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5화 불신의 연합 (7)
주력인 패황 길드와 휘하의 연합 녀석들이 중앙 광장에 자리를 잡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유적지 위로 하늘이 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유적지가 어둠으로 물들어 가는 동시에 중앙 광장 가운데서 불길하고 끈적거리는 검은 마법진이 생성되면서 주변으로 압력을 뿜어내었다.
드디어 시작되는 건가?
이미 상관이 없는 유저들은 모두 빠져나간 상태.
아마도 패황 길드 쪽에서 이 시간대에는 누구도 접근 못 하게끔 미리 준비해 둔 모습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준비가 될 리가 없으니.
그리고 그런 모습에서 굉장히 이질감을 느꼈다.
유적지 한가운데서 네임드가 나타나는데 아무도 방해하는 사람이 없다니.
예전과 비교해 보면 정말 평화롭기까지 한 모습이라고 할까.
<노아01> 생각보다 너무 쉽게 네임드를 차지했네요.
<노아02> 뭐, 여기서는 패황 길드가 갑이니까. 다른 길드 유저들이 방해를 하려고 해도 유적지에서 쫓아내기라도 하면 곤란하겠지.
<노아01> 녀석들을 방해할 만한 비슷한 세력은 더 없어요?
<노아02> 있어도 쉽게 힘을 행사하진 못할걸?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 녀석들 뒤에 초월 길드와 그 연합군이 있으니까.
<노아01> 보복이 두렵다 뭐 이런 거네요.
<노아02> 그렇겠지. 그리고 딱히 초월 쪽 연합이 아니라고 해도. 이 녀석들 생각보다 세력이 강하니까. 쉽게 건드릴 수는 없을 거다.
확실히 재중이 형 말대로 패황 길드 쪽 연합도 세력이 꽤 강해 보였다.
숫자도 많아 보이고.
얼핏 보이는 길드 깃발만 십여 개.
거기다 모인 길드원들 역시도 상당히 있어 보이는 화려한 아이템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지금 저 아이템들이 얼마나 높은 등급인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아까 자리를 물러났던 유저들보다는 좋아 보이긴 했어.
이 연합에 꽤 공을 들였다는 게 그냥 눈으로만 봐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좀 특이한 점은 길드 이름과 길드장의 아이디가 같다는 것이다.
<노아01> 길드 이름과 똑같이 하다니. 정말 어지간히 자신 있나 봐요.
<노아02> 패황?
<노아01> 네, 보통은 길드 이름은 다르게 짓잖아요.
길드 이름을 지켜낼 자신이 없으면 하지 않을 일이기도 하고.
하루에도 전투로 수 개의 길드들의 이름이 사라졌다 생기는 판이니.
거기다 예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길드 이름이라.
내가 없는 중간에 새로 생겼다는 건데.
그럼에도 이 정도 수준의 연합을 만들었다는 것은 엄청난 자금이 들어가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노아02> 저 녀석 돈 많다니까 그러네.
<노아01> 정말 그래 보여요.
중앙 광장에서 좀 떨어진 건물 지붕 위에 몰래 숨어 녀석들을 지켜보는 중에 드디어 마법진이 열리며 뭔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크어어어어!!
“나온다!!”
“전부 준비해!!”
“라인 제대로 짜!”
“거기, 뒤로 더 안 빠져? 마법진 코앞이잖아!”
“보조 탱들은 리빙 아머 나이트들에게 미리 붙어.”
“궁수, 마법사들은 나이트들부터 원거리에서 먼저 녹이고.”
리빙아머 킹.
이 녀석 역시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네임드 몬스터였다.
아마 예전에 네임드 목록에서 한 번 본 것 같기는 한데 워낙 오래된 일이라.
회색의 갑주가 바닥에서부터 서서히 그 신형을 드러내면서 마법진을 통해 지상으로 소환되는 동시에 갑주들의 틈 사이로 푸른 불꽃이 확 피어올라 갑주의 전신으로 흘러넘쳤다.
어두운 유적지에서 오직 녀석만이 강렬한 푸른 불꽃으로 빛나며 그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다.
누가 봐도 저건 정말 강해 보이겠는데?
그리고 특이한 것도 하나 발견했다.
<노아01> 어? 저 녀석…… 속이 비었네요?
단단한 갑주는 있는데 그 속에 아무것도 없는.
속이 텅 빈 모습을 보고는 의아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유령 같은 네임드이려나?
하지만 팬텀 나이트도 좀 흐릿하긴 해도 확실히 신체는 있었는데?
아마 같은 유령 계열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노아02> 어, 저건 유령 계열의 네임드가 아니야. 저 갑옷 자체가 네임드다.
<노아01> 네? 갑옷이요?
<노아02> 어, 애초에 안에 아무것도 없는 게 본체가 아예 갑옷이다. 다른 건 하나도 없어.
전부 갑옷이라.
순간 리빙아머 킹과 나와의 상성을 연상해 보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 끝에 눈이 찡그러졌다.
저건…….
아마 나와 상성이 최악이려나.
<노아01> 흠, 그럼 정말 공략하기 어렵겠는데요? 특히 전 더 어려울 것 같기도 해요.
<노아02> 아아, 뭐 그럴 수도 있겠네. 네 스타일하고는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라.
재중이 형도 내 생각에 반대를 하진 않았다.
그건 내 말이 맞다는 뜻이기도 했고.
저 녀석.
정말 나와는 안 맞겠는데.
<노아02> 넌 상대의 약점이나 방어가 취약한 부분에 크리티컬을 넣어 최대한 대미지를 터트리는 스타일이니까 저 녀석과는 상성이 안 좋을 거야.
<노아01> 네, 확실히 그렇겠네요.
내가 그동안 민첩에 투자를 많이 한 이유도 빠른 움직임과 세세한 컨트롤으로 보다 민첩하게 움직여 약점을 공략하려는 의미가 컸다.
실제로 그런 스타일이 내게 더 맞기도 했고.
일단 단순하게 대미지를 주기 위해서는 힘을 많이 올리는 게 최고였다.
하지만 그렇게 대미지를 더 주고자 힘을 올려 묵직하게 움직이는 건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많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라.
그리고 민첩을 올린다고 대미지가 확 줄어드는 것은 또 아니었다.
충분한 가속을 낼 수만 있으면 어느 정도 부족한 대미지를 상쇄시킬 수 있었다.
거기다 한 발 더 나아가 크리티컬을 넣을 수 있으면 오히려 대미지를 더 폭발시킬 수도 있고.
개인 컨트롤 여하에 따라서 굉장히 낙폭이 큰 스타일이라고 할까.
문제는.
저 녀석에게는 그런 스타일이 쥐약이라는 점이다.
애초에 약점이라고 할 만한 곳이 하나도 없으니까.
재중이 형 말대로 갑옷 그 자체가 본체라면.
어디를 치던지 대미지가 일정하게 들어가게 된다.
한마디로.
내가 대미지를 증폭시킬 만한 그 어떤 행동을 해도 저 녀석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순수하게 힘이 강하거나.
혹은 마법사들이 지력이 높거나.
그리고 자체 대미지가 높은 스킬과.
무기 자체의 공격력이 높아야 녀석에게 제대로 된 대미지를 줄 수 있을 터.
거기다 단순히 봐도 갑옷 자체가 본체면.
물리 공격이 거의 통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갑옷이라는 물건은 방어력이 원래 높으니까.
심지어 네임드라면 일반적인 갑옷들보다 방어력이 훨씬 높다고 봐야 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노아01> 형, 저 녀석. 물리 공격 잘 안 들어가겠죠?
<노아02> 어, 잘 아네. 거의 안 통하지. 웬만한 무기는 그냥 다 튕겨 나온다니까?
역시.
예상했던 게 맞았다.
<노아01> 휴, 저랑 진짜 안 맞네요. 그러면 역시 마법사들 위주로 레이드를 해야 할까요? 그렇게 하는 게 훨씬 수월해 보이는데.
아까는 잘 몰랐는데 지금 패황 쪽 연합 녀석들을 살펴보니 이전에 혹한의 얼음 여왕을 상대할 때와는 그 구성이 사뭇 달라 보였다.
얼음 여왕과 싸울 때는 근접 물리 유저들이 꽤 많았는데 그와 반대로 지금은 마법 계열이 좀 더 비율이 높았다.
그 말은 곧 저 리빙아머 킹이 마법에 취약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하지만 재중이 형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해주었다.
<노아02> 보통은 그렇지. 그런데 저 리빙아머 킹은 마법 저항도 엄청나게 높아.
<노아01> 그래요?
<노아02> 저거 완전 마법 갑옷이라니까? 갑옷들 틈 사이로 중간에 새어 나오는 저 푸른 불꽃, 저게 다른 마법들을 전부 씹어먹어 버리거든. 어찌나 마법 저항이 높은지 일정 등급 이하 마법은 아예 무시해 버려.
<노아01> 하, 어지간히 돈을 들이붓지 않고는 못 잡겠어요.
<노아02> 크큭, 저거 완전히 돈 먹는 하마야. 나오는 아이템이 워낙 좋아서 잡는 거지, 아니면 전부 손을 놓았을 거다.
물리 방어도 강한데 심지어 마법 저항도 강하다.
일정 이하의 공격은 무시.
유저들 입장에서 유의미한 대미지를 내기 위해서는 장비 등급이 엄청나게 높아야 한다는 말이고.
같은 네임드 아이템 수준으로.
혹은 무기 강화가 아주 잘 되어 있거나.
그리고 그 말을 드는 순간.
다시 중앙에서 탱킹을 준비하는 패황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입고 있는 갑옷.
그게 딱 지금의 리빙아머 킹을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으니까.
얼음 여왕을 상대할 때는 그냥 좀 좋겠거니 했던 방어구로 보였다면.
지금은 저 방어구가 얼마나 좋은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노아01> 패황 저 녀석이 입고 있는 갑옷이 리빙아머 킹을 잡고 나온 거죠?
<노아02> 뭐 좀 다르긴 한데. 유적지 자체에서 나온 아이템이라. 아무튼 덕분에 녀석들의 등급에서 한 끗발씩 모자라는 고렙 네임드도 잡을 수 있게 된 거야. 저 녀석이 중앙에서 탱킹이 가능해지니까.
<노아01> 듣고 보니 더 탐나네요. 저거 전사 형 가져다주면 진짜 좋아할 것 같은데.
<노아02> 흠, 저거 하나가 빌딩 몇 개 값은 할 건데?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노아01> 전사 형이 더 굴러야겠네요.
<노아02> 크큭, 저거 받으면 평생 굴러야지. 죽을 때까지.
재중이 형이 그렇게 말할 만큼이나 현 상황에서는 최강의 방어구였다.
물론 내가 쓰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였다.
일단 갑옷 자체가 방어에 특화되어 있는 물건이라 그런지 형태가 풀 풀레이트 갑옷을 넘어 좀 웅장하고 둔탁한 느낌까지 드는 물건이었다.
거기다 패황이라는 녀석이 움직일 때 바닥이 푹 파이는 걸 봐서는 무게 역시 상당한 듯했고.
역시 저건 탱커용 아이템이겠지.
흠.
어떻게 못 뺏어오려나?
꼭 그게 아니라 해도 어디선가 같은 물건을 구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패황 패거리들이 레이드를 하는 모습을 쭉 지켜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남들의 레이드 장면을 지켜보는 모습은 꽤 재밌기도 했고.
패황 길드의 전력이나 스타일.
인원 구성과 배치.
그리고 레이드의 주력이 누구인지.
재중이 형이 옆에서 보면서 하나둘 설명을 해주자 점점 눈에 익어 가기 시작했다.
거기다 네임드의 특성과 쓰는 스킬과 공격 패턴 등도 동시에 머릿속에 새겨졌다.
이렇게 봐두면 다음이 편하겠지.
그런데 그때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이 레이드를 지켜보는 게 우리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노아01> 음. 주변에 눈이 많네요.
<노아02> 뭐, 참가나 방해는 못 해도 멀리서 지켜볼 수는 있으니까. 개인 방송으로 나온 애들도 있을 테고.
고렙의 네임드를 레이드하는 방송은 다른 방송에 비해 꽤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지금처럼 특히 유적지 안에서 전투가 벌어질 때는 지켜볼 수 있는 장소가 많아서 더 찍기 수월했고.
특히 유적지 안이라 네임드에게 죽어 버려도 바로 근처 포탈에서 부활을 해 돌아오면 된다.
그리고 그런 특수 상황을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은 저 패황 연합이었다.
전력이 좀 부족해도.
어지간해서는 밀리진 않겠지.
당연하게도 멀리 원정을 나가야 했던 얼음 여왕 때보다 지금이 레이드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켜보는 유저들 역시 무난하게 구경 중이고.
<노아01> 괜찮을까요?
<노아02> 뭐, 어차피 은신에 하이딩 페이스를 쓰고 있어서 신경 안 써도 돼.
혹여나 방송으로 정체가 드러날까 해서 물어보았는데 딱히 그럴 것 같진 않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초반과 중반에는 리빙아머 킹보다는 주변에 같이 생성되는 리빙아머 킹의 부하들이 더 문제였다.
비슷한 갑옷들이 연이어 소환되면서 레이드가 복잡하게 이어졌으니.
그리고 그에 발맞춰 연합원들도 몇 갈래로 나눠 각자 소환된 리빙아머들을 따로 레이드하는 모습을 보였다.
<노아01> 숫자가 많지 않으면 힘들겠어.
<노아02> 어, 아무래도 그렇지. 거기다 빨리 처리 못 하면 숫자가 계속 늘어나니 더 힘들어져.
그런 식으로 한참 동안 레이드가 이어져 가던 중 곧 리빙아머 킹의 페이스가 막바지로 넘어가면서 점점 레이드가 치열하게 변해갔다.
리빙아머 킹이 가장 강한 시기에다가 리빙아머 킹을 레벨업시키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죽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유저들의 처절한 사투도 이어졌다.
지금에 와서 리빙아머 킹의 체력을 채워 줬다가는 그냥 망한 레이드가 될 테니까.
“조금만 더!”
“이제 곧 끝이다!”
“더 죽으면 안 돼! 체력 없는 놈들 그냥 빠져! 어차피 마지막이야!”
“탱커들 체력 관리 제대로 하고!”
“전체 힐 돌려!”
“절대 죽지 마!”
“이번엔 제발 방어구 나와라!”
정말 끝나 가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재중이 형에게 말했다.
<노아01> 형, 네임드 수거하러 갔다 올게요.
실컷 싸워라.
어차피 그 녀석은 내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