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6화 증발하는 네임드들 (9)
원래 후방에서 힐을 지원해야 하는 힐러들이 아무 전조도 없이 그냥 사라진다?
그것도 얼음 여왕 같은 고렙 네임드 레이드 중에?
아예 길드를 탈퇴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건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당연히 레이드 하던 적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적이다!!”
“기습이야!”
“젠장, 하필 지금……!”
물론 이 녀석들이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다보니 대처는 빠르게 나왔다.
“은신한 녀석이 주변에 있어!”
“녀석들을 찾아라!”
“빨리 디텍트 하이딩 유저를 써!”
얼음 여왕을 상대하면서도 주변 상황을 살펴본 메인 탱커가 바로 추가 지시를 내렸다.
“남은 힐러들 보호해! 녀석들은 힐러만 노린다! 보조 탱커들 힐러를 중심으로 방진 다시 짜고! 절대 방심하지 마라!”
현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오더.
저 녀석.
메인 탱커이면서 이 연합의 리더격인가?
분명히 얼음 여왕을 가까스로 막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황 파악을 순식간에 하면서 빠르게 정확한 오더를 내렸다.
네임드를 탱킹하는 개인 능력과 변화가 많은 상황에 대한 판단력.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저런 녀석이 적이면 골치 아픈 대상이지.
그리고 그런 오더를 따라 적들의 진형 배치와 재빠르게 변경되어 갔다.
한순간에 지시를 이행하는 걸 보면 아마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어.
전에 재중이 형이 이야기 했던 대로 상당히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 디텍트 하이딩 유저! 】
메인 탱커의 오더대로 남은 마법사들 중에 누군가가 나를 찾아내기 위해 디텍트 하이딩 유저를 쓰자 곧 그 녀석을 주변으로 파장이 원형으로 밀려 나왔다.
역시.
디텍팅 스킬을 가진 녀석들이 추가로 더 있었어.
이런 점을 대비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날뛰었다면 녀석들에게 덜미를 잡혔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추가로 더 스킬을 가지고 있다고 예상하고 바깥에서부터 힐러들을 잡은 것이 잘한 선택이었다.
자.
이쯤에서 한 번 숙여 주고.
디텍트 하이딩 유저 스킬의 원형 파장이 내 몸을 스쳐가기 전에 허리를 숙여 파장이 몸에 닿지 않게 피해 냈다.
한 번 해봤던 거라 그런지 어렵지도 않았고.
그러자 당연히 누군가 걸려들 것이라 생각했던 디텍팅을 쓴 유저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어? 뭐야? 왜 아무것도 안 걸리지?”
전에 확인했듯이 디텍트 하이딩 유저를 맞으면 은신이 깨진다.
지금쯤 접근한 누군가의 은신이 깨져서 모습이 드러나야 하는데…….
주변에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은신을 한 유저가 기습해 오는 일을 자주 겪어 본 녀석들이라 그런지 은신이 깨지면 바로 공격하려고 자세를 잡고 있다가 결국 고개를 돌려 외쳤다.
아무리 기다려도 은신을 한 유저가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야! 스킬 똑바로 쓴 거 맞아?”
“장난해? 제대로 안 할 거야?”
“아이씨. 이게 아닌데…….”
“다시 써 봐! 그사이에 도망가진 않았을 거 아냐!”
“쿨에 걸렸어!”
“에이, 스킬 하나 못 쓰냐. 내가 쓴다!”
【 디텍트 하이딩 유저! 】
쿨이 걸려서 그런지 또 다른 마법사 유저가 나서서 디텍팅 스킬을 썼다.
재중이 형이 저 스킬 비싸다고 했는데 말이야.
개나 소나 다 들고 있는 기분인데?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
디텍팅 스킬의 파장을 피해 내자 역시 은신은 그대로 유지가 되었다.
두 명이나 시간차를 두고 디텍팅 스킬을 썼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다들 어떻게 생각할까.
이것에 대한 답은 하나 뿐이었다.
“어라? 안 걸리는데?”
“뭐? 안 걸려?”
“어, 전혀. 주변에 은신한 유저가 없는 것 같아.”
“흠, 정말 없는 건가?”
“이 새끼들아. 맞잖아. 내가 잘못 쓴 게 아니라니까. 괜히 나한테 성내고 지랄이야!”
“미안, 미안. 우리도 레이드 중이라 예민한 거 알잖아.”
“에이씨. 이 스킬 사려고 돈을 얼마나 들였는데…….”
“정말 미안하대도.”
서로가 서로를 욕하거나 탓하는 것도 잠시.
메인 탱커가 그들을 진정시켰다.
“디텍트 에어리어 동시에 펼치고 사방 경계 소홀히 하지 마! 아직 녀석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거다!”
【 디텍팅 에어리어! 】
【 디텍팅 에어리어! 】
어.
지켜보고 있는 게 맞다.
그것도 바로 옆에서.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확실히 확인했다.
디텍팅 스킬을 가진 유저가 얼마나 있고 누구였는지도.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는 녀석들 중 하나에게 접근한 뒤.
오러 블레이드를 일으켜 그 마법사의 목을 그대로 따 버렸다.
스악!
“커억!!”
다들 힐러만 보호한다고 그들 주변으로만 보조 탱과 딜러들을 배치시켰지.
정작 디텍팅 스킬을 쓰는 유저는 보호하지 않았다.
아마도 저쪽에서는 힐러만 집요하게 노린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지금 유저들의 배치만 봐도 그런 생각이 그대로 적용되어 있었다.
그리고 디텍팅 스킬을 쓰는 유저를 보호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애초에 그들을 중심으로 디텍팅 스킬을 쓰니까 적의 위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연합 내에서 가장 안전했어야 하는 유저가 목이 갈려 죽음의 빛으로 사라지자 모두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어?”
“뭐야?!”
“죽었어?”
“대체 이게 무슨……!”
적들이 어느 정도 안심을 한 이유는 디텍트 에어리어를 펼치고 있는 유저가 둘이나 되어서였다.
둘이서 각자 거리를 벌리고 자리를 잡아 디텍팅 에어리어를 유지하면 그 면적이 평소보다 두 배나 넓어지게 된다.
그만큼 은신을 한 유저가 뛰어들 팀이 없어진다는 말이기도 했고.
뛰어들더라도 멀리서부터 발각될 확률이 훨씬 높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중심부에 있는 마법사의 목이 먼저 떨어져 나갔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은신! 】
아주 찰나의 순간.
내 모습이 드러났다가 사라지자 누군가 내 아이디를 봤는지 크게 외쳤다.
“노아01?”
“아까 그 녀석 아냐?”
“뭐야? 어떻게 디텍트 에이리어 안에서 은신을……!”
“추격조는 대체 뭐한 거야?”
“빨리 연락해 봐!”
“야! 남은 마법사부터 보호해!”
“젠장,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웅성웅성.
그렇게 당황하면서도 일단은 자신의 할 일을 알아서 찾아 움직이는 적들을 보고는 속으로 감탄했다.
정말 반푼이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네.
그동안 어쩔 줄 몰라하면서 우왕좌왕하는 걸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좀 더 색다르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만큼 훈련이 잘 되어 있거나 임기응변에 다들 강하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각자가 빠르게 판단에 옮겨서 움직이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런 판단들이 이번에는 악수로 다가왔다.
자신이 마크해야 하는 힐러들을 남겨 두고 몇몇이 디텍팅 마법사에게로 붙었으니까.
물론 아예 프리로 둔 건 아니었다.
기존에 지키고 있던 유저들이 있었으니까 그중 소수의 무리가 빠져나와 마법사를 지키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고맙네.
알아서 자리를 비워 주다니.
이전에는 빽빽하게 힐러를 감싸고 있어서 힐러를 치기 위해서는 그들 중 누군가를 잡고 난 뒤에 힐러를 죽일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내 정체가 발각되는 건 물론이고 내쪽이 위험해지지.
반대로 이렇게 호위에 균열이 나게 되면.
빈틈으로 접근하는 게 가능하단 말이야.
그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다시 그들 사이로 파고 들어 힐러의 후방에서 목을 따냈다.
촤아악!
“켁!”
단 일격.
어차피 힐러의 방어력은 그렇게까지 좋지 않았다.
지금처럼 은신에 후방 공격까지 할 수 있을 경우는 더 그렇고.
크리티컬에 추가 대미지가 폭발하면서 힐러가 죽음의 빛으로 변하자 다시 은신을 걸어 빠르게 몸을 빼내었다.
“젠장! 또 당했다!”
“대체 어떻게 파고 든 거야?!”
“아놔, 뭐해? 똑바로 안 지키냐고!”
“씨발, 전혀 안 보이는데 뭘 어쩌라는 거냐!”
뻔히 힐러 주변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균열이 나 힐러가 죽어버리자 다들 서로를 보면서 욕을 했다.
그간 경험으로 평범한 이들은…….
극한 상황이 되면 서로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양을 삼는 편이었다.
물론 다 그런 편이 아니긴 하지만.
지금 저들은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여기서 하나만 더 죽일까.
확실히 레이드를 박살 내기 위해서는.
곧장 자리를 이동해 또 다른 힐러의 목을 따 버리자 적들도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미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지금 디텍팅 똑바로 되고 있는 거 맞아?”
“눈깔 안 보여? 계속 쓰고 있잖아!”
“그럼 이 녀석은 왜 안 잡히는데?!”
“아씨,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젠장할, 네가 모르면 누가 아는데! 레벨도 낮은 거 디텍팅 하나 보고 넣어 줬더니. 그거 하나 똑바로 못할 거면 나가, 새끼야!”
“뭐? 지금 말 다 했어?”
아주 개판이군.
정말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녀석들의 벽은 의외로 허물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재중이 형이 말한 급조한 티가 나긴 하네.
개개인의 능력은 좋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위기 상황이 되자 서로가 서로를 헐뜯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너무 분위기가 엉망으로 치닫자 메인 탱커가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레이드 장소가 떠나가도록.
“이 새끼들이 진짜! 정신 안 차려! 지금부터 서로를 욕하는 녀석들은 바로 제명이다!”
모든 이들의 몸이 움찔할 정도의 하울링.
스킬이 아님에도 이 정도 성량이라.
그만큼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메인 탱커를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저 녀석.
평정심까지 좋잖아.
어지간한 일로는 흔들리지도 않을 것 같은데.
메인 탱커가 중심을 잡아 주자 서로를 탓하던 적들이 금세 입을 다물었다.
“지금부터 다소 피해가 있더라도 전력으로 레이드를 끝낸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어차피 못 잡는 은신이라면 녀석을 무시한다! 일단 힐러를 한곳에 모아. 그럼 방어를 더 두텁게 할 수 있다! 피해는 연합 차원에서 보상해 줄 테니 전부 레이드에 집중하도록! 앞으로 5분 안에 레이드를 마무리하자! 어차피 녀석은 이제 와서 레이드 템을 건드릴 수도 없어.”
저건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하겠다는 말이었다.
피해가 쌓이더라도.
레이드만 성공시키면 그만이라.
아마도 날 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온 결정인 듯했다.
거기다 중간에 얼음 여왕을 쳐봐야 드랍 아이템을 내가 얻지 못한다는 것까지 고려한 판단이었다.
정말 결단력까지 흠잡을 곳이 없어 보이네.
저런 자가 적이라니.
앞으로 꽤 피곤하려나.
그리고 그런 당당한 태도와 확실한 가이드라인에 연합원들의 사기도 한껏 올라갔다.
“우오! 역시 길드장!”
“피해 복구만 해 준다면야!”
“빨리 끝내고 나갑시다!”
“젠장, 화내서 미안하다. 일단 레이드부터 성공시키고 보자고.”
“쳇, 길드장만 아니었으면…….”
“끝나고 풀자고.”
“빨리 힐러들을 모아!”
그러고는 마치 은신한 나를 무시한 듯한 배치를 다시 했다.
이러면 힐러를 더 잡는 건 무리겠고.
이전보다 훨씬 두껍게 바리게이트를 친 이상은 노리긴 어려웠다.
그렇게 모든 연합원들이 얼음 여왕 레이드에 집중하자 오히려 내 쪽이 붕 뜬 상태가 되어 버렸다.
유저 하나둘 더 죽인다고 이 상황이 끝나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녀석들의 움직임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참, 고맙게도 알아서들 도와주네.”
애초에 내가 노리는 건 힐러도 아니었고.
디텍팅 마법을 쓰는 마법사도 아니었다.
그건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할 뿐.
얼마 뒤 급박하게 진행되어가는 레이드에 얼음 여왕이 죽음에 이르려고 하자 은신을 한 상태로 얼음 여왕의 뒤로 돌아 들어갔다.
그리고 씨익 웃으면서 테르타로스를 들어올렸다.
“그럼 차려 준 밥상은 잘 먹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