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8화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다 못 먹어 (6)
내 부탁에 발록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마치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사실 유저가 네임드에게 이렇게 부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일이라…….
지금처럼 발록과 약간의 호감도를 쌓아놓은 상태가 아니었으면 이미 칼부림이 나도 수백 번은 나지 않았을까.
그나마 발록이 내게 관심이 있으니 저렇게 듣고 띠껍다는 표정만 짓고 마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내가 들고 있는 이 마신의 파편이겠지만.
곧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발록이 낮고 경고성이 가득한 어투로 내게 으르렁거렸다.
“당장 내가 널 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여겨야 할 텐데?”
안다.
저 녀석이 진짜 많이 양보하고 있다는 것을.
가득이나 활활 타오르는 녀석인데 거기에다가 기름 붓듯이 이런 부탁을 하고 있으니 녀석이 저렇게 폭발 일보직전이 될 수밖에.
<주호> 형, 잘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튀어요.
<불멸> 안 그래도 준비하고 있어.
재중이 형도 대화가 잘 풀리지 않자 바로 튈 준비를 했다.
발록이 조금이라도 수가 틀려서 우리를 죽이고자 하면 당장 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으니까.
일단 녀석에게 마신의 파편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유저의 터무니없는 부탁을 들어줄 정도로 기울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녀석은 그냥 우리를 죽이고 마신의 파편을 뺏어도 되는 일이니.
당장 황금알을 낳는 닭이라 손대지는 못하지만.
부탁까지는 무리다.
만약 호감도가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면 또 모르겠는데.
지금은 그런 상태도 아니었고.
무작정 부탁한다고 될 일은 아니야.
마신의 파편으로는 부족해.
그럼 이 정도로 강한 녀석이…….
진정 바라는 건 뭘까?
마신의 파편?
일단 이건 아니지.
지금의 마신의 파편으로는 녀석을 만족시키지 못 하니까.
결국 녀석이 자발적으로 나서는 쪽으로 이끌어야 할 텐데…….
내게 발록을 움직일 만한 패가 뭐가 있지?
생각해 내라.
만약 지금이 아니라면 이렇게 다시 대면해서 대화를 하는 게 불가능할 수도 있어.
뭔가를 꺼내들려면 지금뿐이다.
머릿속이 팽팽하게 돌아가면서 발록과의 대치를 계속했다.
녀석이 혹할 만한 것…….
진짜 원하는 게 뭐지?
이 정도로 강한 녀석이 원할 만한 것을 내가 충족시켜 줄 수 있나?
녀석을 꾀어낼 만한 미끼…….
수면 위로 끄집어내서 활개 칠 수 있을 만한 먹음직스런 먹이…….
단순히 유저들을 죽여서 레벨을 올리는 정도로는 녀석은 만족하지 못 할 거야.
당장 레벨만 봐도 이미 한계치까지 오른 모양이니.
굳이 유저들을 찾아다니면서 죽이지 않아도 이미 발록은 충분히 레벨이 오른 상태였다.
그럼 이쪽은 아니고.
그보다 더…….
녀석을 강하게 만들어 줄 것?
그렇게 머리를 굴리던 중에 아까 전사 형이 내게 해 주었던 말이 전기를 맞은 것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어?
이거…….
정말 되는 거려나?
전사 형과 재중이 형에게 들었던 단어들이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흘러나오며 하나의 퍼즐을 완성시키기 시작했다.
설마 이게 여기서 이렇게 연결될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지만.
생각해 보면…….
녀석이 혹할 만한 최적의 상황 아닌가.
<주호> 형, 아무래도 도망은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불멸> 뭔가 찾았어?
<주호> 네, 이거면…… 최소한 녀석이 외면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니, 오히려 녀석이 먼저 나서서 움직일 수도 있어요.
잠시 재중이 형과 눈빛을 마주치자 재중이 형도 그냥 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차하면 튈 준비는 해놓고.
나도 솔직히 가능성은 반반이라 생각한다.
레벨이 오른 발록의 저 성향.
강하면서도 패도적인.
주변에 적이 없을 정도로 강력하지만…….
하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왜 아직도 여기서 묶여 있지?
분명히 재중이 형이 이야기해 주기에는 녀석은 분명히 한 지역을 지키는 네임드는 아니라고 했다.
실제로 바깥에 나가서 활동하기도 했다고 하니까.
그런데 왜 여기서 이렇고 있지?
뭐 주변 몬스터들을 잡아서 레벨을 올린다고 하면 이해가 아예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좀 전까지 달려오면서 본 이 사냥터에서는 녀석이 원할만큼 레벨이 높은 녀석은 전혀 없었어.
물론 중앙으로 더 들어가면 좀 더 레벨이 높고 강한 녀석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당장 재중이 형에게 물어봐도 이건 맞다고 할 테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 발록보다 더 강한 녀석이 여기 존재할까?
그 물음에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녀석에게 경험치가 되어줄 만큼 레벨이 높은 녀석은 이미 다 잡았을 지도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나가지 않는다?
이건 분명히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주호> 형, 발록이 여기서 왜 나가지 않는 걸까요?
내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하던 재중이 형이 말했다.
<불멸> 글쎄? 여기에 뭔가 지켜야 할 것이라도 있나?
<주호> 만약 그게 아니라면요? 안이 아니라 밖이 문제라면요?
<불멸> 밖?
<주호> 네, 밖이요.
밖이라는 내 말에 재중이 형의 눈빛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변했다.
<불멸> 마왕…… 이냐?
역시 재중이 형.
힌트가 있자 내가 생각했던 단계까지 바로 따라왔다.
<주호> 아무래도 마왕과 뭔가 있는 것 같아요. 나갈 수 없는 이유라던가.
<불멸> 마왕이라……. 확실히 마왕 정도면 발록을 억제해 놓을 수 있겠지. 마왕이 이 지역 안에 들어와서 녀석을 잡는 게 불가능하더라도 밖은 전혀 환경이 다르니까.
용암 지대.
재중이 형의 그것과 같이 용암 지대의 이 특수성에 기대어야 발록은 정말 강력했다.
뭐 이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재중이 형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맞다고 봐야 한다.
최소한 발록은 이 지역을 나가서는 마왕을 이기지 못해.
그래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있는 것이다.
철장이 없는 감옥이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족쇄와도 같은 용암 감옥이 녀석에게는 가장 짜증나는 일일 수도 있겠는데.
당장 나가기만 하면 지옥을 호령하고도 남을 신체를 가지고도 이렇게 나가지 못하니.
우리 생각이 맞다면 그 답답함이 상상 이상일지도 몰라.
그리고 지금.
그런 녀석의 역린을 살짝 건드릴 생각이다.
이게 아니면.
그냥 튀어야지.
까딱 잘못하면 그냥 지옥행이다.
“발록, 내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는 게 아니라…… 혹시 너 여길 나가지 못하는 거 아냐?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듯 녀석이 제일 예민할 만한 사실을 넘겨짚자, 아니나 다를까.
정말 지옥의 타오르는 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엄청난 화염이 녀석에게서부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이 일대를 다 태워 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화아아악!!
화르르륵!!
“감히 내게 그딴 소리를 하는 것이냐!!”
처음 등장할 때 녀석이 보여 주었던 압력은 마치 장난이라는 듯 엄청난 화력이 녀석에게서부터 터져 나왔다.
이 녀석…….
애초에 힘을 엄청나게 억제한 상태였잖아?
그리고.
저 반응만 보면.
아마도 내 생각이 맞는 거려나?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화력에 몸이 익을 것 같은 와중에 슬쩍 고개를 돌려 재중이 형을 보자 재중이 형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라는 거네.
<불멸> 아무래도 제대로 찍은 모양이다.
<주호> 네, 너무 정확하게 찍어서 문제죠.
압도적인 화염에 주변 대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보고는 혀를 찼다.
당장 녀석이 우릴 죽이려고 들면 이건 답도 없었다.
모든 기술을 한꺼번에 쓰면 한 일 분이라도 버틸 수 있을까?
이것도 자신이 없는데…….
후.
역린을 찍어도 너무 찍어서 녀석과 대화가 힘들 지경이 되었잖아.
발록 때문에 숨이 턱턱 타오르는 대기를 버티며 녀석에게 힘겹게 말을 꺼냈다.
이왕 긁어놓은 것 제대로 가 보자.
“너 마왕 때문에 못 나가는 거 맞아?”
그 순간.
폭발적인 기세를 내뿜던 발록이 눈빛이 더욱 시뻘겋게 변하더니 이내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냐.
사라진 게.
녀석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내 감각에는 걸렸다.
그걸 따라잡지 못하는 반응이 문제였지만.
녀석은……!
정면이다!!
얼마나 자신이 잇는지 후방도 아닌 내 바로 앞에 턱하니 나타난 녀석이 활활 타오르는 팔을 빠르게 뻗어왔다.
칫.
이건 어쩔 수 없나.
바로 르아 카르테와 테르타로스를 휘둘러 녀석의 공격을 빠르게 쳐냈다.
카아앙!!
화르르륵!!
녀석의 화염이 르아 카르테와 테르타로스에 옮겨 붙어 타오르는 것도 모자라 두 검이 동시에 뒤로 튕겨나갔다.
윽……!
이건 너무 강하잖아?
남아 있던 이성이 다 날아가 버린 것처럼 화염에 휩싸인 발록을 보면서 이를 갈았다.
화가 나면 완전 앞뒤를 안 가리는군.
“아! 진짜! 이야기는 끝까지 좀 들어!!”
그러면서 바로 스킬을 시전했다.
설마 이렇게까지 무대포일 줄 몰랐으니.
【 칠성격! 】
르아 카르테와 테르타로스에 휘감긴 칠성격의 화력을 곧장 발록에게 쏘아냈다.
콰아아앙!!
콰아앙!!
그러자 녀석의 팔을 강타한 칠성격의 위력에 발록이 잠시 뒤로 밀렸다가 곧 팔을 뻗는 자세를 뒤로 물렀다.
좋아.
말할 기회는 지금뿐이다!
곧장 녀석에게 하려고 했던 말을 꺼내들었다.
좀만 시간을 끌면 내가 더 위험하니까.
“야, 너!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냐?”
그렇게 내가 말하는 순간.
녀석이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는 내게 시뻘건 눈을 부라리면서 쳐다봤다.
녀석의 역린을 건드렸는데 저렇게 멈춘 것만 해도 정말 대단한 일이지.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다. 너, 여기서 못 나가는 거잖아.”
“이 새끼가!”
그러자 다시 녀석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거 너무 많이 건드리면 곤란하겠어.
“아아, 좀 진정하고.”
어느새 내 옆으로 재중이 형과 전사 형이 다가와 앞을 막아섰다.
여차하면 한판 떠 보겠다는 자세로.
“아, 형들도 무기 내려요. 이거 싸워서 되는 일이 아니니까.”
내가 신호를 하자 재중이 형과 전사 형이 동시에 무기를 내렸다.
그런 우리 모습을 본 발록 역시도 아직 타오르고 있지만 일단은 더 듣겠다는 태도로 바뀌면서 점점 화력이 줄어들어 갔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알고 있어. 그리고 지금 멈춘 걸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발록이 점점 화염을 거둬들이자 숨을 쉬는 것이 한결 편해졌다.
후.
호감도 시스템.
조금 정도로는 전혀 도움이 안 되잖아.
만약 내가 말한 게 아니었으면 이미 싸우고 있을 테니까.
“그래, 이제 좀 대화할 자세가 되었네.”
“말해 봐라.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날 멈춰 세웠다면 죽여 버리겠다.”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리고 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너, 여기서 못 나가는게 마왕 때문 아냐?”
“……대답할 필요는 없겠지.”
역시 정답이네.
그렇다면 이 이후로는 이야기가 정말 쉬워진다.
“아까 내가 보여 준 지도. 왜 보여 줬다고 생각해?”
그 물음에 발록이나 재중이 형, 전사 형 모두가 표정에 궁금함이 드러났다.
그리고 순간 재중이 형은 눈치를 챈 듯 말했다.
“큭, 그런 거였나? 그거면 충분하지.”
“네, 마왕이라면서요.”
하지만 발록은 이해력이 딸리는지 계속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봤다.
그런 발록을 보면서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야, 그러니까. 마왕 잡으려면 네가 거기로 가야 한다고!”
너, 이제 일 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