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2화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다 못 먹어 (10)
원래라면 이 거점을 통하지 않고 멀리 돌아갈 생각이었다.
굳이 다른 세력의 거점을 거쳐 갈 필요가 없었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발록.
이 녀석의 존재가 맘에 걸렸다.
당장은 하이딩 페이스를 쓰고 신체를 축소했다고는 해도.
정말 가까이에서 보면 어느 정도 위화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네임드 특유의 기세랄까.
조금만 민감한 사람이 보면 분명히 뭔가 다름을 알겠지.
그게 네임드라는 생각은 결코 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맘놓고 돌아다닐 수 있는 건 또 아니었다.
휴.
이래서 일부러 거점을 지나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말이야.
문제는 이 거점의 위치가 너무 절묘하다는 것에 있었다.
산맥 경계.
그것도 산맥 속에 있다고 알려진 유적지로 가는 입문에 완전히 짱 박혀 있는 위치.
만약 여기가 아니라면 완전히 둘러서 가야 하는데.
그러면 바로 마왕의 영역으로 들어가 버리게 된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걸쳐서 거점을 만들었단 말이지.
딱 마왕의 경계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누군지 몰라도 이 위치를 점한 것은 정말 머리가 좋은 녀석일 것이다.
만약 누군가 유적지를 방문하려고 한다면 무조건 이 거점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딱 한 곳, 거점을 만들어서 버틸 용도로는 최적이라는 거지.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문지기로 보이는 유저들이 우리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원래라면.
이런 식으로 유저가 거점을 지키는 일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굳이 수비 NPC를 놔두고 유저가 굳은 일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것도 몇 시간 동안 계속 서서 지켜봐야 하는 일을 하려는 유저가 과연 존재할까?
당장 레벨업을 하고 사냥을 하기 바쁜데.
만약 이곳이 네임드가 출몰하는 사냥터라면 또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럴 경우에는 유저들이 돌아가면서 기를 쓰고 네임드의 영역을 지켰다.
다른 유저들이 네임드를 잡지 못하도록.
그런 것도 아닌데 지금 여기 거점을 지키는 유저가 이렇게 많다라…….
이건 누군가 지시를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윈> 형, 이건?
<심연> 흐음, 이 정도로 경비를 할 줄은 몰랐는데?
여기 오기 전에 미리 우리 아이디를 변경해 둔 상태였다.
아무래도 적의 심장 한복판을 드나드는 일이라.
그리고 전사 형 역시 다른 아이디로 변경했다.
최강쉴더.
아이디에 방패를 안 넣으면 허전하다나…….
여기에 발록까지.
넷 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아무래도 경계를 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던가.
나와 재중이 형에 앞서 전사 형이 한 걸음 나서더니 웃음 지으며 말했다.
전형적인 일반 유저의 느낌으로.
“이거 수고들 하십니다.”
그러자 경비를 서고 있던 유저들 중 리더로 보이는 유저가 기나긴 창을 정면으로 들어올렸다.
“멈추라고 했다.”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는 경계심.
날이 잔뜩 서 있는 저 녀석들의 표정을 보니 분명히 뭐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그러자 전사 형이 다시 한 번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아, 오늘 중으로 여기 거점을 지나가야 합니다. 좀 보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경비가 노려보는 것도 잠시.
전사 형이 계속 저자세로 나오자 다소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지? 여기 통제됐다는 말 못 들었어?”
“아, 정말입니까? 어제 접속 못 했다가 늦게 접속하는 바람에 전달을 못 받은 모양입니다.”
“흐음, 그런가? 아무튼 여긴 이제 통제 구역이라서 말이지. 우리도 함부로 유저들을 보내줄 수가 없다고. 안 그래도 여기 지나가려는 유저들이 많아서 귀찮아 죽겠구만.”
정말 귀찮다는 표정 가득한 경비를 보고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됐다.
그보다 여기 지나가는 유저가 많았다고?
전사 형을 보자 전사 형도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강쉴더> 있어 봐. 내가 알아서 해볼 테니.
<윈> 네, 여의치 않으면 다른 방법을 쓰죠.
귓속말을 끝내고 전사 형이 곧장 경비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오는 건 안 된다니까?”
“아, 그러지 마시고요. 알지 않습니까. 여기 산맥에서만 캘 수 있는 재료들 말이죠.”
전사 형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경비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아, 채집꾼이었나? 정말 왜 그건 하필 거기에 있어 가지고. 사람 귀찮게.”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수급날에 못 맞추면 저희도 꽤 곤란합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에서만 나는 채집 템이라. 신규 아이템 제작 못하면 진짜 굶어죽습니다.”
“앓는 소리는 됐어. 그래도 우리는 여길 지켜야 한단 말이야. 채집꾼이라고 막 들여보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전사 형이 생각하고 온 게 이거였나?
로스트 스카이에서는 아이템 제작 재료로 쓰이는 채집템들이 꽤 많이 존재했다.
물약부터 시작해서 방어구, 악세, 심지어 무기까지.
완제품으로 드랍이 되지 않는 이상 보통은 제작템을 쓰는 편이고.
그러려면 역시 아이템을 필드나 던전 곳곳에서 구해와야 했다.
혹은 몬스터를 잡아서 재료를 구하던지.
그런데 구하는 경로가 여러 곳이나 일부 아이템은 정말 딱 한 구역에서만 나는 경우도 존재했다.
지금 전사 형이 말하는 뭔가의 아이템에 대한 재료 템이 바로 그것이겠지.
그리고 그러니까 저 경비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반응을 보니 이렇게 찾아와서 문 열어 달라는 유저들이 꽤 있는 모양이었고.
<윈> 생각보다 저항이 없네요?
채집꾼이든 누군든지 간에 무조건 안 된다고 꺼지라고 할 줄 알았는데.
지금 반응을 보면 딱히 그러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자 재중이 형이 곧장 말해 주었다.
<심연> 이런 채집꾼들의 요구를 무조건 묵살할 수는 없거든.
<윈> 그래요? 솔직히 이런 힘이 있는 연합이라면 일반 유저는 그냥 깔아뭉갤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꽤 다른 느낌이네요.
<심연> 쟤들도 저 채집꾼들이나 채굴꾼들한테 재료를 받거든. 통제를 한다고 저들도 막아버리면 꽤 곤란한 상황이 오지. 이를테면 다음에는 귀한 채집 재료나 물약 자체를 공급 안 해 버린다던가.
<윈> 그게 가능해요?
<심연> 큭, 그들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아마 재료 아이템 거래량의 절반 이상을 저들이 쥐고 있을걸?
<윈> 상당하네요.
<심연> 어, 플레이어 킬이 가능한 유저라면 몰라도. 이런 공급책이라면 저들도 막기 애매해. 대부분의 경우 그냥 보내주는 편이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전사 형이 그 경비에게 다가가 남들이 보이지 않게 슬쩍 뭔가를 건내주는 것이 보였다.
“허어, 이 사람이……!
“누가 봅니다. 얼른 넣으시죠?”
“흠흠……!”
그러더니 경미가 슬쩍 주머니 안에 있던 것들을 열어서 확인하더니 곧 경계하는 표정이 샤르르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대체 뭘 준 거지?
<최강쉴더> 보석 좀 넣어 놨다. 꽤 비싼 걸로.
<윈> 오히려 의심 받는 거 아니에요?
<최강쉴더> 아니, 이것도 저기 산맥 안에서 깊은 곳에서만 나는 채굴 보석이라서. 꽤 돈이 나가는 귀한 거라고?
흐음.
확실히 그렇다면 이곳을 자주 드나든다는 증명도 될 수 있겠는데.
물론 바깥에서 사서 가지고 왔을 경우도 배재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경비는 이미 경계가 다 풀린 듯 표정이 헤실헤실 웃는 표정이었다.
“크흠, 원래 이런 거 받으면 안 되는데 말이야.”
“에이, 누가 압니까. 저도 이 정도는 남아서 이 위험한 산맥을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해. 저 위쪽으로 몬스터가 좀 쎄야지. 그런데 저 뒤에 있는 녀석들은?”
그제야 우리가 눈에 들어오는지 경비가 우리를 바라봤다.
“아, 잘 아시다시피 제가 채집을 하는 동안 경계를 서줄 녀석들이 필요해서 말입니다.”
그 말에 경비가 흘깃 나와 재중이 형을 훑어봤다.
“이 근처에서는 못 본 녀석들 같은데?”
“아, 요즘 인력 부족이 심각해서요. 선뜻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래서 좀 멀리서부터 고용해 왔습니다.”
“인력 부족이라……. 그곳을 말하는군.”
“잘 아시는군요.”
“하아.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말이 많아. 되도 않는 놈들이 반기를 들었다고.”
반기?
곧장 재중이 형을 바라보자 재중이 형도 흥미로운 눈빛을 보였다.
<심연> 패황 이놈이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려는 것 같은데?
<윈> 네, 예상보다 훨씬 빠르네요.
아직은 세력이 부족할 건데?
벌써 나선다고?
여기 경비병들이 알 정도면 이미 초월이나 페가수스 수뇌부 쪽에는 다 파악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고급 정보가 아래에서 위로 가진 않으니.
“그놈들 때문에 괜히 여기서 경비까지 서고. 미치겠다고. 한참 레벨 올리려는 시점에.”
“아, 고생이 많으십니다.”
“내 말이. 이런 돈도 안 되는 경비를 대체 누가 서고 싶어하냐고. 그냥 NPC들 세워 두면 될 일을.”
그러면서 경비가 자기 손에 들린 보석 주머니를 바라보며 웃어보였다.
“흐흐, 내가 이것도 아니면 진짜 여기서 벌써 탈퇴했다.”
<윈> 이제 보니 처음부터 저게 목적이었나 보네요.
<심연> 전사가 포인트를 잘 짚었네.
미리 조사를 하고 오지 않았다면.
채집꾼이나 이런 뇌물에 대해서는 전혀 연결해보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경비병이 좀 난감하다는 식으로 우리 뒤에 있는 발록을 가리켰다.
“근데 재는 좀 그런데…….”
“아, 발록 형님 말입니까?”
“형님이야? 아무튼. 피케이 많이 한 애들은 지금은 좀 곤란하다고. 위에서 보는 눈이 많아서 말이야. 저런 애들 거점에 돌아다니면 우리 바로 찍힌다니까?”
이번에는 경비가 정말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전사 형이 다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 미리 말씀하시죠. 조금 더 올려드리겠습니다. 보다시피 레벨이 깡패라 이 정도 되는 분이 있어야 우리도 산맥 깊숙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으음, 곤란한데. 거기다 아이디가 발록이 뭐야? 너무 눈에 띄잖아.”
저건 아마 돈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 같기도 한데.
전사 형이 주머니를 하나 더 꺼냈는데도 불구하고 영 미덥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저희 이번에 못 들어가면 정말 위에서 짤립니다.”
“에이, 널 들여다 보내 주면 내가 짤린다고.”
그럼에도 이미 받은 보석 주머니는 포기 못하겠는지 아쉬운 표정으로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흠, 그럼 이건 어떱니까?”
“뭐?”
“이번에 여기 거점에서도 유저들을 구하지 않습니까.”
“아, 그거? 그렇긴 한데……. 안 그래도 새 유적지 공략한다고 총…….”
그렇게 말하려다가 순간 경비가 말을 급하게 멈추고 아차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못 들었지?”
그 태도에 전사 형이 씨익 웃음 지었다.
“네, 전 하나도 못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쪽으로 자리 좀 만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아무래도 우리도 단독으로 산맥을 들어가긴 좀 힘들어서 말입니다.”
“흠흠, 그거라면 저 빨간 녀석도 괜찮겠지. 좋아. 내가 특별히 말해둘 테니까. 가서 말썽 부리지 말라고.”
“하하, 바로 채집하러 빠질 거라 괜찮습니다.”
그러면서 보석 주머니를 다시 올려주자 흡족한 표정으로 경비가 손짓했다.
오늘 횡재했다는 표정이려나?
“따라와. 산맥으로 향하는 경비조에 안내해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