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9화 왕이 사라진 사이 (6)
접속의 과정은 항상 똑같았다.
VRS 덮개가 내려지고 LED 라이트가 잠시 켜졌다가 다시 사라지면서 완전한 어둠이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신이 흐릿해지면서 곧 VRS 시스템과 연결이 되어 눈앞에 로그인 로고와 함께 환한 화면으로 변한다.
하지만 이전까지는 이 과정조차 통과하지 못해 시뻘건 경고 메시지와 함께 ERROR 메시지가 떴었다.
접속 불가.
지금도 마찬가지.
《 ERROR 코드 501. 발생. 》
《 유저의 뇌파 지수가 정상이 아닙니다. 》
《 로스트 스카이 서버에 접속할 수 없습니다. 》
《 지속적으로 로그인이 되지 않는다면 로스트 스카이 홈페이지에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
《 VRS 불량시 해당 VRS 회사로 문의해 주세요. 》
여전히 ERROR 메시지가 뜨면서 접속을 막아섰다.
젠장.
또 안 되는 건가?
당연히 나도 실망을 했지만.
그동안 열심히 준비한 유혜선 팀장 역시도 허탈할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때.
로그인 화면 옆에 무언가 푸른색의 포탈이 생성되어 빛을 발했다.
그리고 일렁이는 포탈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무슨……?
로그인 화면은 말 그래도 로그인 화면일 뿐이다.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스템도 아니었고.
그런데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뭔가가 튀어나오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포탈에서 튀어나온 건…….
“처음 뵙겠습니다. 유저 주호 님 전용 인공지능 RE-01입니다.”
하얀 두 쌍의 날개를 펄럭이면서 주변에 빛가루를 흩날리며 내게로 날아오는 작은 소녀의 모습.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날아다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요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VRS를 통해 음성이 들려왔다.
-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유혜선 팀장이네.
외부에서 바로 시스템을 통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 소녀가 인공지능인가요?”
- 귀엽죠?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 주변을 날아다니는 모습이 정말 귀엽게 느껴졌다.
얘를 보고 있으니까 꼭 금속의 정령이 생각나네.
흑발에 갑옷을 입고 있는 금속의 정령과는 완전 대조적인 모습이었지만 비슷한 요정의 모습이라 그런지 더 친숙하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금속의 정령은 잘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접속을 못 했기 때문에 어떻게 되었는지도 나도 알 길이 없었다.
아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 않을까?
아니다.
금속의 정령은 언제든 떠날 수 있으니까.
접속을 못한 지 거의 5개월이 넘어가는데 녀석이 가만히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름도 모르네.
좀 더 친해지면 알 수 있을까 했는데.
만약 접속하게 되면 이번엔 이름부터 알아내야겠어.
- 그 애가 승호 씨 접속하는 걸 도와줄 거예요.
“그런데 이거, 게임사에서도 알고 있습니까?”
내 말은 지금 하는 이 시스템이 로스트 스카이 쪽의 허가를 받고 하는 일인가를 물은 것이었다.
- 네, 당연히 알고 있죠. 지금쯤 다들 모여서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해하고 있을 걸요?
“제가 접속하는 걸 말인가요?”
- 이건 그쪽에서도 관심 있는 일이라서요. 계속 접속에 필요한 정보를 넘겨주기도 했고요.
“의외네요. 벌써 잊은 줄 알았는데.”
- 승호 씨 전적이 워낙 화려해서요. 그리고 안정성 문제도 걸려 있고요. 이대로 승호 씨가 접속을 못 하면 앞으로 수출에도 큰 영향을 미칠 거예요. 로스트 스카이 쪽이나 우리 쪽이나.
저쪽은 단지 그 이유가 끝이 아닌 것 같다만.
어쨌든 그런 사정이라니.
일단은 넘어가 줘야겠지.
내게도 나쁜 일은 아니니까.
아직까지는.
“허가가 됐다니 다행이네요. 나중에 태클 걸면 어쩌나 했어요.”
불법 프로그램 사용자 같은 걸로 끝나고 싶진 않으니.
- 그 문제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미 처리가 다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접속만 가능해지면 된답니다.
“저도 되면 좋겠네요.”
그리고 내 옆에 날아든 RE-01을 바라봤다.
“접속했으면 하는데. 가능하겠어?”
“열심히 해볼게요!”
뭔가 굉장히 의욕적이네.
“귀엽네.”
“감사해요!”
작은 요정이 두 손을 배에 모으고 90도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옆에 두기만 해도 게임하는 동안 심심하진 않을 것 같다.
“그럼, 주호 님의 접속을 진행합니다.”
《 슈퍼 컴퓨터 엘 1호 활성화! 코어 1번에서 100번 동시 가동! 》
《 접속을 위해 코어 1번에서 100번까지 풀 로드 중입니다. 》
《 로스트 스카이 사의 시스템과 우회 연결 중. 》
《 접속에 따른 주호 님의 리바운드 방어를 위해 코어 101번에서 200번까지 동시 가동합니다. 》
《 예비 시스템으로 코어 201번부터 300번까지 대기 중. 》
.
.
《 접속 1차 시도…… 》
《 1차 시도 실패. 》
《 실패로 인한 리바운드 방어 중. 》
《 접속 2차 시도…… 》
《 접속 실패. 》
《 접속 경로를 우회합니다. 》
.
.
그 외에도 계속해서 뭔가의 시스템 메시지가 올라오면서 접속을 시도했다.
그런데 의아할 정도로 내게는 아무런 지장이 오지 않았다.
전에는 접속 실패 시 굉장한 두통이 찾아왔었는데 말이지.
그런 두통과 함께 바로 VRS가 열렸지만 지금은 달랐다.
- 어때요? 비싼 값 하죠?
“확실히 그러네요.”
리바운드 방어라는 게 이런 거였나.
아마도 저 RE-01이 리바운드로 인한 충격을 전부 해소시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 그래도 피로도는 쌓일 거예요. RE-01이 뇌파를 실시간으로 측정해서 일정 이상 쌓이면 알려 줘요. 직접 확인해 보셔도 되고요.
“기능이 많네요.”
- 이왕 만드는 거 좀 다양하게 넣어봤어요.
능력도 좋지.
덕분에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RE-01이 로그인 시스템과 싸우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정말 돈이면 되는구나 싶기도 하고.
누가 VRS 기기 하나에 오백억이라는 돈을 투자하겠는가.
만약 내가 DS사와 연관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하지도 않았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드디어 입질이 왔다.
《 코어 1번에서 100번까지 활성화 87%. 곧 한계에 도달합니다. 》
《 코어 1번부터 100번까지 냉각에 들어갑니다. 》
《 대기 201번부터 300번으로 메인 코어 교체. 》
.
.
《 접속 57차 시도…… 》
《 57차 시도 성공. 》
《 주호 유저 뇌파 안정화. 》
《 로그인 서버와의 연결 시스템 안정. 》
《 로그인에 성공했습니다. 》
왠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로그인이 되어 버려서 허탈한 기분도 들었다.
이런 방식으로 할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로그인 됐어요. 주호 님!”
“그래, 정말 고맙다. 수고했어.”
그리고 바로 화면이 전환되면서 이전과 똑같은 로그인 화면이 떠올랐다.
< 로스트 스카이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뇌파 확인.
> 주승호. 남성.
> 캐릭터명 주호. 레벨 155.
> 로딩 중...
다시는 접속 못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감개무량하다고 해야 하려나.
그리고 로그인을 기다리는데.
화면이 전환되면서 화려한 동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전에 마계에 있을 때 봤던 마왕들과 처음 보는 새하얀 녀석들의 대규모 전투가 펼쳐지면서 영상이 시작되었다.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상, 공중을 꽉 채운 병력들이 서로 뒤엉켜서 전쟁을 벌였고.
그 가운데서 마왕과 그를 상대하는 적들의 전투 모습을 집중적으로 보여주었다.
얼마 전 새 시즌이 시작됐다더니.
아마도 지금 나오는 영상이 그것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지금 귓가로 흘러나오는 노래는 익히 잘 알고 있는 목소리이기도 했고.
음악이 시작되며 웅장함이 깃든 박진감 넘치는 빠른 비트의 노랫소리가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전투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특유의 청아한 목소리가 고음으로 치달을 때는 온몸에 전율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누가 들어도 기억에 남는 노래일 터.
일단 노래도 노래지만.
흔들림 없이 내지르는 가창력이 이 곡을 충분히 소화해내었다.
아니.
그 이상의 심장을 두들기는.
특유의 호소성 짙은 목소리가 이 노래를 더 살려 냈다.
단순히 노래를 잘 하는 수준이 아니었잖아.
걸그룹을 하면서 단체로 댄스곡을 부를 때와는 그 감성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목소리 전체에 음정을 끝까지 밀고 올라가는 탄탄한 힘이 실려 있어.
누가 얘를 공백기가 긴 가수라고 생각하겠는가.
“잘하고 있었네.”
내가 접속을 못하는 동안 은하는 은하 나름대로 이것을 위해 준비를 했었다.
재중이 형도 한동안 이 일로 바쁘기도 했고.
매니지먼트를 옮기랴.
메인에 쓸 곡을 준비하랴.
나중에 결과물로 보여 준다고 하더니.
정말 제대로 터트려 버렸다.
이건 누가 들어도…….
한 번쯤은 포털에 검색해 볼 것이다.
로스트 스카이 주제가를 부른 게 누구인지를.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들어도 이 정도라면.
잘 된건가.
“혹시 이 곡, 제목 알 수 있어?”
“『 운명을 넘어서 』. 가수 은하가 부른 곡이에요.”
“그래? 좋네. 성적은?”
“현재 음원 종합 차트 94위에요.”
“응?”
뭐지?
이렇게 좋은데?
거기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분명히 재중이 형이 은하와 챠밍을 엮어서 홍보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밖에 정보는?”
“잊혀진 걸그룹 멤버의 홀로서기라는 기사가 가장 많아요.”
“로스트 스카이에 챠밍은?”
“연관 검색어가 없어요.”
으음.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어째서 알리지 않은 거지?
그때 혹시나 해서 RE-01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유저 챠밍의 현재 랭킹은?”
“현재 개인 랭킹 27201 등이에요.”
“뭐……?”
챠밍이 27000등 바깥이라고?
대체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한때 랭킹 10위권 안에 있던 유저가 이렇게 떨어지다니.
챠밍과 엮어서 홍보를 하지 않은 이유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타이밍이 안 좋아…….
27000등 바깥이면.
결코 주목을 받을 수 없어.
그냥 로스트 스카이를 좀 즐기는 유저 정도로 인식이 될 뿐이지.
아마 걸그룹 멤버가 게임 좀 했다 정도밖에는 효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냥 지나가는 행인 수준 정도에 불과한.
혹시 재중이 형이 로스트 스카이 관련해서 당분간 관심을 끄라고 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뭔가 확실히 잘못되어 있어.
“유저 불멸의 랭킹은?”
“개인 랭킹 357등이에요.”
“이런…….”
재중이 형이 300등 바깥으로 밀려나다니.
아무리 요즘 엔터 일로 바빴다고 하지만.
랭킹이 저렇게 떨어질 정도로 불멸 캐릭을 놀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들의 랭킹을 보니까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전부 다 왜 이래?”
전사 형, 나르샤 누나, 이쁜소녀, 막내별까지.
하나같이 10000등 바깥으로 밀려난 상태.
재중이 형만 그나마 유일하게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었다.
이름값만 하듯이.
그러고 보니 이번 대회에 나서는 재중이 형 장비도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어.
상대적으로 전신의 장비가 좀 더 좋았었나.
난 그게 제일 손에 익어서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면?
그럼에도 대전 상대들을 전부 누르고 우승하다니.
전신 입장에서는 정말 기도 안 찼겠네.
300위 밖으로 밀려난 유저가 대회 우승을 하는 건 앞으로 전무후무한 일이 될 테니.
그러고 보니 예전에 재중이 형은 내가 로스트 스카이를 계속 신경 쓸까 봐 아예 관련 기사를 하나도 못 보게 했었다.
혹시라도 궁금해도 보지 말라고.
지금 보니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괜히 봤다가 조바심이라도 낼 거라 생각했던 건가.
이 상황들을.
안 그래도 뇌파가 안정적이지 않다고 했는데.
거기에 더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던 것 같았다.
최근에 대회 결승전만 본 게 전부였으니.
이것도 재중이 형이 우승 가능성이 있으니까 본 것이었다.
이런 상황들을 생각하자 곧장 한숨이 나왔다.
“하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지만.”
바로 잡아야겠어!