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2화 왕이 사라진 사이 (9)
“개들이 왕이라…… 새로운 집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거군요.”
“어, 베르테니아 마왕성을 버리고 만든 거점은 자기들 입맛에 맞게 조정이 가능하니까.”
“확실히 마왕이 있으면 마음대로 하지 못하죠.”
그때 당시 유저들이 아무리 날고뛰어 봐야 마왕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마왕이 마왕성 한가운데 딱 박혀 있으니.
기존의 세력 구도가 맘에 들지 않는 녀석들이 판을 엎어 보려고 작정을 하더라도 시도조차 해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기존 세력은 바로 우리였고.
마왕 벨라를 등에 업은 채 베르테니아 마왕성으로 들어오는 모든 자원과 소모품, 아이템, 자금들을 관리했으니까.
뒤늦게 마계로 발을 들인 후발주자들이 이제는 어떻게 해볼 수도 없을 만큼의 커다란 격차가 그들과 우리 사이에 존재했다.
그렇다고 베르테니아 마왕성을 등지고 나가 버리기에는 바깥의 몬스터들이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었고.
아마 어딘가의 거점을 만들기에는 동조하는 세력 역시 부족했을 것이다.
일단 마왕성에서 주변에 달려드는 마계의 강력한 몬스터의 공격을 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베르테니아 마왕성은 충분한 값어치가 있었다.
거기다 세금만 좀 내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데다가 물자 보급까지 완벽한 수급처인 베르테니아 마왕성을 쉬이 떠날 수 있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편안함을 한 번 겪으면 어지간해서는 바꾸려고 하지 않으니.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엄청난 변수가 발생했다.
그것도 기존의 세력 균형에 커다란 균열을 낼 수 있는 변수.
마왕 올펠과 마왕 아르곤.
그리고 마왕 벨라.
이 셋이 이상한 균형을 이루면서 아르곤과도 휴전을 하는가 싶더니 결국 마왕 올펠이 마왕 벨라를 치게 되면서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 버렸다.
“눈엣가시 같던 마왕이 사라졌으니 오죽 좋았을까.”
재중이 형의 날카로운 평가.
이미 재중이 형은 그때 당시 후발 주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냅다 베르테니아 마왕성을 버리고 거점을 세웠다는 거죠.”
“어, 기회만 엿보고 있었을 걸. 그리고 그들 입장에서는 베르테니아 마왕성이 망하는 게 가장 베스트였을 거야.”
“세력 구조를 개편하기 위해서…….”
“거기다 올펠이 신나서 자기들을 도와주니까. 걔들 아마 벨라보다 올펠을 더 좋아할지도 몰라.”
도와준다기보다는…….
아마도 올펠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겠지.
다만 그 일의 결과가 우리에게는 최악이었을 뿐이다.
더군다나 마신의 파편을 얻은 내가 쓰러졌으니.
마왕 벨라와 우리 쪽 연합 사람들을 이어주던 끈까지 완전히 끊겨 버렸다.
소통 불가.
그러다보니 제대로 된 수성조차 하지 못 했고.
유저들이 빠져나가는 것도 막지 못 했다.
결국 우리와 완전히 분리된 그들이 모여 새로운 거점을 만들면서 집을 잃고 방황하던 유저들을 전부 끌어모았다.
자신들의 깃발 아래.
그런 유저들의 많은 숫자로 주변에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정리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녀석들이 거점에 우리를 못 들어오게 했거든.”
“네?”
“너도 잘 알 거 아냐. 시스템적으로 막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는 걸.”
“그렇긴 한데…… 왜 우리만 막는 거죠?”
“흐음, 그걸 네가 모르면 걔들 다 바닥에 엎어져서 울걸?”
우리만 막는 이유라…….
저들이 저렇게 모인 건 일단은 거점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
“설마 네임드 좀 해먹었다고 그러는 건 아니겠죠? 치사하게.”
“왜 아니겠니.”
재중이 형이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보면 웃었다.
“네임드를 좀 해먹은 게 아니라 전부 다 해먹었지. 쟤들 중에 네임드 얼굴도 못 본 애들 엄청 많아.”
“아…… 그랬던 가요?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5개월 전이라.”
잠시 말을 멈췄던 재중이 형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이 아니면 우리를 떨쳐 낼 수 없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게 통제를 하는 거라도요?”
“그래, 완전히 척을 지자는 거지.”
적대 관계도 아닌데 거점의 입장 자체를 막은 것은 대놓고 노골적으로 싸우자는 소리와 똑같았다.
“우리 때는 통제도 안 했는데 왠지 얼울하네요.”
“아아, 그렇지.”
만약 우리가 예전부터 이런 식으로 통제를 했다면.
지금쯤 마계를 올 수 있는 유저들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마계로 넘어오는 길을 싹 막아 버렸을 테니.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음에도.
우리는 하지 않았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라.”
“걔들은 은혜라고 절대 생각 안 할걸?”
“그래서 그 뒤로는요?”
“뭐, 급한 대로 우리 연합 애들 이끌고 저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서 거점을 세웠지.”
“나쁘지 않네요.”
여기까지는 충분히 좋았다.
어차피 거점이야 거리가 좀 떨어져 있으면 세울 수 있는 거고.
굳이 다른 유저들의 거점에 기댈 필요도 없었다.
일단 내가 쓰러질 때쯤에는 우리 팀의 전력이 괜찮았으니.
거기다 연합에도 역시 좋은 인재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변수가 또 발생하지.”
“또 뭐가 있어요?”
“올펠.”
“흐음. 올펠이라니.”
유저들이야 이쪽도 연합이다 보니 어떻게든 싸우면 된다지만.
마왕 올펠은 이야기가 다르다.
부딪히는 순간.
게임 오버.
“그래서 거점은 어떻게 됐어요?”
“꼭 대답이 듣고 싶어?”
“아뇨, 뭐. 그냥 개박살 났군요?”
“표현이 화끈한데?”
“아니, 그런데 먼저 생성된 녀석들의 거점은 놔두고 왜 이쪽만 공격해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데.
그 말에 재중이 형이 바로 한숨을 쉬었다.
“올펠 이 녀석이 집요하게 우리 거점만 노리더라니까.”
재중이 형의 말에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설마…… 저 때문인가요?”
“뭐 너 때문에만 그러겠냐. 아마도 베르테니아 마왕성에 있는 NPC들에게 정보를 얻었겠지. 우리 쪽 연합이 마왕 벨라의 최측근 세력이었다고.”
“이건 뭐 꿩 대신 닭도 아니고. 마왕 벨라를 놓친 분풀이를 우리에게 한 거잖아요.”
“그렇게 봐도 되려나? 아무튼 그때부터 거점을 세우는 게 아예 불가능해졌어.”
“곤란하네요.”
거점.
베르테니아 마왕성이 없는 이상.
물약이라던가 소모품 일체.
그리고 장비의 수리라던가 귀환 장소 등등.
없으면 사냥에 큰 지장이 오게 된다.
특히 마계에서는 더 그렇고.
마왕 올펠이 집요하게 방해한다면.
그 녀석을 후려 팰 정도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한다.
“자, 이 상황에서 또 다른 변수가 일어나지.”
“또 있어요?”
“어, 녀석들이 척살령을 뿌리더라고.”
“네?”
“마왕 올펠 때문에 갈 곳 없는 우리에게 아예 못을 박으려고 하더니까? 아주 기회다 싶었는지 개떼처럼 들고일어나더라고. 우리 애들 가는 곳마다 저격할 애들 대기시켜 놓고 말이지.”
그 말을 듣고는 머릿속의 먼가가 툭 끊기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재중이 형 말대로 진행됐다면.
백중 구십은 전멸이다.
저쪽은 지원을 받고 움직이지만.
우리는 아니니까.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 속에서 계속 싸워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이건 전부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난 마왕 벨라와 이야기가 되니까.
유저들을 마왕 벨라가 내는 퀘스트로 보상을 걸어 확실하게 긁어모으고.
마왕 벨라의 기동력과 유저들의 무한 생명을 조합해 어떻게든 장기전으로 이끌고 갔을 것이다.
좋든 싫든 무조건 싸우게.
그렇게 길게 싸우면서 틈을 봐 마왕 올펠에게 피닉스의 알이 있다는 것을 다른 서열의 마왕에게 흘리면 되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바이카르 같은 녀석에게 흘리는 순간.
정말 피 터지게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럼 마왕 올펠은 더 이상은 우리에게 신경 쓰지 못할 테니까.
서로의 마왕성에 거리가 멀리 있다 보니 언제까지고 이곳에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은 마왕 올펠을 엄청나게 귀찮게 만들어 놓고 이 전쟁을 끝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 재중이 형이 허탈한 듯 웃음 지었다.
“그때는 답도 없던데.”
“뭐 저도 이게 완전히 될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아요. 이미 지난 일이기도 하고요.”
내가 자리를 비운 지 무려 5개월이다.
그간의 트러블로 다른 연합과 골이 깊어지기에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
그리고 내 생각 이상으로 그 골은 꽤 깊은 듯했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금은 그렇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당장의 랭킹만 봐도 잘 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다들 랭킹의 위에 포진하고 있어야 할 텐데.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챠밍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요?”
챠밍이야 로스트 스카이 주제곡을 부른다고 빠진 데다가 새 솔로 앨범을 준비해야 하고 실제로도 많은 시간을 연습에 할애하는 중이었다.
자주 못 들어오면 당연히 랭킹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랭킹 하락은 의아했다.
그보다 더 문제는.
접속을 제대로 했음에도 랭킹이 안 오르는 경우.
이건…….
거의 사냥을 못 했다고 봐야 할 텐데…….
내 물음에 재중이 형이 곧장 한숨을 쉬었다.
“얘들은 사냥을 거의 못 했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네?”
정말 뜻밖의 말을 들어서인지 잠시 멍한 느낌이 들었다.
그 정도까지 상황이 어려웠었나?
“애들은 잠시 쉬라고 내보냈어. 접속해 봐야 제대로 사냥을 못하니까.”
“우리 길드만 그런가요? 연합 사람들은요? 쪽수로 아예 밀리지 않을 텐데…….”
“흠, 그건 나중에. 말보단 직접 보여 주는 편이 낫겠지.”
아무래도 상황이 꽤 심각해 보였다.
이대로 놔두면 안 될 정도로.
반대로 우리와 달리 상대 녀석들은 레벨을 꾸역꾸역 잘도 올려서 꽤 격차가 나 있었다.
“그럼 지금 상위 랭킹들이 그 개들인가요?”
“아마 상당수? 100위 안의 1/3 정도의 상위 랭커들뿐만 아니라 그 밑의 녀석들 중 만 위까지는 거의 반 이상이라고 보면 돼.”
“규모가 엄청나네요.”
하긴.
이 정도 규모니까 마계에서 거점을 세울 수 있었겠지.
“꽤 많다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아. 저들은 이미 저들만의 카르텔을 형성했으니까. 지금은 워낙 견고해져서 어지간해서는 깨지지도 않을 거다.”
카르텔이라…….
내가 없는 5개월 동안 정말 많은 것이 변했네.
그리고 견고해져서 깨지지 않는다고 하니까 괜히 오기가 생겼다.
“원래 깨지 말라는 건 깨고 봐야죠.”
“그건 어디 나오는 속담이냐?”
“제가 방금 지어 낸 건데요?”
“큭. 이 녀석. 그래서 무슨 수로 깰 건데?”
“음, 방법을 생각 중이에요. 안에서부터 와장창 깨졌으면 좋겠는데…….”
뭔가 방법이 떠오를 듯 하면서도 떠오르지 않네.
적들의 수가 많을수록 파고들 수 있는 틈이 많을 터.
그리고 특히 척살령까지 내린 녀석들을 그대로 놓아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로 인해 피해도 엄청나게 보는 중이었고.
우리가 치지 않으면.
결국 당하는 건 우리가 될 테니까.
이쪽이 깨지던가.
저쪽이 깨지던가.
정답은 하나뿐이야.
“형, 녀석들을 완전히 박살내 버려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