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9화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다 못 먹어 (7)
초월 연합과 대치 중인 어떤 마왕의 영역 경계에 있을 하나의 물건.
솔직히 이게 무슨 물건인지.
어디에 어떻게 쓰는 물건인지는 나도 전혀 모른다.
그리고 재중이 형과 전사 형 역시 이것의 정확한 정체를 알지 못 했다.
그냥 그렇다더라는 소문.
마왕을 잡을 수 있다는 정체불명의 물건이라…….
전사 형에게 이 물건에 대해서 들을 때에는 그런 물건이 있구나 정도만 생각했었다.
이 마계는 굉장히 넓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아이템들이 많을 테니까.
아마도 이 정도 수준의 아이템이라면 마계 경매장에서 마지막에 나올 법한 그런 물건이 아닐까.
적어도 마왕에게 어떤 피해를 입힐 수 있을 정도의 아이템이니 이런 소문이 났겠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아이템을 차지하고자 초월 쪽 연합들이 그렇게 목을 매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걸 전부 듣기만 하고 넘겼던 것은…….
당장 저 아이템을 두고 싸우는 분쟁에 끼어들 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
마왕의 세력과 현재 서버에서 가장 강한 세력들이 부딪히는데 난 이제 겨우 아이템의 성능에 힘을 빌려 겨우 레벨 대에 맞는 수준에 올라왔으니까.
마왕을 잡을 수 있는 물건.
당연히 좋다.
무리를 해서라도 얻을 가치가 있을 만큼.
나중에 분명히 마왕을 상대하는데 큰 도움이 될 테니.
아마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다면 직접 저 분쟁을 이용해 뭔가를 했을 테지.
하지만 어차피 가질 수 없는 물건이라 크게 의미를 두진 않았지만.
웃기게도 가장 위기라 생각했던 지금.
눈앞에 다른 해답이 서 있었다.
지옥의 타오르는 왕.
발록.
이 녀석은…….
나보다 그 마왕을 잡는 아이템에 더 관심이 있어.
나야 당장 쓸 수 없는 아이템이라 얻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수준이지만.
발록은 다르다.
이 녀석은 그 아이템이 반드시 필요했다.
내가 지도의 한 구역을 손가락으로 찍으면서 발록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마 이 발록을 만나고 난 뒤 지금이 가장 즐거운 순간이 아닐까?
그런 내 얼굴을 본 건지 못 본 건지 모르겠지만.
발록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듣는다는 표정으로 날 보는 것과 달리.
어쨌든 발록은 내가 말한 사실에 관심을 보였다.
“마왕을 잡으려면 그곳에 가야 한다고?”
“제대로 들었네.”
그러자 녀석에게서 흘러나오던 화염 기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마왕이 관련된 게 맞았어.
그게 아니라면 벌써 칼부림을 했을 텐데.
그리고 이제는 패가 내게로 넘어왔다.
발록은 더 이상 우리를 공격하지 못할 테고.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듯 표정을 굳히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녀석의 시선은 내 입가로 가 있었다.
아마 내 다음 말이 궁금할 테지.
당연히 난 그런 발록을 만족시켜줄 만한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기대는 채워 주라고 있는 거지.
“이곳에 마왕을 잡을 수 있는 물건이 있어.”
“흠…… 정말인가?”
그렇게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발록이 내게 눈을 부라렸다.
“그런 물건이 있으면 내가 듣지 못 했을 리가 없다.”
아주 단호한 눈빛.
너무 당당해서 오히려 진짜 그런 물건이 없나 할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런 발록을 보면서 내가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
세상 물정 모르네.
“너, 이 용암 지대에서 얼마나 벗어나 봤어?”
“……으음.”
내 정곡을 찌르는 말에 순간 발록의 표정이 빨갛게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이미 빨간 녀석이 더 빨개진다고 뭐 달라지기야 하겠냐만은.
어찌됐든 녀석이 당황한 것은 맞는지 다시 화염이 막 뿜어져 나오려고 할 때 손을 들었다.
“아, 그거 굉장히 덥다고. 좀 참지 그래?”
“크흠.”
할 말이 없는지 곧장 기운을 갈무리한 녀석이 기대에 가득한 눈빛으로 내게 다시 물었다.
“확실한가?”
이젠 기대하는 감정을 숨기지도 않는군.
“어, 너도 알다시피 이곳은 마왕의 영역이야. 근처에 마왕성도 있고.”
마왕이라는 말에 녀석의 어깨가 잠시 움찔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째서 마왕의 영역 안에 그런 물건이 있을 수가 있는 거지? 내가 마왕이라면 벌써 치워 버렸을 텐데…….”
하.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저건 이 구역을 설정해 놓은 녀석에게 따져야 하는 거 아냐?
하도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웃었다.
그때 전사 형이 앞으로 나와 아까의 이야기를 좀 더 보충해 주었다.
“마왕의 구역 안에 마왕은 들어갈 수 없는 유적지가 있다.”
어?
그런 거였나?
전혀 몰랐던 사실이라 전사 형에게 귓속말로 물어 보았다.
<주호> 어떻게 알았어요?
<방패전사> 그 유적지 근처에 마왕이 서성이는 걸 본 유저들이 있거든. 머물기만 하고 들어가지 않는 걸 보면 뭐 뻔하지.
마왕이 못 들어가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아이템은 무슨 수로 알아낸 거지?
물어보려고 하는데 전사 형이 추가로 이야기해 주었다.
<방패전사> 이게 마왕은 못 들어가도 휘하의 몬스터나 유저는 들어갈 수 있거든. 그리고 거기 탐사하러 들어갔던 유저 중에 한 명이 고대 벽화 같은 걸 발견했다고 해.
<주호> 벽화라면?
<방패전사> 마왕으로 보이는 그림을 공격하는 뭔가가 그려져 있었다고 하던데.
<주호> 그럼 맞긴 하겠네요.
아무 의미 없이 유적지 같은 곳에 벽화를 그려 둘 리는 없었다.
이게 그 유적지에 관련된 아이템에 대한 힌트가 될 수도 있고.
그렇다는 건.
저 발록에게 확신을 가지고 일을 밀어붙일 수 있다는 말이다.
“알다시피 마왕은 못 들어가도 넌 그 유적지에 들어갈 수 있지.”
그리고 이 사실은.
발록에게 커다란 이득이 되어 줄 것이다.
외부에서 활동을 하려면 확실한 거점이 필요한데 그 유적지는 발록에게 천혜의 요새 같은 장소가 된다.
녀석이 진출하는 데 가장 걸리적거리는 마왕을 막아 주니.
물론 이 용암지대도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한 역할을 하긴 하지만.
성격 자체가 다르지.
“그건 마음에 드는군.”
발록 역시도 이 사실에 만족했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말은 안 하겠어. 넌 저곳에 가서 그 마왕을 잡는 아이템만 구하면 돼.”
이걸 다른 식으로 이야기하면.
초월 쪽 연합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차려놓은 밥상을 그대로 엎어 버리라는 말과 동일했다.
당장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이 발록 정도의 괴물이라면.
그냥 누워서 떡 먹기나 마찬가지지.
그런데 내 말에 잠시 고민을 하던 발록이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했다.
“나로서 거절할 이유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네 손에 놀아나는 기분이 드는군.”
아, 이놈.
생각보다 예리하네.
맞다.
널 쓸모 있는 장기판의 말로 쓰려는 것이.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좀 띠꺼운 표정을 지은 발록을 보면서 웃어 보였다.
“그래서 싫어?”
“……흠.”
뭔가 여기에 더 숨겨진 것들이 있는가 싶어서 발록이 날 노려보았지만.
네가 그러면 어쩔 건데.
이걸 안 하려고?
절대 거부할 수 없을 텐데?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녀석에게 배짱을 튕겼다.
“뭐 싫으면 말고. 너 말고도 이 일을 해 줄 다른 녀석들은 많아.”
그러자 녀석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좀 신경을 건드린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을 테지.
거기다 내 말이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일을 해야 하는 게 꼭 발록일 필요는 없어.
레벨이 오른 발록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다른 네임드라고 해서.
발록과 다를까?
그 생각에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발록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른 네임드를 키워 지금처럼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쪽이 더 고분고분할지도 모르고.
“발록. 난 너에게 선택권을 주는 거야. 제일 먼저 이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내 제안은 얼핏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발록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내게 말려든다고 생각해서 지금 저렇게 튕기고 있는 거지.
아마 속으로는 만세를 부르고 있지 않을까.
“흠,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큭.
그래.
내가 신경 좀 써 준다.
“좋아. 하지만 너무 오래는 안 돼. 우리도 여기 오면서 시간을 굉장히 오래 소비했거든.”
“알았다.”
그러더니 발록이 허공에 다른 곳으로 통하는 게이트는 만들어서 곧장 사라져 버렸다.
“으음, 사라졌네요.”
재중이 형을 보면서 말하자 재중이 형이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저 녀석도 사활을 걸어야 할 테니까. 시간이 필요하겠지.”
“아, 마왕이 있죠.”
재중이 형 말대로 발록의 상대는 마왕이다.
그게 어떤 마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녀석이 말은 안 했는데…….
만약 마왕이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이라면?
발록을 바깥에 못 나오게 하기 위해서 압박을 가하는 녀석이 생각보다 많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녀석은 목숨을 걸고 나가야하는군요.”
“뭐 그런 셈이지. 그리고 확신이 필요할 거야. 그런 아이템이 확실히 있는가에 대해. 우리의 말만 믿고 나가긴 그러니.”
“확인해 본다는 건가요?”
“어, 아마 휘하의 부하를 시킨다던가. 저 녀석도 나름대로 바깥의 정보를 얻는 방법이 있을 테니까.”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겠네요.”
겉으로 보기에는 무대포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신중한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스타일은 꽤 성가시지.
적들의 입장에서.
물론 그 적이 우린 아닐 것이다.
그건 앞으로 발록을 상대하게 될 녀석들이지.
“이게 잘 끝났으면 좋겠는데요.”
그때 전사 형이 날 보면서 감탄의 말을 꺼냈다.
“정말 그 상황에서 이렇게 엮냐. 대단한데?”
“그냥 제일 좋은 방법이 떠 오른 것뿐이에요.”
발록과 마왕.
마왕을 잡을 수 있는 아이템.
마왕과 대치 중인 초월 연합.
이걸 전부 다 엮어 버리면 이런 그림이 나온다.
“흠, 그 마왕을 잡을 수 있다는 아이템이 좀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당장은 우리가 못 얻으니까요. 거기다 아마 그대로 두면 초월 쪽에 넘어갈 확률이 높겠죠.”
내가 못 먹는 음식이라면.
그냥 다 못 먹게 흙을 뿌려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것도 그게 우리의 적이라면 더욱 더.
이 이상 녀석들이 더 커지는 것도 부담이니까.
“발록은 좋은 패가 되어줄 거예요.”
그리고 발록을 장기판의 말로 올릴 수만 있다면…….
그 다음은 더욱 잘 풀리게 될 것이다.
“다음 패를 위해서는 발록이 이 판 위에 반드시 올라가야 해요.”
아까는 발록이 아니면 다른 네임드를 쓸 수도 있을 거라고 했지만.
발록 말고 다른 녀석을 쓰려면 그만큼 시간이 걸리니까.
그냥 제일 좋은 방법은.
발록이 다시 나타나 내 손을 잡는 게 베스트 시나리오였다.
“다음 패?”
내 말에 재중이 형과 전사 형이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네, 발록은 큰 그림을 위한 포석일 뿐이에요.”
“호오. 발록이 움직이게 되면 한번 들어 보자고.”
재중이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급조한 계획이긴 했지만.
이건 무조건 발록이 움직이면이다.
그렇게 재중이 형과 전사 형과 앉아서 기다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우우웅!
다시 게이트가 근처에 열리면서 발록이 모습을 드러냈다.
옆에는 발록과 비슷한 유형의 또 다른 몬스터가 한 마리 보였는데.
아마 발록의 부하가 아닐까.
역시 녀석이 정보를 얻어온 모양이었다.
과연…….
녀석이 뭐라고 할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가운데 발록이 무겁게 말을 꺼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군. 좋다. 한 번 해보지.”
《 지옥의 타오르는 왕, 네임드 발록과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 지옥의 타오르는 왕, 네임드 발록과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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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시에 호감도 시스템이 크게 요동쳤다.
그걸 보고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큭.
좋아.
이제부터 제대로 깽판 한번 쳐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