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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864화 (854/1,404)

#864화 가짜 영웅 만들기 (2)

이전에 패황이라는 녀석을 처음 봤을 때 재중이 형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자신의 아이디와 길드의 이름을 똑같이 만든 건 자신감이 넘쳐서가 아니냐고.

내 물음에 재중이 형도 그런 뉘앙스로 대답을 해주었고.

그러자 머릿속에서 한 가지 물음이 더 떠올랐다.

이 패황이라는 유저.

분명히 재중이 형 말대로 재력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만큼 자신만의 세력 역시도 가지고 있었고.

거기다 이미 견고하게 유적지도 차지한 상태.

본거지.

자금.

세력.

무엇 하나 부족할 것이 없어.

딱 하나 걸리는 점이 있다면 소속된 유저들의 실력이랄까.

그런데 이것도 어느 정도는 충족되어 있었다.

이전에 녀석의 레이드를 방해하면서 연합에 소속된 유저들의 실력을 대략적으로 확인했으니까.

어디 가도 꿀릴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지.

이건 아마도 패황 연합을 처음부터 작정하고 만들었다는 말인데…….

그런 연합의 장인 패황이 겨우 다른 연합의 따까리 노릇을 하고 있다?

내가 보기엔 이 패황 연합은 누군가의 뒤처리를 하기 위해 만든 연합은 절대 아니었다.

들어간 자금이나 아이템도 그렇고.

최소한.

한 지역의 패자 정도는 될 수준의 세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정작 지금 패황의 위치는 굉장히 애매하다고 해야 할까.

일견 남들이 생각하기에는 거의 초월 쪽 연합의 하수인처럼 느껴질 정도로 몸을 바싹 낮춘 상태였다.

패황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물론 초월 쪽 연합들이 강하기는 했다.

프로게이머 한 명이 나서면 일반 유저 몇 명은 그냥 쓸어버리니까.

그런 프로게이머가 즐비한 곳이 바로 초월과 그 연합들이었다.

평범하게 해서는 상대가 안 되겠지.

내가 없는 동안 우리 편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도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당시에 재중이 형도 녀석들에게 시간과 자원만 쥐어 주면 금방 치고 올라올 거라고 했었으니까.

그리고 그 말이 예언이나 되듯 그대로 일어나게 되었다.

지금은 거의 저 녀석들의 천하라고 할까.

이런 분위기에서 패황이 할 수 있는 건…….

선택지가 굉장히 좁혀지게 된다.

녀석들을 완전히 밀어내던가.

혹은 피 터지게 싸우던가.

그나마 나은 선택지는 적당히 중립을 유지하는 건데.

아마도 패황은 일단 녀석들과 싸우는 쪽은 미뤄 둔 모양이었다.

만약 이전에 싸움을 했더라면.

이미 패황의 세력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서 사라지고 말았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 패황이라는 유저는.

참을성이 엄청나다고 생각되었다.

예전에 해원에 비하면 정말 극과 극이랄까.

조금만 도발하면 바로 정신줄을 놓고 덤벼들던 그 녀석하고는 그냥 인종부터가 다른 느낌이었다.

심지어 머리까지 좋아.

가지고 있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겠지.

순간의 굴욕이 있더라도.

마지막에는 치고 나갈 수 있는 그런 유저.

“제가 보기엔 이 패황이라는 유저. 그냥 돈만 많은 평범한 유저는 아닌 것 같아요.”

“잘 봤네. 그 녀석 완전히 야심가라니까?”

재중이 형이 피식 웃으면서 말하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차라리 잘됐죠. 패황이 그냥 어중이떠중이였으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무리 세력을 밀어줘 봐야.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도 없었다.

쓸데없이 시간과 자원만 날리는 셈이지.

“흐음, 확실히 이 녀석은 간판으로 세우기엔 나쁘진 않아. 지금 가능성이 있는 유저들 중에서는 가장 앞서 있달까. 거기다 조금 더 힘을 불어넣어 주면 녀석들과 대적할 아주 좋은 몸빵이 되겠지.”

“몸빵…….”

“어, 너도 그러려고 말한 거 아니었어?”

그리곤 재중이 형이 씨익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클 시간이 필요한 거잖아.”

“네, 정말 다 아시네요.”

“그리고 이목을 숨길 필요도 있고.”

일종의 연막이랄까.

재중이 형 말대로 모든 시선을 패황으로 돌려놓고.

그사이 최대한 세력을 키워놔야 한다.

앞으로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기 위해.

솔직히 단순히 녀석들끼리 싸움만 붙여 세력을 줄일 생각이었다면.

여기서 그냥 양쪽을 조금만 더 긁어 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어떻게든 양 연합이 싸우다가 괴멸하거나 혹은 양쪽 모두 피해를 입고 손해를 볼 테니까.

이건 거의 집안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최악의 전쟁이라고 봐야겠지.

물론 상대방의 세력을 흡수하거나 사냥터를 뺏고 유적지를 탐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상대의 반발에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될 건 뻔한 일이었고.

그렇게 싸워만 줘도 나쁘진 않지만.

이건 굳이 말하자면 플랜 C쯤 될까.

결과가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은.

그런 싸움이 될 터였다.

단순하게 둘이 치고받는 정도로는 안 돼.

좀 더 크게.

최소한 지금보다는 훨씬 규모가 커져야 했다.

양쪽이 한 발만 물러서면 낭떠러지도 떨어진다고 생각하게끔.

없던 힘도 다 쥐어짤 수 있게.

그러려면.

패황이 정말 더 커져야 해.

“아까 네가 말했지? 패황을 서버의 영웅으로 만들자고.”

“네, 그랬죠. 아무래도 초월 쪽 연합들에게 대적을 하려면 패황 혼자만으로는 안 될 거예요. 그래서 세력을 더 붙여 줄 필요가 있어요.”

“뭐 그 말에는 나도 동감이다. 지금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어떻게 붙여 줄 생각이지?”

“음, 일단 생각하고 있는 건, 초월 녀석들의 가장 아픈 약점이죠.”

“약점이라…….”

“네, 꽤 의외라고 생각할 순 있겠지만. 녀석들이 급하게 컸잖아요.”

“그런 점은 있지.”

“그러면서 가장 먼저 한 게 뭘까요?”

내 물음에 재중이 형이 내 의도를 파악한 듯 바로 대답했다.

“네임드 장악, 그리고 통제 정도이려나? 뭐 자잘한 것들도 있겠지만 핵심은 그거지.”

“네, 정확해요. 그리고 그만큼 유저들 불만이 최대치에 쌓여있을 거예요.”

“호오, 그 점을 파고들겠다?”

“하나면 계란으로 바위치기지만, 만약 같은 생각을 가진 녀석들이 수도 없이 많다면요?”

“하지만 단순히 숫자만 많다고 해결되진 않아. 쪽수만 많아 봐야 어차피 금방 부서져.”

“네, 그래서 구심점이 필요해요. 그 불만 가득 쌓인 유저들을 한 자리에 모아줄 수 있는 딱 그런 용도의.”

그리고는 나와 재중이 형이 눈을 마주보면서 말했다.

“반 통제 연합.”

“반 통제 연합.”

재중이 형도 나와 똑같은 결론을 내는 것을 보고는 같이 미소 지었다.

“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패황이라면…….”

“이 감투를 마다하지 않겠지.”

“전 서버의 시선이 패황에게 몰릴 거니까요. 그것도 상당히 호의적인 시선으로요.”

“그래, 지금의 패황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시선일 거다.”

이건 패황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그렇게 시곗바늘은 흘러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패황은 좋든 싫든.

무조건 우리가 씌워 준 감투를 쓰고 전면에 나서야 하고.

잠시 고민을 하던 재중이 형이 뭔가가 생각난 듯 말했다.

“보자…… 큰 그림은 네가 짜왔으니까. 내가 색칠 공부를 좀 해볼까?”

“색칠 공부요?”

“어, 밑그림은 좋은데 영 중간이 부실해서 말이지. 당장 어떻게 세력을 몰아줄 건데?”

“으음…… 그건 생각을 좀 해 봐야죠.”

“그냥 패황을 지지하라고 해 봐야 아무도 모이지 않아.”

“네, 그건 알고 있죠. 이제부터 포섭해 보면…….”

방향은 정해졌으니 계획을 만드는 건 이제부터 해야 한다.

하지만 재중이 형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면 너무 늦어. 당장 녀석들이 협상 테이블에 앉아서 대화만 해 봐도 중간에 누군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건 알게 될 거다.”

“정체를 그렇게 숨겼는데 말이에요?”

“어, 녀석들이 바보들은 아니니까. 레이드 하던 몇 개의 영상을 서로 공유해서 비교해 보면 바로 답이 나올걸? 뭐 확신은 못 하겠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손에 놀아난다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흐음. 그런 곤란한데요.”

“그러니까.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틈이 벌어졌을 때 바로 찢어놔야 해. 설사 녀석들이 눈치를 채더라도 어떻게 수습할 수 없을 만큼.”

“그럴 수 있어요?”

“뭐, 썩 선호하는 방법은 아니긴 한데.”

그러더니 재중이 형이 몇 가지를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없어 즉석에서 나온 계획치고는 굉장히 좋은데?

“형은 다 계획이 있네요.”

“임시방편이지.”

그런데 재중이 형의 작전을 실행하기 전에 파악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일단 상황을 봐야겠죠?”

“어, 당장 녀석들끼리 붙어 버리면 하나 마나한 일이니까.”

하지만 재중이 형은 그렇게 걱정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귀한 장기 말이 달려가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걱정 안 돼요?”

“뭐…… 둘 다 절대 붙지 않는다에 오늘 저녁을 걸도록 하지.”

그리고는 게시판과 채팅창의 상황을 살펴보았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패황 연합과 페가수스 연합이 한판 붙었다는 글귀는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

“정말 무섭게 몸을 사리네요.”

“양쪽 다 체급이 크니까. 그냥 하루 도발 좀 했다고 막 치고받지를 못해. 그리고 일단 시작하면 정말 끝을 봐야 할지도 모르거든.”

그 소리는 페가수스가 당장은 패황 연합을 집어삼킬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아마 며칠 더 지나면 뭔가 반응이 오긴 하겠지. 어쨌거나 상대에 대한 도발이니까.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에는 각 연합장들의 입장도 있고.”

“역시 얻어맞고 왔는데 그냥 모른 척할 순 없겠죠?”

“어, 그러면 밑에 사람들에게 얕보이게 돼. 연합장은 휘하의 길드들을 대표하는 입장이니까. 만약 그런 식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 버리면 나중에 입지가 곤란해진다. 패황이나 명궁은 그 상황을 피하고 싶을 거야.”

“그러면요?”

“사과와 함께 보상을 먼저 이야기할 거다. 연합원들이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예를 들어, 패황이 가진 리빙아머 킹의 스킬북을 내놓던가. 혹은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겠지. 아라크네 로드의 아이템을 요구할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그냥 싸우자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그럴지도? 뭐 적정한 선에서 서로 양보를 하고 끝날 수도 있고. 전에 말했듯이 지금 초월 쪽 연합이 끼어들지 못하는 건 마왕과의 일전이 있으니까. 절대 여기서 둘이 싸우게 두진 않을 거야. 그때는 명궁의 얼굴에 먹칠을 하더라도 중간에 끼어들겠지.”

“명궁이 굉장히 싫어하겠네요.”

그 모습을 보는 것도 굉장히 재밌긴 하겠네.

하지만 초월이 끼어든다는 건 우리에게는 그다지 유익한 정보는 아니었다.

판이 커지는 건 좋지만.

한쪽으로 무게 추가 너무 기울어 버리니까.

잠시 웃음을 지던 재중이 형이 나를 보면 짓궂게 말했다.

“그러니까, 일단 좀 죽이고 보자.”

“네?”

갑자기?

그리고 누굴 죽이자는 거지?

당장 생각나는 건 두 곳밖에 없는데.

“패황 쪽 유저들인가요? 아님, 페가수스?”

죽이는 거야 자신 있긴 한데.

이전에 말했듯.

여기서 몇 더 죽인다고 쉽게 움직일 것 같진 않았다.

무려 네임드를 훔쳤는데도 안 움직이는 판에.

“아니, 둘 다 아니야.”

“그럼?”

“일반 유저들.”

“네?”

황당해하는 내 표정에 재중이 형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영웅이 나타나려면. 나쁜 놈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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