을성이 많이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발록을 데리고 쭉 걸어 아예 대천사의 무덤의 바깥 경계까지 나왔는데도 중간에 우리를 공격하는 몬스터는 하나도 없었다.

후.

이렇게 쉽게 올 수 있는 것을.

뒤를 돌아보자 천사들이 따라붙어서 우리를 포위하듯 따라왔다.

그리고 그중 중앙에 있는 녀석이 가지고 있는 무기가 눈에 띄였고.

대천사의 무기.

너무 허술하게 관리하는 거 아냐?

<윈> 그냥 치고 뺏을까요?

내 물음에 재중이 형이 고개를 저었다.

<심연> 아니, 들고 있는 녀석이 좀 심상찮네. 기존의 녀석들과 달라.

재중이 형의 대답에 자세히 보니 중앙에 있는 녀석은 확실히 다른 녀석과는 달라보였다.

으음.

굳이 표현하자면 주변 녀석들이 쫄병이라면.

녀석은 대장군이라고 해야 하나?

입고 있는 더 두터운 갑옷이라던가.

풍기는 기운까지도 확연히 달랐다.

그냥 보낸 건 아니라는 거군.

뭐 다 되어 가는 거래에 굳이 재를 뿌릴 필요는 없으려나.

그렇게 경계로 나오자 대천사의 무덤 바깥이 보였다.

“나가지는지 확인부터.”

곧 재중이 형과 발록이 경계 바깥으로 발을 내밀었는데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완전히 몸을 빼낼 수가 있었다.

“오케이. 우린 된다.”

역시 예상대로인가.

재중이 형과 발록이 완전히 대천사의 무덤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는 나 역시도 한 발을 걸쳐놓고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거래를 하지.”

내 신호에 예의 그 대장군 같은 녀석이 앞으로 나왔다.

한 손에 대천사의 무기를 들고서.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녀석과 일대일로 르아 카르테와 대천사의 무기를 교환했다.

그렇게 완전히 내 손에서 르아 카르테가 떠나갔고, 대신 대천사의 무기가 내게 들어왔다.

《 대천사의 검을 손에 넣었습니다. 》

《 대천사의 검에 대한 정보를 습득했습니다. 》

《 대천사의 고유 능력 중 일부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

시스템 메시지가 알려 주는 것만 봐도 이게 진품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굳이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금속의 정령이 옆에 있어서 확인 가능했고.

그때 갑자기 대장군으로 보이는 녀석이 크게 광소를 터트렸다.

마치 아까의 대천사 루스와 흡사한 목소리로.

빙의 뭐…… 그런 것과 비슷한 거려나.

“크하하하. 드디어 손에 넣었다. 정령의 검을! 이제야 이 지긋지긋한 무덤을 벗어날 수 있게 되는구나!”

기쁨과 환희랄까?

그리고 저 광소로 인해 왜 이렇게까지 녀석이 르아 카르테를 원했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역시 이 봉인 때문인가 보네요.”

“그래, 예상했던 대로다.”

금속의 정령이 말했던 정령왕들의 봉인.

그리고 르아 카르테가 그걸 깰 수 있는 매개체였다.

녀석이 대천사의 무기를 내어 주면서까지 얻을 이유는 충분해 보였고.

곧장 몸을 빼내어 완전히 대천사의 무덤을 벗어나자 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대천사의 무덤에서 이탈합니다. 》

후.

드디어 나왔네.

그리고는 재중이 형을 마주 보면서 씨익 웃어 버렸다.

재중이 형 역시도 환하게 미소 지었고.

속에 감쳐진 뭔가를 공유하기에 둘 다 이런 웃음이 나올 수 있었다.

“일단 튀죠?”

“크큭, 좋아. 바로 튀자. 곧 녀석이 미쳐 날뛸 거야.”

재중이 형도 다가올 미래를 알기에 빨리 뛰자는 말부터 했다.

그런데 우리 대화를 전혀 따라오지 못하는 발록은 하나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우리를 어이없게 바라보았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 저 무시무시한 괴물이 풀려난다는데?”

대천사의 무덤 봉인이 깨지면 당연히 대천사 루스가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이다.

그럼 당장 나와 재중이 형, 그리고 발록이 녀석의 거리 안에 들어오게 된다.

으음.

네임드인 발록 입장에서도 대천사 루스는 괴물로 보이는 건가?

하긴.

금속의 정령이 해 준 말에 따르면 마신에 근접한 녀석이라니까.

하늘 위에 하늘.

한 끗발 밀리는 발록이 보기에는 충분히 괴물로 보일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왠지 모르게 쫄아 있는 발록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아아,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뭐?”

“저거…… 가짜거든.”

“무슨 소리냐?”

“아, 오늘 따라 답답하네. 우리가 사기쳤다고.”

“사기?”

“어, 사기. 대천사 루스, 저놈이 가진 건 가짜다.”

그건 다름 아닌.

복사본 르아 카르테.

“이게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똑같거든.”

“미친놈…….”

“아, 요즘 그 소리 너무 자주 듣는 것 같은데?”

금속의 정령도 그렇고 발록도 그렇고.

날 너무 미친놈으로 보는 것 같다.

다시 발록을 보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녀석은 저 봉인에서 절대 못 나와.”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봉인과 함께 주변 대지가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니자 않아 거짓말처럼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는 봉인 저편에서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악에 받친.

사기당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으아아아!! 이 새끼들이 감히 내게 사기를 쳐!!”

그런 녀석의 외침에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래. 고맙다.

루스.

대천사의 무기는 내가 잘 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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