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4화 대천사의 무덤 (12)
대천사의 무덤 주인이 주목한다고?
설마 발을 들이자마자 바로 시스템이 반응할 줄은 몰라서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어느새 내 몸이 빨려들 듯이 하얀 결계 속으로 밀려들어갔다.
그것도 내 의지와 무관하게.
완전히 몸의 통제를 잃은 채 빨려 들어가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붙잡았다.
칫.
대천사의 무덤을 너무 쉽게 생각한 건가?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진행이 될 줄은 예상치 못 했기에 온 감각을 펼쳐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최소한 뭐가 움직이는지 정도는 알아야 해.
그렇게 사방으로 감각을 퍼트리는데 의외로 감각 속에 걸리는 그 어떤 존재도 발견할 수 없었다.
텅 비었어?
하얀 공간 속에 빨려들어 간 뒤 살펴본 대천사의 무덤은 내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심지어 바닥조차 사라지면서 몸이 공중에 완전히 뜬 상태가 되었다.
이러면 움직일 수가 없게 되는데…….
할 수 없이 르아 카르테와 테르타로스를 꺼내 들어서 정면을 막아섰다.
지금 믿을 건 이거 뿐이니.
그런데 그때.
하얀 공간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리듯이 내게로 전해졌다.
둥둥 울리는 것 같은.
굉장히 이질적인 목소리.
“호오, 정령의 검과 마신의 검인가?”
이걸 보자마자 바로 알아차려?
아니.
그보다 대체 어디서 이야기를 하는 거지?
감각을 퍼트려 살피고는 있지만 불특정한 방향에서 울리듯이 들려와 공간감을 잡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할 수 없나.
일단은 시간을 끌어볼 수밖에.
최소한 녀석을 파악할 때까지는.
“넌 누구지?”
내 물음에 의외로 상대방에게서 웃음이 들려왔다.
마치 꽤 당돌하다는 느낌이 드는 웃음이려나.
“내 무덤에 들어와 놓고는 내가 누군지 궁금하다는 건가?”
음.
역시 저건 대천사이려나?
그것도 금속의 정령이 말한 꽤 까다로운 존재일지도 모르고.
“대천사.”
“아주 멍청하지는 않군.”
그 순간 녀석이 손가락을 튕기는 듯한 소리를 내었고 그와 동시에 하얀 바닥이 내 밑으로 생겨나며 곧 자세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기는 한데.
당장 저 녀석이 손가락 하나 튕기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일단은 그냥 살피는 수준에서 넘어가야 하려나.
“이러는 이유가 뭐지?”
“흐음, 당대 정령신의 후손은 꽤 건방지군.”
정령신의 후손?
저건 나를 지칭해서 말하는 건가?
솔직히 정령신은 고사하고 정령왕조차 본적이 없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우선 튕기기부터.
아주 모른다는 식으로 넘어가야 녀석의 수를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을 터.
그런데 이 녀석은 내 생각과 다르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모르면 됐고.”
그러고는 거의 관심이 없다는 듯 목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으음.
설마 이게 끝인가?
녀석이 뭔가를 해올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전혀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이러면 난감한데?
최소한 반응은 보여야 뭔가 해보기라도 하지.
“그렇다고 그냥 가는 건 아니지.”
“멍청이에게는 볼일이 없다.”
큭.
저 녀석.
아주 대놓고 이쪽을 바보 취급하는데?
“아아, 알았다고. 그 정령신의 후손인가 뭔가 하는 거 일단 맞다고 하자.”
그 말에 이번에는 녀석도 확실히 드러나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 아주 바보는 아니라 다행이군.”
끝까지 저러네.
왠지 모르겠지만 이 녀석도 원래도 굉장히 괴짜 같은 면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만야 이게 다 연기라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무서운 거겠지만.
그런데 이런 수준의 기술을 보이는 대천사라면…….
어째서 내게 다른 위협을 가하지 않는 걸까.
자신의 무덤을 그냥 들어왔음에도.
머리를 팽팽하게 굴려 봐도 아직은 정보가 너무 적었다.
지금은 녀석이 최대한 자비를 베풀고 있다고 봐야 하려나?
혹은 어떤 다른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최소한 녀석이 내게 적대적인 어떤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뭔가 하려고 했으면 이미 한참 전에 해버렸을 테니.
적어도 당장은 죽지 않을 것 같아.
잠시 틈이 나 재중이 형에게 연락을 넣어 봤는데 그 어떤 귓속말도 외곽으로 전달이 되지 않았다.
고유 시스템을 막는다고?
전에 이걸 어디서 봤더라…….
귓속말이 되지 않는다는 건.
완전히 결계로 묶여 버렸다는 소린데.
왠지 전의 어떤 상황이 또 떠오르는 듯해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서로 바쁜 것 같은데 이제 슬슬 제대로 된 용건을 말해 줄 때도 된 것 같지 않아?”
결국 녀석이 말해 주지 않는 이상은 내가 뭔가를 알아내기 굉장히 어려워 보였다.
일단 이 공간 안에서는 녀석이 완전한 갑이니까.
“흠, 성미가 급하군.”
내가 급하게 아니라 네 녀석이 너무 느긋한 거다.
어쩌면 우위에 있다는 점이 녀석을 더 여유 있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었고.
잠시 말을 멈춘 동안 내 정면에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뭔가의 형체를 만들어져 갔다.
그것도 꽤 유려한 선을 가진 백금발의 미남자의 모습으로.
거기다 그의 등 위에는 한 쌍의 순백의 날개가 몸 전체를 감쌀 만큼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눈이 부실 정도의 하얀 빛의 이펙트까지 동반했고.
회오리치는 빛들의 무리가 녀석의 신체 곳곳에서 녀석을 보호하듯 움직이는 모습은 누가 봐도 대천사라고 봐도 무방했다.
역시 대천사였나.
저 화려함.
당당한 시선.
순백의 날개까지.
그런데 저 모습은 금속의 정령의 표현과는 너무 다른데?
분명히 마신에 근접한 악마가 숨겨져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누가 봐도 선량한 대천사의 모습과 다름없었다.
금속의 정령이 헛소리를 하진 않았을 테고.
내가 본 모습과 금속의 정령이 한 말을 더듬어 보면 너무나 괴리가 많기에.
오히려 녀석을 더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다.
눈앞에서 보이는 녀석의 모습과 금속의 정령의 말의 신용도를 고려해 보면.
무조건 금속의 정령이 승이지.
“난 대천사 루스라고 한다.”
“루스?”
솔직히 녀석에게 이름을 듣기는 했는데.
그게 맞는 건지 아닌지 전혀 알 수가 없어.
적어도 금속의 정령을 보기 전까지는.
하지만 지금 이 공간에서는 금속의 정령 역시도 소환이 되지 못 했다.
아니.
정확히는 어떤 힘에 눌려 르아 카르테가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게 더 맞겠지.
아까 전부터 금속의 정령 특유의 빛이 나왔다가 사라지며 계속 르아 카르테에 묶여 있으니.
이것도 아마 저 대천사 루스라는 녀석이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금 내게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 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뭔가 찝찝하긴 한데…….
딱 꼬집어서 뭐라고 하긴 어렵고.
경계는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적대적인 표시를 할 수도 없었다.
피곤하네.
대체 녀석이 이렇게 하면서까지 노리는 게 뭐지?
정보 자체가 아예 없다 보니 뭔가의 판단을 내리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어째 하나같이 정상적인 녀석이 없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대천사 루스를 바라보자 지긋이 나를 똑바로 보던 녀석이 내게 말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난 네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으니까. 나를 편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군.”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대천사 루스가 찔러오자 오히려 더 복잡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묘한 기시감과 함께.
저 녀석이 왜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거지?
대천사의 무덤 침입자인 내게 굳이?
그 순간 한 가지 가정이 팽팽하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대천사라는 직위.
그리고 이 무덤.
정령왕들의 봉인.
금속의 정령의 기묘한 말.
녀석의 이상하리만큼 친근한 말투와 태도.
언제든지 날 공격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 행동들.
생각해 보면 대천사 루스는 현재의 내 스펙보다 압도적으로 강할 것이다.
그걸 모를 녀석도 아니고.
그럼 결국.
내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말인데…….
녀석이 처음에 내게 뭐라고 했었지?
계속 역순으로 기억을 더듬어 가니 곧 녀석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정령의 검.
마신의 검.
이걸 한 번에 알아본 녀석의 태도가 변한 건 아마 그때부터이려나?
그렇다면 이중에 녀석이 더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아니면 둘 다 이려나?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짙은 확신이 섰다.
내게 녀석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은 이것밖에 없어.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녀석이 신형이 점점 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정말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듯 아주 느긋하게 표정을 풀고서.
그리고는 내게 의심이 가득할만한 말을 꺼내놓았다.
“네가 정령신의 후손이라면. 나를 도와 이 마계를 없앨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겠나? 할 수만 있다면 그대에게 천사들의 직위를 내려주도록 하겠다.”
《 대천사 루스가 유저 주호 님에게 긴급 마계 파멸 퀘스트를 제안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 시 천사 계급의 직위가 추가로 형성됩니다. 》
응?
퀘스트?
그것도 처음 들어보는 형태의 퀘스트였다.
심지어 천사 계급이라니.
천계에 가 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천사라니.
이런 퀘스트도 있었던가?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이곳에 있는 내가 전부였다.
갑자기 퀘스트를 준 것도 이상한데...
그 제목 역시 수상한 것 투성이었다.
자세한 설명조차 없는.
오직 대천사 루스의 말로 진행이 되는 퀘스트.
잠시 빤히 대천사를 루스를 바라보았다.
퀘스트를 제안하고 전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날 보는 대천사 루스에게서는 딱히 이상한 점을 찾긴 힘들어.
이게 겉으로 보기에는 대천사가 마계를 파멸시키는 제목의 퀘스트라 누가 오더라도 혹할 확률이 오히려 더 높았다.
하지만 여전히 찝찝하단 말이야.
왜 굳이?
저런 퀘스트를 내게 준다는 거지?
단순히 정령신의 후손이라는 것 때문에?
그리고 그 후손이라는 것도 의심거리지.
난 정령의 검인 르아 카르테를 들고 있는 것뿐인데 그것만으로 후손이라고 칭하기는 좀 어렵지 않나?
마치 내가 뭔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녀석의 말은 달콤하지만.
그만큼 위협적으로 내게 들려왔다.
후.
일단은 결론을 내면 안 되겠지.
“당장 대답을 해 주어야 하는 건가?”
“흠, 조금 시간을 줄 수는 있지만. 너무 오랜 시간 기다려 줄 수는 없다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내 옆으로 일종의 카운트다운 시계가 떠올랐다.
확실히 녀석이 주는 퀘스트가 맞긴 한가 보네.
천사 직위를 주는 퀘스트.
그것도 진행에 따라 추가 보상이 약속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 정도 규모의 퀘스트를 아무 보상도 없이 시작할 리는 없으니까.
단순히 녀석의 말만 보자면 정말 마계를 뒤흔들 정도의 굉장한 퀘스트가 될 것이다.
후.
결국 어떻게든 녀석에게 답을 주어야 한다는 건데…….
이럴 땐 정말 재중이 형의 존재가 그리워지네.
이 대답 여부에 따라 앞으로의 진행은 확연하게 차이가 나겠지.
허락하면 최소한 천사 작위.
반대로 거부하면……?
거부에 대한 내용은 딱히 나와 있지 않아 패널티는 없는 모양이지만…….
내 앞에 대답을 기다리는 녀석의 꼿꼿한 모습을 보면.
딱히 그것도 아닐 것 같아.
그렇게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곧 결단을 내렸다.
“내 대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