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7화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다 못 먹어 (5)
왜 저 녀석이 마신의 파편에 이렇게까지 집착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마신의 파편이 내 손에 있는 이상은 저 녀석과 협상할 만한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네임드인 발록과 그 협상이 될지 안 될지는 지금부터 해봐야 아는 일이고.
사실 마신의 파편인 테르타로스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제일 좋은 방법은…….
발록, 네 녀석이 내 손에 죽어 주는 방법인데.
그걸 지금 입 밖에 말했다가는 딱 죽기 좋겠지.
차마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지 못하고 녀석을 보면서 속에 있는 말과는 전혀 다른 말부터 꺼내들었다.
“그전에, 왜 마신의 파편을 원하는 거지?”
일단은 녀석의 속을 알아야 그 다음에 할 만한 일들의 진행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만약 마신의 파편이 녀석에게 주는 영향이 미미하다면 지금 그냥 몸을 빼 버리는 방법도 고려해야 했고.
테르타로스가 녀석에게 있어 큰 영향이 없다면 그만큼 이쪽을 가볍게 여길 테니 언제든지 손바닥을 뒤집고 거래를 엎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거래 상대로는 최악이지.
내 물음에 잠시 멈칫한 발록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선심 쓴다는 듯 말을 꺼내었다.
“마신의 파편은 우리가 한 단계 진화할 수 있는 최고의 보물이다.”
진화?
마신의 파편이?
그 말에 고개를 슬쩍 돌려 재중이 형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주호> 형, 이걸 패로 쓸 수 있을까요?
<불멸> 녀석이 그만큼 절실하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진화라는 게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 진화라는 게 정말 말도 되지 않게 강해지는 거라면.
당장 저 녀석과 싸우는 게 오히려 더 좋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사고도 감당이 가능한 선에서 쳐야지.
눈앞의 위기를 피하고자 지금보다 더한 괴물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후.
이것도 도박이라면 도박인가.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걸 제일 잘 벌어다 줄 수 있는 존재는 눈앞에 이 녀석이었다.
나중에 뒷감당이 문제가 되겠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어.
최고의 패를 두고도 그냥 썩히는 건.
안 그래도 어려운 길을 훨씬 돌아서 가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니까.
<주호> 형, 그냥 하죠.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불멸> 아아, 그래. 판을 확실하게 뒤집으려면 이 정도 도박은 해야겠지.
패황 연합이라는 수가 있긴 해도.
시간이 꽤 오래 지난다면 또 모를까.
당장은 겨우 평수를 이룰 뿐이었다.
발록이라는 이 패는.
우리에게는 무조건 써먹어야 하는 패다.
발록과 대치한 상태에서 테르타로스를 들어 보였다.
일단 확인부터.
“이게 너무 약해서 흡수해 봤자라는 건가?”
“그렇다. 내게는.”
확실히 지금의 테르타로스로는 레벨이 오른 발록에게 치명타를 주지 못했으니까.
녀석이 약하다고 하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발록 급 이상의 네임드를 먹어치우지 않는 이상에야 이 녀석이 마음에 찰 리가 없다는 거지.
그렇다고 테르타로스 자체를 넘겨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일이니.
다른 방법이 있다면…….
약간의 꼼수가 있겠지.
【 웨폰 카피! 】
그렇게 테르타로스와 똑같이 생긴 무기가 생성되자 발록에게 흔들어 보였다.
발록도 그 모습에 눈에 이채를 띄었고.
최초의 격돌에 내가 손에서 놓아 날아가서 파괴된 테르타로스.
이 복사본이 마신의 파편은 아니겠지만.
일단 짝퉁 정도는 된다.
과연 이 짝퉁을 녀석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그 다음 문제겠지.
그 복사본 테르타로스를 발록에게 휙 던져주었다.
착!
내가 던진 테르타로스를 아무렇지도 않고 받아든 발록이 곧 복사본에 관심을 가졌다.
“아까의 그건가.”
그리고 그 상태로 신체 전체에 불을 확 피어 올리더니 복사본 테르타로스를 녹여냈다.
복사본이라 그런지 속절없이 녹아내려 분해되더니 이내 발록의 심장을 향해 흡수가 되어갔다.
저런 식인가?
아마도 마신의 파편이라는 것 자체가 네임드의 성장에 매개체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짝퉁 마신의 파편을 흡수한 발록이 약간의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꺼내었다.
“흐음,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다라.
만족하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건 복사본 테르타로스라 하더라도 녀석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꼭 예전에 드래곤을 키우는 것 같은 기분인데?
그때도 복사본을 만들어서 계속 먹여서 키우지 않았던가.
지금은 그 대상이 발록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게다가 그때와는 달리 발록은 내 펫도 아니고.
언제든지 칼자루를 거꾸로 들고 덤빌 수 있는 녀석을 키워 줘야 한다니.
위험천만한 행동이지.
“더 만들 수 있는가?”
빙고.
녀석이 반응했다.
그리고 웃기게도.
그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지옥의 타오르는 왕, 네임드 발록과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
하, 네임드와도 호감도를 쌓을 수 있나?
생각해 보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만나자마자 죽이니 살리니 하는 사이에 그게 가능할 리가 없으니 고려조차 해보지 않았었다.
어떻게 보면 예전에 고대 드워프 왕처럼 생각하면 되려나?
그 녀석도 적이지만 호감도 시스템은 적용되었으니.
<주호> 녀석과 호감도가 쌓였어요.
<불멸> 큭, 개판인데?
네임드와 손을 잡는다라.
이건 나쁘지 않다.
그리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패가 될 수도 있고.
우리가 나서지 않더라도.
충분히 뒤에서 그림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다.
이미 녀석과는 한 판 붙어봐서 아는데.
어지간한 유저들로는 녀석에게 대미지조차 줄 수 없을 것이다.
그게 현 상태의 랭커들이라고 할지라도.
물론 최상위의 랭커라면 이야기가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저 재중이 형이 발록의 무기까지 손에 들고도 레벨이 오른 발록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이 녀석은 풀리는 순간.
정말 재앙이 된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그걸 가능하도록 해야 했다.
그러려면 이 녀석을 설득해야 해.
몇 번의 웨폰 카피를 더 해서 발록에게 복사본 테르타로스를 넘겨주자 그걸 전부 흡수해 이전과 같이 호감도가 올라갔다.
《 지옥의 타오르는 왕, 네임드 발록과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
《 지옥의 타오르는 왕, 네임드 발록과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
.
.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시스템에 변화가 생겼다.
《 지옥의 타오르는 왕, 네임드 발록과의 호감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
《 지옥의 타오르는 왕, 네임드 발록과의 호감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
.
.
그리고는 아예 시스템 메시지가 울리지 않게 되었다.
몇 번이나 먹었다고…….
이놈 완전 입맛이 고급이잖아.
그간의 펫들과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곧 녀석이 감질난다는 말투로 내게 말했다.
“이게 전부냐?”
약간의 실망감이 있는.
여차하면 화를 내려는 표정을 보이자 내가 손을 들어보였다.
“보다시피 이걸 더 성장시켜야 하는데 우리에게도 문제가 잇단 말이지.”
“문제? 무슨 문제지?”
그러자 녀석이 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부턴 내 문제가 곧 너의 문제다.
더 성장한 복사본 테르타로스를 받아먹으려면.
그렇다고 녀석이 원본인 테르타로스를 뺏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아마 이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지도.
판단력이 나쁘지 않아.
사리분별하지 못하고 덤벼들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자 곧장 녀석에게 제안을 했다.
호감도도 꽤 오른 상태이니.
아주 약빨이 안 먹히진 않을 터.
“이 마신의 파편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사냥터를 좀 써야 하는데 말이지…….”
“이 지옥의 용암 대지 말인가?”
그러자 발록이 두 팔을 펄쳐서 사방을 가리키는 포즈를 취해보였다.
마치 이 모든 대지가 다 자신의 것인 것처럼.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니긴 해.
저 녀석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 이 용암 대지에서 사냥할 수 있는 유저는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 수개월이 지나서 유저들의 레벨이 확 오르면 또 모를까.
그러면 결국 자기 땅이나 마찬가지지.
“아, 여기도 좀 쓸 수 있으면 좋긴 한데. 그보다는…….”
그때 전사 형에게 신호를 보내자 전사 형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주호> 형, 초월 쪽 연합들 전체가 독점하고 있는 사냥터 리스트 빨리 좀 뽑아 주세요.
<방패전사> 알았다. 잠시만 기다려. 자료는 이미 정리되어 있으니까 불러오기만 하면 돼.
<주호> 특히, 네임드! 네임드를 독점으로 잡고 있는 사냥터 위주로 부탁해요.
어차피 화염 지대의 네임드라고 해봐야 저 발록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발록 본인을 잡게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반대로.
지금 통제를 해서 독점으로 돌리고 있는 적들의 사냥터를 다 털어버릴 수 있다면?
적들의 자금이 나오고 네임드 아이템이 쌓여가는 구조를 단번에 박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 형이 내게 사냥터 리스트를 쫙 뽑아서 시스템으로 건네주었다.
<주호> 이렇게 많아요?
이건 뭐 지옥의 필드에 오픈 된 사냥터 중의 대부분을 초월 쪽 연합들이 다 먹어치운 형세였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네.
들어간 돈도 돈이지만.
압도적인 무력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을 해놓았다.
<방패전사> 프로 팀 애들이 선두에 서서 사냥터를 깨러 다니면 안 깨지는 곳이 없으니까. 하나씩 무너뜨린 거지.
<주호> 아, 꽤 시간이 오래 지났죠.
<방패전사> 그렇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제국이 아니야.
적들도 이런 구도를 만들기 위해 쓴 자금과 시간을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구도를.
나 혼자.
단 한 번에 깨낼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주호> 원래 통제는 깨라고 있는 거죠. 그래서 어디서부터 깨면 좋을까요?
내 물음에 전사 형이 잠시 고민을 하더니 한 곳을 찍어주었다.
<방패전사> 아무래도 여기가 제일 핵심 지역이다.
<주호> 으음? 여긴……?
<방패전사> 현재 녀석들이 어렵게 공략할 수 있는 네임드 지역 중에 가장 강한 녀석이 있는 곳. 그리고 이곳이 초월 연합에서 마왕과 전쟁하려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
<주호> 이곳 때문에요?
<방패전사> 어, 여기가 마왕의 세력권 안과 겹치거든. 이곳을 공략하려면 마왕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전사 형이 지도에 그려주는 구도를 보니 확실히 지역 간의 간섭이 심해 보였다.
딱 세력권들이 겹쳐 있는.
누가 봐도 여긴 화약고다.
잘못 건들면 바로 터지는.
<주호> 얼마나 좋은 물건이 나오길래 그렇게까지 마왕과 척을 치려는 거예요?
네임드가 아무리 강하고 좋은 아이템을 준다고 해도.
그게 마왕과 척을 칠 정도로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선뜻 나서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잘못하다가는 역풍을 맞고 확 밀려날 수도 있으니.
<방패전사> 소문으로 듣기로는 마왕을 잡을 수 있는 아이템이 있다고 하나 봐.
응?
그게 무슨 말이지?
마왕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인가?
<주호> 그런 물건이 있어요?
만약 그 정도의 물건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초월 쪽에서 저렇게 억지로라도 세력권을 넓혀서 마왕과 척을 치려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 지옥에서 최강인 마왕만 잡을 수 있으면.
그야말로 이곳의 주인이나 마찬가지니까.
잠시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뭐.
되든 안 되든.
일단 지르고 보자.
어차피 밑지는 게임은 아니니까.
곧장 고개를 돌려 발록을 향해 지도를 들어 올렸다.
그리곤 한 지역을 가리키며 말했다.
“발록, 혹시 여기 있는 녀석들 좀 쓸어 줄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