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5화 전쟁의 이유 (3)
지금 팬텀 나이트를 둘러싼 유저 수는 대략 오백은 넘는 건가.
일일이 정확하게 숫자를 세지는 못했지만 얼추 그 정도 숫자가 맞는 듯했다.
길드로 치면 여섯에서 일곱 정도의 길드가 풀로 참여한 수준.
하지만 길드 휘장을 자세히 보면 거의 열다섯 개 정도가 넘어가는 길드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각 길드에서도 정예들만 뽑아서 왔다는 건데.
혹시나 이전에 봤던 프로 게이머들의 길드가 있는가 싶어 유심히 봤지만 그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주호> 생각했던 녀석들은 보이지 않네요.
그러자 내 의도를 아는지 재중이 형이 피식 웃으면서 대답해줬다.
<불멸> 걔들은 더 좋은 거 잡으러 다니거든.
<주호> 이 녀석보다 더 좋은 녀석요?
<불멸> 네임드가 이거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그냥 떨거지로 남는 걸 이 녀석들에게 넘겨준 거라고 해야 할까?
<주호> 레벨 300대가 떨거지라니. 세상이 정말 많이 바뀌었네요.
<불멸> 정확히 말하면 이 녀석과 다른 녀석들의 리젠 시간대가 겹쳐서 말이지. 일단 3군 정도가 여기 온 거라고 보면 돼.
나름 정예라 생각했는데 이 녀석들도 떨거지 수준이라는 건가.
그렇다고 해서 저 팬텀 나이트가 결코 약한 건 절대 아니었다.
무려 레벨 300대의 네임드.
어중이떠중이들만 보내서는 절대로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대충 봐도 녀석들의 장비는 이전 유저들 수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번쩍이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암흑 드래곤 플레이트보다 더 좋을지도 모르겠어.
이제 암흑 드래곤 플레이트는 무려 5개월 전의 구시대 유물이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사원 중앙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됐다.
“크어어!! 신성한 사원에 발을 들인 심판의 대가를 받으리라!!”
네임드 팬텀 나이트.
투명에 가까운 하얀색의 갑주를 입은 팬텀나이트가 사원의 제단에 완전히 리젠되자마자 사방을 울리는 파동을 일으켰다.
콰아아아!!
단순히 등장만으로도 그 존재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그런 압박감의 파동이 주변을 몰아치자 팬텀 나이트를 둘러싸고 있던 유저들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윽! 꼭 시작은 이렇다니까!”
“저 외침은 어떻게 안 되는 거야?”
“그게 안 되니까 매번 맞아 주잖아!”
“다들 닥치고! 힐러들 빠르게 전체 체력 복구해!”
“탱커는 앞쪽으로 진지 구축!”
【 올라운드 힐! 】
【 올라운드 힐! 】
【 올라운드 힐! 】
.
.
예전의 광역 힐인 와이드 힐과는 그 범위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광범위한 하얀 빛이 힐러들에게서 퍼져 나오며 주변 유저들의 체력이 한꺼번에 끌어올려 주었다.
저 정도면 거의 전체 힐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돈데?
물론 유저 수가 오백이 넘어가기에 한꺼번에 힐을 해 주진 못했지만, 한 번에 수십에 달하는 유저의 체력을 채워 주는 모습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주호> 저게 광역 힐이에요?
<불멸> 어, 요즘 힐러들이 제일 많이 쓰는 거지. 효율은 좀 나쁘긴 한데, 범위가 워낙 넓어서 좋아. 저렇게 네임드들 광역기에 아군이 다 맞을 때는 오히려 저걸 써 버리는 게 훨씬 이득이야. 일일이 찾아서 힐을 할 필요가 없으니까 편하기도 하고.
<주호> 마력이 엄청 들겠는데요?
<불멸> 그러니까 저렇게 힐러를 많이 데리고 왔지.
<주호> 그러고 보니 힐러들이 많긴 하네요.
확실히 들고 난 뒤에 다시 진형을 살펴보니 좀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힐러의 비중이 높아 보였다.
<주호> 그런데 저렇게 하면 다른 길드의 기습에 취약하지 않아요? 힐러들 먼저 쓸려나가면 바로 끝날 것 같은데.
만약 나 같으면 후방에 힐러들 목을 전부 따놓고 시작할 것이다.
대체로 힐러 계열은 방어가 약하기 때문에 한 번에 목을 딸 수도 있으니까.
<불멸> 큭, 지금 저 녀석들을 뒤치기할 수 있는 세력이 있을 것 같아?
<주호> 아…… 뒤치기 걱정이 없으니까 대놓고 저런 식으로 한다는 거죠?
<불멸> 어, 진짜 네임드 공략에만 신경 쓰는 거지. 그래서 저렇게 비정상적인 구조가 나오는 거야.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때 힐러로 보이는 몇몇의 유저들이 다시 전방의 유저들을 향해 마법을 시전했다.
아군에게 거는 걸 보면.
아마도 버프이려나?
【 하이 샤프니스! 】
【 하드 스트렝스! 】
【 윈드 워크! 】
【 어택 오라! 】
【 디펜스 오라! 】
【 쉴드 디펜스! 】
【 라이프 인핸스! 】
【 매직 레지스턴스! 】
.
.
흐음.
대체 얼마나 많은 버프를 거는 거야?
그동안 변한 건 단순히 장비만이 아닌 듯했다.
스킬들 역시도 상당히 변한 모양.
<주호> 못 보던 스킬들이 많네요.
<불멸> 뭐,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그동안 업데이트도 많이 했고. 옛날 생각으로 싸우면 곤란하지.
<주호> 확실히 그렇긴 해요.
거의 같은 장비와 능력이라 가정했을 때.
저렇게 버프가 주렁주렁 달린 걸 모른 상태에서 싸웠다가는 한 번에 확 밀려버릴 수도 있었다.
그만큼 지원의 역할도 많이 바뀌었다 말이었고.
예전에는 버프라고는 딸랑 몇 가지가 전부였는데. 이젠 버프를 받기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지겠네.
심지어 거기에서 끝나지도 않았다.
“뭐해? 빨리 발부터 묶어!”
“팬텀 나이트 날뛰기 시작하면 감당 안 된다고!”
“속박 주문 죄다 걸어!”
“녀석이 뛰지 못하게 해!”
“탱커들 달라붙어서 스턴 걸어!”
“해머 든 녀석들도 전부 유령마 다리 치고!”
【 디스 무브먼트! 】
【 앵커 스플래쉬! 】
【 쉐도우 네트! 】
【 웹 바인드! 】
【 스턴 차져! 】
【 레그 브레이커! 】
.
.
그러자 이번엔 다양한 속박 기술들이 동시에 팬텀 나이트의 신체에 걸리면서 팬텀 나이트의 유령마를 점점 느리게 만들었다.
저렇게까지 속박 스킬이 많아졌다고?
신체 억제는 물론 이동까지 제약하는 스킬들이 한꺼번에 터지자 상승작용을 하는지 저 네임드조차 제자리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묶여 버렸다.
신체 전반적으로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듯한 바람 계열 스킬인 디스 무브먼트.
또 발목 부위에 무거운 사슬 족쇄들이 퍼져 나가 발목을 잡는 앵커 스플래쉬.
실 같은 검은 기운이 몸을 옥죄는 쉐도우 네트.
바인드의 상위호환인 듯 보이는 웹 바인드.
근접 전기 충격인 스턴 차져.
다리에 직접 타격을 줘서 느리게 만드는 레그 브레이커까지.
듣도 보도 못한 속박 스킬들이 팬텀 나이트의 움직임을 묶자 바로 혀를 찼다.
<주호> 장난 아닌데요?
<불멸> 큭, 나도 저건 정말 싫더라. 까딱 실수하면 완전히 멈춰 버린다니까?
이런 스킬들은 네임드 사냥에도 좋겠지만.
PK를 하는 유저들에게 더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특히 나와 재중이 형과 같이 움직임을 살려야 하는 계열에게는 극도로 위험한 스킬들이었다.
한 번 움직임을 잡히면 아무리 높은 민첩이라도 다 쓸모없게 되니까.
단 한순간에 전투를 뒤집어 놓을 수도 있을 테고.
확실히 준비를 철저히 했네.
이 정도까지 네임드를 묶어 둘 수 있다면 그다음은 화력만 좋으면 된다.
당연하게도 둘러싸고 있던 유저들에게서 각종 화려한 스킬들이 뿜어져 나왔다.
이 공격 스킬과 마법들 역시 그간 보지 못했던 스킬들이 대부분이었고.
콰아아앙!
화르르륵!
쿠아앙!
강렬한 폭발과 함께 팬텀 나이트와 유령마가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크어어!!”
“히이이잉!!”
둘 다 꽤 큰 타격을 입었는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자 유저들의 쉴 새 없는 공격이 계속 터져 나왔다.
“공격해!”
“지금 최대한 많이 깎아 놔야 해!”
“절대 늦추지 마!”
아마도 초반에 대미지를 확 줄 수 있는 구간이 지금인 모양인데…….
<주호> 형. 이대로 잡는 건 아니겠죠?
<불멸> 뭐 저렇게 쉽게는 못 잡지.
재중이 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팬텀 나이트와 유령마가 스킬을 맞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건.
일종의 보호막이려나?
팬텀 나이트가 뭔가를 시전한 걸로 보이는데 녀석들 주위로 하얀 막이 생성되어 주변에서 날아오는 모든 공격들을 흡수하거나 방어해 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나도 바로 알았는데 지금 저 녀석들이 모를 리도 없을 테고.
아니나 다를까.
“공격 중지!”
“어차피 지금 안 먹혀! 마력 낭비하지 마!”
“힐러들 뒤로 빠지고! 메인 탱커 달려들어서 어글 먹어!”
“보조 탱들 뒤에 대기! 어차피 혼자선 못 막아!”
메인 탱으로 불리는 꽤 몸이 단단해 보이는 탱커가 곧장 달려들어서 팬텀 나이트와 일전을 벌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방적으로 팬텀 나이트에게 쥐어 터진다고 해야 하려나?
전혀 속도를 못 따라가는데…….
휘두르면 휘두르는 대로 아주 정직할 정도로 처맞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뒤에 있는 힐러들의 손이 멈추지 못했고.
<주호> 설마 저 탱커, 근력하고 체력만 올린 거예요?
<불멸> 어, 안 그러면 버티지도 못하거든. 저렇게 보여도 팬텀 나이트 엄청 강해. 경갑 입은 애들은 몇 대 맞는 순간 바로 녹아 버려. 힐러는 말할 것도 없고. 제대로 맞으면 한 방이거든.
듣고 보니 확실히 팬텀 나이트가 강해 보였다.
<주호> 유저들이 강해서 저 네임드를 잡는 건 아니었나 보네요.
<불멸> 뭐 장비하고 렙, 쪽수로 미는 거지. 공략만 잘 알면 어떻게든 최대한 죽지 않고 잡을 수 있으니까. 그런 공략을 쥐어 준 건 녀석들이고.
<주호> 프로 팀요?
<불멸> 어, 자기들이 일일이 잡으러 다니긴 지역도 멀고 거기다 너무 네임드가 많으니까. 이동에 걸리는 시간에다가 리젠 시간 따져가며 다 잡으려면 고양이 손이라 빌려야 할 걸.
<주호> 그럼 이 녀석들도 일종의 상납을 하는 셈이네요.
<불멸> 크게 본다면 그런 셈이지. 어차피 놀리는 네임드, 충성을 대가로 밀어준다고 해야 하나? 당연히 받아먹을 건 다 받아먹겠지.
어지간히 규모가 크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네.
그리고 이들은 그런 카르텔을 아주 잘 형성해 놓은 상황이었다.
이들에게 사냥터 관리까지 맡겨 놨으니.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전부 손에 쥐고 흔든다고 해야 하려나.
<주호> 그 꼭대기에 누가 있는 거죠?
<불멸> 으음, 전신은 아니야. 전신은 이런 일에 그다지 익숙하진 않으니까. 아니, 그보다는 싫어하는 쪽에 가까우려나.
<주호> 그럼?
<불멸> 아마, 그 스폰서 쪽이겠지.
<주호> 그…… 화련의 언니요?
<불멸> 지금까지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아마도. 이렇게 광범위하게 큰 자금을 쓰면서 전신이라는 칼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대단하긴 하네.
화련의 언니라는 사람.
단지 5개월 동안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1서버를 거의 장악해놓은 것과 다름없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압도적인 여왕과 같은 능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화련이 썩 좋아하진 않던데…….
지금 상황도.
아마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이건 나중에 이야기를 해 봐야겠네.
일단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일부터 해결해야 한다.
<주호> 형, 반지를 어느 정도까지 쓸 수 있죠?
저 텔레포트 반지의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알아야 해.
그리고 재중이 형의 몇 가지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써먹을 수 있겠어.
<주호> 잠시 다녀오죠.
그리고 팬텀 나이트가 있는 제단에서 몰래 빠져나와 유저들이 모두 빠져나가 지금은 휑한 사냥터에 섰다.
“형. 여기 몹, 형한테는 약하죠?”
“뭐, 어렵진 않지.”
말을 끝내자마자 재중이 형이 바로 근처에 있는 유령 몬스터들을 죽여 버린 뒤 한 마리만 남겨서 내게 끌고 왔다.
팬텀 솔저.
그다음에 다시 녀석을 빈사로 만들고는 물었다.
“이걸로 되냐?”
“네, 실험을 해 봐야 하거든요.”
바닥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녀석에게 바로 테로타로스를 들어 올려 머리를 찍었다.
샤각!
유령이라 그런지 특유의 타격 소리는 없이 바람 빠지는 느낌과 함께 녀석의 막타를 치자 곧 팬텀 솔저가 죽어서 사라졌다.
신기하게도 전과는 다르게 죽음의 빛으로 사라지지 않고 시체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
그와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테르타로스가 일반 몬스터 팬텀 솔저를 흡수하고자 합니다. 》
《 허락하시겠습니까? 》
하.
이런 식이었나.
바로 허락을 하자 팬텀 솔저의 남아 있던 잔영이 쭉 빨리듯 테르타로스에게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삭제되었다.
《 테르타로스가 일반 몬스터 팬텀 솔저의 성질을 획득했습니다. 》
그리고 테르타로스의 스펙을 살펴보고는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큭.
그렇단 말이지?
이거 일이 재밌어지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