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3화 불신의 연합 (5)
연기가 괜찮았냐는 말에 어이없다는 듯 날 바라보는 재중이 형을 마주 보고는 그저 웃어 버렸다.
“역시, 좀 그랬죠?”
한다고 열심히 하기는 했는데 영 아니었나 보네.
“아냐, 그럭저럭 나쁘진 않았어.”
별로였군.
어깨를 으쓱하면서 웃음을 참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알겠다.
“처음 하는 것치고는 잘 했어.”
“흐음, 그래요?”
“어, 너무 완벽하게 해도 의심을 살 테니까. 적당한 느낌 정도?”
“과연 속아 줄까요?”
“음, 아무래도 반반?”
“속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거네요.”
“일단 떡밥은 확실히 보여 줬는데 말이야.”
그 떡밥은 초월 길드에서만 가지고 있는 스킬을 내가 썼다는 것이다.
재중이 형의 말을 들어보면 초월 쪽에서 중요 스킬들을 다른 곳으로는 함부로 내돌리지 않는 것으로 보이니까.
그리고 그런 사실은 방금 전의 적들에게서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단지 트리플 템페스트를 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특정 인물을 지정했었으니.
이 정도만 해도 떡밥으로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저쪽 적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은…….
이걸 과연 속아 줄 수 있을까?
“일단은…… 이쪽 정체가 너무 쉽게 드러났다는 거지.”
“그게 문제가 되나요?”
“뭐, 문제라고 하면 문제겠지. 넌 보통 남들 기습할 때 내가 누구다~!! 외치면서 공격하냐?”
“……아마 아니겠죠?”
당연히 나만 해도 적들을 치면서 최대한 내 정체를 숨기고 눈치챌 만한 움직임을 보여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이었다.
굳이 긁어서 부스럼 나는 일을 만들지도 않았고.
괜히 입을 털다가 시간이 끌리거나 제대로 된 타이밍에 공격을 하지 못하면 그게 더 문제지.
물론 예외적인 상황도 있기는 했다.
예를 들어 시간을 끌어야 한다던가.
혹은 전력이 부족해서 어떻게든 살길을 모색할 때 한 번쯤 해볼 만한 일이긴 해도.
대놓고 이런 식으로 정체를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반대로 지금은 아예 날 보라는 식으로 정체를 보여줬으니.
적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의아할 수가 있는 부분이다.
“방금 죽은 녀석들 모두 처음에야 정신이 없으니까 가서 자기들이 본 걸 그대로 보고하겠지. 초월 쪽 유저들이 와서 자기들을 죽였다고. 흠, 어쩌면 좀 더 과장했을 수도 있겠다.”
“과장요?”
“고작 두 명에게 몰살당했잖아. 그럼 넌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 같냐? 주변에는 자기들을 보는 같은 아군들이 많은데 유저 둘에게 쪽팔리게 깨지고 온 걸 상급자에게 말해야 할 때.”
재중이 형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다 말했다.
“전 그런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
“크큭, 이놈 봐라. 아주 자신감이 넘쳐흐르는데?”
솔직히 우르르 몰려가서 누군가에게 깨지고 돌아온 일은 한 번도 없어서 말이지.
그게 네임드라면 이야기가 다르긴 하겠지만.
같은 유저들 상대로 내 쪽이 이기면 이긴 거지 밀려서 죽거나 하진 않았다.
뭐 재중이 형이 이런 말을 듣고자 내게 물어본 건 아닐 것이다.
그럼 그 상황에서 생각해볼 만한 일들은…….
곧 머리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음 제가 그래도 굳이 그 상황에서 보고를 해야 한다면…….”
“한다면?”
“아마도 숫자를 속이겠죠.”
“오,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데?”
“그냥. 제가 그 상황이면 어땠을까 생각했어요. 깨지고 온 건 쪽팔리는 일이니까. 그것도 단둘에게. 당연히 이겼다고는 못 할 테고……. 그럼 남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죠. 반대로 적들의 숫자를 불리는 것.”
“그래. 아마 십중팔구는 녀석들이 입 모아서 하나의 사실을 만들어냈을 거야. 예상과 다르게 적들이 엄청난 규모였다 정도?”
“네, 그렇게 말해야 자신들이 죽어 나간 게 설명이 되니까요.”
실제로 적들이 보기에 최소 둘셋은 넘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나와 재중이 형.
그리고 마법을 쓰는 또 다른 캐릭이 한 명 더 추가된다.
거기다 좀 더 덧붙이면…….
아니지.
좀 살을 확 붙여서.
길드 두어 개 정도가 왔었다?
한 길드의 정찰대를 순식간에 박살 낼 정도로 감당 못 할 숫자였다?
이런 말들이 오가지 않았을까.
“굳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고.”
무능하지 않게 보이기 위해 정확한 수치를 전혀 다른 수치로 조작한다라…….
꼭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 같네.
그 뒤로 재중이 형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우르르 몰려와서 죽었다고 하면 베스트. 이건 대놓고 초월 길드가 이쪽 연합을 깔아뭉개기 위해서 온 거니까. 하지만 만약 그런 식으로 보고하지 않고 정확하게 이야기했다고 쳐도 최소한 초월 길드의 간부급 유저들이 왔었다 정도는 될 거야.”
“어떻게 하든 초월과 역을 수가 있다는 거네요.”
“그런 셈이지. 네 테르타로스 덕분에 일이 아주 쉬워졌어.”
“네, 비싼 값 하는 중이죠.”
“그래, 아무튼. 이렇게 되면 녀석들의 생각이 몇 가지로 나눠지게 되어 있어.”
“어떤 식으로요?”
“첫째는 정말 초월이 자기들을 치기 위해 움직였다. 이건 녀석들이 몰래 준비해 온 과정을 생각해보면 언제든지 일어날 만 일일 수도 있어.”
“초월 쪽 연합을 뒤집는 것 말이죠?”
“그렇지. 정보가 어떻게든 샜다면…….”
“확실히 제가 초월이라고 하면 그냥 놔두지 않겠죠.”
그러더니 재중이 형이 조금은 다른 말을 했다.
“둘째가 문제인데……. 녀석들 중에 머리를 좀 쓸 줄 아는 녀석이 있다면. 지금 상황이 정상적이진 않다는 걸 알 거다.”
“어째서죠?”
“만약에 초월이 알았다고 해. 그럼 지금처럼 소극적으로 유저 몇몇을 죽이는 걸로 끝을 낼까? 굳이 귀찮게 레이드를 방해하면서까지?”
“확실히 이상하게 생각하겠네요.”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 봐도 초월 쪽에 붙어 있는 연합의 규모가 저 녀석들보다는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모두 우수할 것이다.
그러니까 세력을 더 모으니 어쩌니 그런 말을 하겠지.
당연히 초월 쪽에서는 전력을 기울이면 이쪽을 누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는 안 돼. 초월 쪽에서도 꽤 힘을 써야 하거든.”
재중이 형의 그 말에 뭔가가 생각나서 물어보았다.
“혹시 지금 초월에서 전력을 못 내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도 이쪽 적들이 모두 알 만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누를 수 있는 상대를 쉽게 건들지 못하는 상황이라…….
그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어, 있어. 걔들. 지금 마왕 하나와 전쟁 중이거든.”
“그래요?”
이건 처음 듣는 말인데.
아니지.
그동안은 귀를 닫고 아예 신경도 안 썼으니까 당연히 모를 수밖에.
“아직 완전히 치고받는 단계는 아니지만. 서서히 서로의 세력권이 부딪히는 지경에 왔거든.”
“벌써 그렇게 큰 건가요?”
“어, 뭐. 이쪽은 일단 거대 연합이니까. 그리고 레벨 대가 많이 올라간 것도 있고. 네임드 템을 저렇게 상납 받는 것도 단순히 돈 때문은 아니야. 돈이라면 이미 넘치도록 벌어들이고 있을 테니.”
“그건 역시 마왕을 치기 위해?”
“그래. 하위 마왕이긴 해도, 마왕은 마왕이다. 그것도 마왕성을 가지고 있는.”
“어떻게 보면 대단하네요.”
예전에 마왕을 바로 옆에서 두고 봤기에 마왕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심지어 최상위 마왕들하고 거래까지 했었고.
그때 당시는 마왕이 손가락만 눌러도 유저들은 죄다 몰살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마왕과 영역 싸움을 할 정도로 컸다니.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났구나.
“뭔가 굉장히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네가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
그리고는 재중이 형이 말이 이었다.
“그런 이유로 녀석들은 함부로 세력을 분리하지 못해. 저 녀석들을 치는 일은 어떻게 보면 내부 분열이나 마찬가지야.”
“세력이 쪼개진다는 말이죠?”
“그래, 그럼 마왕에게 바로 밀리게 된다.”
지금 마왕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건 아마 저 녀석들까지 모두 포함해 거대한 세력을 믿고 붙을 예정이었겠지.
그런데 이 와중에 전력이 반토막이 난다?
정말 이렇게 되면 재중이 형이 말한 대로 마왕과는 전투조차 해보지 못하고 밀려나게 될 것이다.
“혹시 그런 사실을 저 녀석들도 알고 있어요?”
“물론 알겠지. 그래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고.”
그리고 그런 말들을 모두 들어보면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른다.
“적들이 착각할 수도 있겠네요.”
“호오, 거기까지 이해했나?”
“네, 그러니까 지금 초월에서 경고를 하러 온 셈이 되는 거죠.”
“빙고. 저쪽에서 보면 소수의 정예들만 보내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하는 걸로 보일 수도 있어.”
하긴.
어떻게 생각해보더라도 지금은 초월에서 개입을 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것도 경거망동하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는.
이렇게 되면 적들의 움직임이 확실히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잘못하면 이대로 전면전에 나서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
“뭐, 이건 다른 경우이긴 한데. 누군가 초월과 저들을 이간질하기 위해서 움직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네, 솔직히 그쪽이 제일 문제죠.”
전혀 알 수 없는 제3의 인물이 개입하는 시나리오.
하지만 테르타로스 덕분에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됐다.
“아마 그렇게는 생각 안 할 것 같아요.”
당연히 초월이라 생각해 버리니까.
나나 재중이 형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조차 못하게 될 것이다.
잠시 생각을 하던 재중이 형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보자, 여기서 좀 더 장난을 쳐봐야 할 것 같은데.”
이 형.
지금 내 생각보다 꽤 멀리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장난이라는 말에.
나 역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형, 완전히 저들을 갈라놓을 생각인가 보네요.”
“어, 처음에는 적당히 네임드 좀 빼먹고 말 생각이었는데. 이젠 그걸로는 만족 못 하겠다. 그리고 마침 녀석들의 세력을 쪼개 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
단순히 지금의 상황을 넘기고 끝낼 생각이 아니라.
1서버 전체의 세력 구도판을 다 뒤집어놓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거 마음에 드네요. 그래서 이젠 뭘 하면 되죠?”
“음, 보자. 일단은 말이지. 어차피 여기서 얻을 건 다 얻었으니까…….”
곧 재중이 형이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어, 그래. 뭐 좀 알아봐 줬으면 좋겠는데? 자세한 내용은 편지로 보내지.”
그다음 편지에 세세한 설명이 적고는 시스템 메일을 통해 누군가에게 보냈다.
“음? 좀 걸린다고? 알았어. 기다리고 있지.”
정보원 같은 건가?
아니면 길드원?
혹시 전사 형인가?
아니지.
우리 팀은 접속을 안 했을 건데.
사장님에게 저렇게 말하진 않을 테고.
“누구예요?”
“아, 있어. 그리고 너도 한 번은 봤겠다.”
내가 한 번은 본 사람?
누구지?
스쳐 지나가듯 본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일일이 기억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재중이 형이 굳이 그런 사람들을 언급하진 않았을 것 같고.
재중이 형에게 꽤 고급 정보를 가져다줄 만한 사람인데.
나는 한 번만 본 사람이라…….
어렵네.
하지만 한 가지 힌트는 얻었다.
최소한 내가 예전에 접속했을 때부터 쭉 했던 사람이라는 것.
뭐 그렇다고 해도 당장 알기는 어렵지만.
“큭, 나중에 알면 꽤 놀라겠는걸?”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재중이 형에게 시스템 메일이 온 뒤.
내용을 쭉 살펴보고는 재중이 형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좋아. 목록 제대로 왔네. 역시 일을 아주 잘해 준다니까.”
“목록요?”
“어, 가자. 다음 네임드를 훔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